에드워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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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 초상화
에드워드 6세 초상화
잉글랜드아일랜드의 왕
재위 1547년 1월 28일 - 1553년 7월 6일
대관식 1547년 2월 20일
전임 헨리 8세
후임 제인 (폐위) 또는 메리 1세
신상정보
출생일 1537년 10월 12일(1537-10-12)
출생지 잉글랜드 미들섹스
햄프턴코트궁
사망일 1553년 7월 6일(1553-07-06)(15세)
사망지 잉글랜드 그린위치궁
가문 튜더
부친 헨리 8세
모친 제인 시모어
종교 개신교
묘소 1553년 8월 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서명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는 튜더가잉글랜드 국왕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군주는 아일랜드의 국왕을 겸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6세 역시 두 왕국의 군주로 재위하였다.

1537년 10월 12일 헨리 8세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로 태어났다. 에드워드 6세가 태어난 시기 잉글랜드 교회는 이미 수장령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 6세는 태어나면서 부터 개신교로서 자란 잉글랜드의 첫 군주였다.[1] 1547년 2월 20일 아홉살의 나이로 즉위하여 재위 기간 동안 실제 통치는 섭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 섭정은 외삼촌이었던 서머싯 공작가의 에드워드 시모어이었고 그가 동생 토머스 시모어과 권력 암투 끝에 몰락한 뒤로는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섭정이 되었다.

에드워드 6세 시기의 잉글랜드는 밖으로는 오랜 숙적인 스코틀랜드와 여전히 전쟁이 있었고 안으로는 반란의 위기를 겪었다.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아버지 헨리 8세 시기부터 있었던 것들의 연장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역시 계속되어 잉글랜드 교회는 신학과 교리, 조직의 측면에서 점차 가톨릭과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에드워드 6세 시기 잉글랜드 교회의 가장 큰 변화는 미사를 폐지하고 성공회 기도서를 출간하여 가톨릭과는 다른 전례를 시행한 것과 성직자의 독신 의무를 폐지하여 결혼을 허용한 점이었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심각한 병에 걸려 점차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후계 문제가 발생하였다. 열다섯에 불과하였던 에드워드 6세는 후사가 없었고 헨리 8세 당시 만들어진 왕위계승법에 따른 후계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였기 때문이다. 섭정과 신료들은 메리 1세가 즉위할 경우 그간 진행되었던 종교 개혁이 무효화 되고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이란 점을 두려워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유언장을 통해 왕위계승 서열을 바꾸어 제인 그레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직계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방계를 내세운 이 조치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메리 1세가 이복 동생이자 직계로서 함께 왕위계승 서열에서 제외된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스트앵글리아에서 거병하자 추밀원은 내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메리 1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였고, 제인 그레이는 즉위 9일 만에 폐위되었다.

출생[편집]

에드워드는 1537년 10월 12일 미들섹스햄프턴코트궁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헨리 8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이미 두 번이나 파혼하고 세 번째 부인으로 제인 시모어를 맞았으며,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국왕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대중들도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안도하였다.[3] 헨리 8세는 첫 부인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메리 1세를 나은 후 유산을 거듭하다 폐경을 맞자 가톨릭과의 결별을 무릅쓰며 파혼하였고, 앤 불린 역시 엘리자베스 1세를 나은 후 불화 끝에 파혼하고 처형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번째 왕비의 출산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밤 늦게까지 화톳불을 밝히고 테 데움을 부르며 축하하였고, 런던탑에서는 2천 발이 넘는 예포를 쏘았다.[4]

제인 시모어는 "국왕 폐하와 저 사이의 합법적인 결혼으로 잉태된 왕자"의 출산을 알리는 편지를 썼고 10월 15일 세례식을 치렀다. 당시 21세였던 메리 1세가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의 대모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세례에 쓰일 성유를 들었다.[5]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가터 훈장과 함께 콘월 공작체스터 백작의 작위를 내려 자신의 적장자임을 선포하였다.[6] 그러나 제인 시모어는 출산 후 산욕열에 시달리다 12일 만인 10월 24일 사망하였다. 헨리 8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을 얻은 기쁨과 아내를 얻은 슬픔이 함께하는 복잡한 심정을 밝혔다.[7]

