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Sadopaul/예술/음악1: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2번째 줄:
|이름 = 프랑시스 장 마르셀 뿔랑
|이름 = 프랑시스 장 마르셀 뿔랑
|원어이름 = Francis Jean Marcel Poulenc
|원어이름 = Francis Jean Marcel Poulenc
|그림 = Francis Poulenc and Wanda Landowska (cropped).jpg
|그림 = Poulenc-1922.jpg
|그림크기 =
|그림크기 =
|그림설명 =
|그림설명 =
140번째 줄: 140번째 줄:
뿔랑의 [[실내악]]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22세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을 초기 실내악 작품으로 분류하는데,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 (1918),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18),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소나타 (1922), 호른, 트럼펫, 트롬본을 위한 소나타(1922) 총 네 개의 소나타가 이에 포함된다.<ref>Keck, p. 285</ref> 이 곡들에서는 재즈의 화성과 로코코 시대의 디베르티시망(divertissements)양식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모두 10분을 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작곡된 다른 곡으로는 《흑인 랩소디 (1917)》와 [[오보에, 바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26)가 있다.<ref name="grove" />
뿔랑의 [[실내악]]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22세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을 초기 실내악 작품으로 분류하는데,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 (1918),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18),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소나타 (1922), 호른, 트럼펫, 트롬본을 위한 소나타(1922) 총 네 개의 소나타가 이에 포함된다.<ref>Keck, p. 285</ref> 이 곡들에서는 재즈의 화성과 로코코 시대의 디베르티시망(divertissements)양식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모두 10분을 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작곡된 다른 곡으로는 《흑인 랩소디 (1917)》와 [[오보에, 바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26)가 있다.<ref name="grove" />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작곡된 곡들은 중기 실내악 작품으로 분류한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육중주(1932)는 디베르티멘토 형식의 2악장을 활발한 1악장과 3악장이 둘러싼 구조의 가벼운 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곡가 본인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초연 후에 상당한 교정을 하는데, 1939년과 1940년에 쓰인 곡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ref>Hell, p. 59</ref>{{refn|The [[List of compositions by Francis Poulenc]] gives dates for the major revisions|group= n}} [[바이올린 소나타 (뿔랑)|바이올린 소나타]](1942-43)와 [[첼로 소나타 (뿔랑)|첼로 소나타]](1948) 역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뿔랑은 이 소나타들을 쓰기 전에 두 편의 작품에서 실패를 겪고{{refn|An early violin sonata was performed at a Huyghens concert in 1919 but it was unpublished and is now lost.<ref>Schmidt (1995), p. 29</ref>|group= n}} 1947년에 쓴 현악 사중주 습작을 폐기하는 등{{refn|Hell notes that Poulenc reused some of the themes in his 1947 Sinfonietta.<ref>Hell, p. 73</ref>|group= n}} 현악 작품들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작곡된 곡들은 중기 실내악 작품으로 분류한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육중주(1932)는 디베르티멘토 형식의 2악장을 활발한 1악장과 3악장이 둘러싼 구조의 가벼운 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곡가 본인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초연 후에 상당한 교정을 하는데, 1939년과 1940년에 쓰인 곡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ref>Hell, p. 59</ref>{{refn|The [[List of compositions by Francis Poulenc]] gives dates for the major revisions|group= n}} [[바이올린 소나타 (뿔랑)|바이올린 소나타]](1942-43)와 [[첼로 소나타 (뿔랑)|첼로 소나타]](1948) 역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뿔랑은 이 소나타들을 쓰기 전에 두 편의 작품에서 실패를 겪고{{refn|1919년에 하위헌스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 소나타가 바이올린 소나타가 연주된 기록이 있으나, 출판되지 않았으며 현재 소실되었다.<ref>Schmidt (1995), p. 29</ref>|group= n}} 1947년에 쓴 현악 사중주 습작을 폐기하는 등{{refn| 사중주의 주제는 《신포니에타》에서 사용되었다.<ref>Hell, p. 73</ref>|group= n}} 현악 작품들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Both sonatas are predominantly grave in character; that for violin is dedicated to the memory of [[Federico García Lorca]].<ref name=grove/> Commentators including Hell, Schmidt and Poulenc himself have regarded it, and to some extent the cello sonata, as less effective than those for wind.<ref>Daniel, p. 122; Hell, p. 65; and Schmidt (2001), pp. 282–283 and 455</ref> The ''Aubade'', "Concerto choréographique" for piano and 18 instruments (1930) achieves an almost orchestral effect, despite its modest number of players.{{refn|Hell lists the piece under the separate heading of "Works for Chamber Orchestra" along with the occasional work Two Marches and an Intermezzo (1937).<ref>Hell, p. 104</ref>|group= n}} The other chamber works from this period are arrangements for small ensembles of two works in Poulenc's lightest vein, the ''Suite française'' (1935) and the ''Trois mouvements perpétuels'' (1946).<ref>Schmidt (2001) p. 148</ref>
Both sonatas are predominantly grave in character; that for violin is dedicated to the memory of [[Federico García Lorca]].<ref name=grove/> Commentators including Hell, Schmidt and Poulenc himself have regarded it, and to some extent the cello sonata, as less effective than those for wind.<ref>Daniel, p. 122; Hell, p. 65; and Schmidt (2001), pp. 282–283 and 455</ref> The ''Aubade'', "Concerto choréographique" for piano and 18 instruments (1930) achieves an almost orchestral effect, despite its modest number of players.{{refn|Hell lists the piece under the separate heading of "Works for Chamber Orchestra" along with the occasional work Two Marches and an Intermezzo (1937).<ref>Hell, p. 104</ref>|group= n}} The other chamber works from this period are arrangements for small ensembles of two works in Poulenc's lightest vein, the ''Suite française'' (1935) and the ''Trois mouvements perpétuels'' (1946).<ref>Schmidt (2001) p. 148</ref>
146번째 줄: 146번째 줄:
The final three sonatas are for woodwind and piano: for [[Flute Sonata (Poulenc)|flute]] (1956–57), [[Clarinet Sonata (Poulenc)|clarinet]] (1962), and [[Oboe Sonata (Poulenc)|oboe]] (1962). They have, according to ''Grove'', become fixtures in their repertoires because of "their technical expertise and of their profound beauty". The ''Elégie'' for horn and piano (1957) was composed in memory of the horn player [[Dennis Brain]].<ref name=grove/> It contains one of Poulenc's rare excursions into dodecaphony, with the brief employment of a twelve-note [[tone row]].<ref>Schmidt (2001), p. 419</ref>
The final three sonatas are for woodwind and piano: for [[Flute Sonata (Poulenc)|flute]] (1956–57), [[Clarinet Sonata (Poulenc)|clarinet]] (1962), and [[Oboe Sonata (Poulenc)|oboe]] (1962). They have, according to ''Grove'', become fixtures in their repertoires because of "their technical expertise and of their profound beauty". The ''Elégie'' for horn and piano (1957) was composed in memory of the horn player [[Dennis Brain]].<ref name=grove/> It contains one of Poulenc's rare excursions into dodecaphony, with the brief employment of a twelve-note [[tone row]].<ref>Schmidt (2001), p. 419</ref>
[[파일:Guillaume Apollinaire, 1902, Cologne.jpg|섬네일|[[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뿔랑이 자주 사용했다.]]
[[파일:Guillaume Apollinaire, 1902, Cologne.jpg|섬네일|[[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뿔랑이 자주 사용했다.]]