유년기[편집]

에드워드는 건강한 아기였고 헨리 8세는 늦둥이 아들을 너무나도 아꼈다. 그는 에드워드를 품에 안고 뛰어다녔고 발코니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아들을 들어 올리며 자랑하였다.[8] 1538년 9월 무렵 총리인 토머스 오들리는 왕자가 건강히 자라고 있다고 기록하였고[9] 다른 기록에서도 이 시기 에드워드는 건강하고 활달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위 이후의 내성적 성격과 이른 나이의 사망 때문에 에드워드는 일반적으로 병약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첫 돐까지의 기록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견해에 힘을 싣고 있다.[10] 네 살 무렵 말라리아의 일종인 나흘 열병을 앓았고[11] 이후로도 간혹 열병에 걸렸으나 시력이 나빴다는 점을 빼면 사망 전 반 년 동안의 병세 외에는 크게 건강을 잃지는 않았다.[12]

Painting of Prince Edward as a baby, depicted with regal splendour and a kingly gesture. He is dressed in red and gold, and a hat with ostrich plume. His face has delicate features, chubby cheeks and a fringe of red-gold hair.
1538년 한스 홀바인이 그린 1세 무렵 에드워드 6세의 초상[13]

친모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어린 에드워드 6세는 여시종장들이 보살폈다. 에드워드 6세는 훗날 자서전적인 연대기에서 스스로 "여인들 품에서 자랐다"고 표현하였다.[14] 왕자를 위한 궁전은 측근들의 책임 아래 보안과 청결이 강조되었다. 헨리 8세는 "이 나라의 가장 귀중한 보석"인 왕자의 보호에 각별히 주의할 것을 명령하였다.[15] 에드워드는 음유시인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며 각종 장난감에 둘러쌓인 행복한 아이로 자랐다.[16]

정식 교육은 6세부터 시작하였으며 캐임브리지의 주교였던 리처드 콕스와 캐임브리지 대학교의 그리스어 교수였던 존 체크와 같은 인물들로 부터 당시 유럽 왕실 교육의 일반적 경우와 같이 언어, 철학, 성경, 자유 학과 등을 배웠다.[17] 이 외에도 산술, 각국의 언어, 류트버니널과 같은 악기의 연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습이 이루어졌고[18] 토머스 크랜머 등으로 부터 반가톨릭과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학습하였다. 1549년 무렵이 되자 에드워드 6세는 교황적그리스도로 칭하는 작문을 하게 되었다.[19] 헨리 8세의 수장령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가톨릭과 분리되어 개신교를 표방하였으나, 당시까지도 주교제 아래의 성직자가 미사를 거행하는 등 교리와 조직 면에서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20]

에드워드의 이복 누나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모두 동생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직접 뜬 셔츠를 주기도 하였고[21] 메리는 외국의 춤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에드워드는 메리에게 외국 춤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1546년 보낸 편지에서 "누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썼다.[22] 헨리 8세는 앞 선 두 번의 파혼 과정에서 자신의 딸들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박탈하였다. 16세기 무렵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결혼을 죽음을 맞을 때까지 유지하여야 할 신성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헨리 8세의 파혼은 공식적으로는 이혼이 아니라 결혼 무효 선언이었다. 첫 부인 카탈리나의 경우 형인 아서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결혼은 무효라 주장하였고, 앤 불린의 경우 결혼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간통죄와 반역죄를 씌웠다. 그 결과 장녀인 메리와 차녀인 엘리자베스 모두 정상적인 결혼에 의한 자녀로서 인정되지 않았고 결국 왕위계승권도 박탈된 상태였다.

1543년 헨리 8세는 자신의 뒤를 이을 에드워드가 무사히 잘 자라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새로 맞이한 왕비인 캐서린 파가 딸들과의 화해를 권하자[23] 헨리 8세는 그간 자신의 처사가 정당했음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 두 딸의 왕위계승권을 복권시켰다.[24] 이미 장자인 에드워드가 후계를 이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새어머니인 캐서린 파를 잘 따랐다. 1546년 9월 캐서린 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워드는 자신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라 불렀다.[25]

헨리 8세는 유수한 귀족 가문의 자재들을 불러모아 에드워드와 함께 교육받고 놀 수 있도록 하였다. 외사촌 윌리엄 시드니는 훗날 당시의 에드워드가 "온화하고 관대한 아이"였다고 회상하였다.[26] 헨리 8세는 왕자의 방을 플랑드르의 값비싼 태피스트리로 꾸미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식기를 들였으며[27] 자신의 취향에 따라 왕자 역시 군대의 지휘관처럼 외양을 꾸미게 하였다.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각종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단검을 차도록 하였다.[28] 에드워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열망을 물려받아 1547년 스스로 작성한 연대기에서 특히 전쟁과 관련한 모험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기록하였다.[29]

거친 구애[편집]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오랜 숙적이었고 늘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헨리 7세는 자신의 딸 마거릿 튜더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혼인시켰으나 이후로도 두 나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자 이 패배로 신경쇠약에 빠진 제임스 5세가 결국 사망하고 태어난 지 1주일에 불과하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헨리 8세는 아버지인 헨리 7새의 전례를 따라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결혼시켜 잉글랜드가 패권을 쥔 가운데 두 왕국의 갈등을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스코틀랜드는 헨리 8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고 1543년 7월 1일 약혼이 선포되었지만, 헨리 8세가 갖난아기였던 여왕을 볼모로 삼기 위해 잉글랜드로 보내라 요구하자 스코틀랜드는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544년 4월 헨리 8세는 격분하여 자신의 측근이자 에드워드의 외삼촌인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에든버러를 불태우라"고 명령하였다.[30] 이로서 잉글랜드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고 두 국가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 결혼을 요구하는 군사 작전이었다는 의미에서 "거친 구애"라 불리는 이 사건은 두 국가 사이의 적대적 감정을 더욱 키웠다. 잉글랜드는 결국 에든버러를 불태우며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사건으로 스코틀랜드는 더욱 잉글랜드를 경계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31]:297

재위 시기[편집]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였던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죽자마자 9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1547년 2월 20일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권력자들에게 휘둘려지는 것을 염려하여, 에드워드가 어른이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가 그를 보좌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지만, 서머싯 공작인 에드워드 시모어는 이를 묵살했다. 서머싯 공작은 에드워드의 맏외숙으로 에드워드 6세의 즉위날과 같은 날인 2월 20일에 스스로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사실상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서머싯[편집]

생전에 헨리 8세는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여왕메리 스튜어트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의 실권까지 잡으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서머싯 공작은 이를 계승하여,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메리를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좌절되었다. 1549년 메리의 모후로 스코틀랜드의 섭정 왕대비메리 드 기즈가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의 왕세자와 결혼시키려는 목적으로, 메리를 프랑스에 보냈던 것이다.

왕위계승[편집]

1552년 서머싯 공작이 실각하며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역시 호국경으로서 실권을 잡았다. 1553년 5월 21일 에드워드의 병세가 심해지자, 노섬벌랜드 공작은 어린 왕이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에드워드의 2명의 이복 누이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고자 자신의 아들인 길드포드 더들리를 에드워드의 내종생질녀(오촌조카) 제인 그레이[32]와 결혼시켜, 제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라고 에드워드에게 강요했다.

번번이 위협받은 왕위[편집]

에드워드는 너무 어렸고 병약하기도 하였고 통치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번번이 이복 누나 메리 1세로부터 왕위의 위협을 받았다. 관심이 그의 똑똑한 머리가 반란을 진압하였던 것이다.[모호한 표현] 그리고 그는 아내없는 독신으로 전에 약혼하였다 깨어진 메리 스튜어트를 항상 비난하기도 했다.

제인[편집]

왕위 계승법으로 볼 때, 제인보다는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계승 순위가 더 높았지만, 메리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엘리자베스는 당시 스캔들의 기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가 스스로의 의지로 제인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제인은 에드워드와 같은 가정교사로부터 학문을 배운 데다가 열렬한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은 이러한 처사를 납득하지 않았으며, 제인은 훗날 9일 여왕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종교개혁[편집]

아버지가 이룩한 종교개혁으로 성립된 영국 성공회의 전례문서인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가 1549년 제정되어 전례와 교리도 많이 바뀌었다. 에드워드 6세는 누나인 메리 1세가 열렬한 가톨릭 신자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홍역과 천연두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자 에드워드의 걱정은 커졌다. 자기가 죽고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으면 잉글랜드에서 다시 가톨릭을 부흥시킬까봐 두려워 했다. 그의 우려대로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메리는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개신교를 탄압하는 피의 정치를 펼쳤다.[33]

병사[편집]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지 6년 만에 16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는 아주 평온하고 경건하게 개신교를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후 숨을 거두었다.[34]

기타[편집]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그를 모델로 하였다.[35]

각주[편집]

  1. “5 Fascinating Facts about King Henry VIII's son, King Edward VI”. 2018년 3월 11일. 2021년 12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11월 19일에 확인함. 
  2. Loach 1999, 4쪽.
  3. Hugh Latimer, bishop of Worcester, quoted by Erickson 1978, 181쪽.
  4. Loach 1999, 5–6쪽.
  5. Loach 1999, 5–6쪽.
  6. Erickson 1978, 182쪽.
  7. Skidmore 2007, 20쪽.
  8. Loach 1999, 8쪽.
  9. Loach 1999, 8쪽.
  10. e.g.: Elton 1977, 372쪽; Loach 1999, 161쪽; MacCulloch 2002, 21쪽.
  11. Skidmore 2007, 27쪽.
  12. Skidmore 2007, 33, 177, 223–234, 260쪽.
  13. Foister 2006, 100쪽.
  14. Skidmore 2007, 22쪽; Jordan 1968, 37–38쪽.
  15. Skidmore 2007, 23쪽; Jordan 1968, 38–39쪽.
  16. Loach 1999, 9–11쪽.
  17. Loach 1999, 11–12쪽; Jordan 1968, 42쪽.
  18. Jordan 1968, 40쪽; MacCulloch 2002, 8쪽.
  19. Loach 1999, 13–16쪽; MacCulloch 2002, 26–30쪽.
  20. Skidmore 2007, 38쪽.
  21. Skidmore 2007, 26쪽.
  22. Skidmore 2007, 38–37쪽; Loach 1999, 16쪽.
  23. Starkey 2004.
  24. Mackie 1952, 413–414쪽; Guy 1988, 196쪽.
  25. Skidmore 2007, 34쪽.
  26. Skidmore 2007.
  27. Skidmore 2007, 35–36쪽.
  28. Skidmore 2007, 36쪽; Strong 1969, 92쪽.
  29. Loach 1999, 53–54쪽 see Jordan 1966 for full text
  30. Wormald 2001, 58쪽.
  31. 케네스 O. 모건, 《옥스퍼드 영국사》, 한울, ISBN 978-89-460-6133-0
  32. 사촌동생이라고도 하지만, 제인의 어머니인 레이디 브랜던과 에드워드 6세가 내외종간이므로 이는 잘못된 것이다.
  33.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p438.
  34. 《찰스디킨스의 영국사 산책》p439.
  35.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참고 문헌[편집]


전 대
헨리 8세
영국의 군주
1547년 - 1553년
후 대
제인 그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