===가곡===
===가곡===

2020년 3월 30일 (월) 20:49 판

프랑시스 장 마르셀 뿔랑
Francis Jean Marcel Poulenc
파일:Poulenc-1922.jpg
기본 정보
출생1899년 1월 17일(1899-01-17)
프랑스 파리 8구
사망1963년 1월 30일(1963-01-30)(64세)
프랑스 파리
국적프랑스
직업작곡가, 피아니스트
장르고전음악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프랑시스 장 마르셀 뿔랑 또는 풀랑크(프랑스어: [fʁɑ̃sis ʒɑ̃ maʁsɛl pulɛ̃k], Francis Jean Marcel Poulenc, 1899년 1월 7일~1963년 1월 30일)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프랑스 가곡인 멜로디, 피아노 독주곡, 실내악, 합창곡, 오페라, 발레, 관현악곡을 비롯해 수많은 곡들을 남겼다. 《세 개의 무궁동 (1919)》이나 연가곡 《동물시집 (1919)》, 발레 《암사슴 (1923)》, 피아노와 18악기의 《오바드 (1929)》는 신선한 감각과 간결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뿔랑 초기 대표작이다. 이후 1930년대부터 많은 가곡을 작곡하여 《가면무도회 (1932)》, 《미사곡 (1937)》, 《인간의 얼굴 (1943)》, 《스타바트 마테르 (1950)》 등 좋은 작품들을 낳았다. 제2차 대전아폴리네르에 의한 《티레시아스의 유방(乳房) (1944)》, 베르나노스에 의한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1957)》, 콕토에 의한 《인간의 목소리 (1958)》 총 3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드뷔시 이후 프랑스에 우수한 오페라 작품이 나타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6인조의 일원으로 파리 출신이며 어릴 적부터 모차르트드뷔시를 열렬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초기 작품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스트라빈스키사티의 영향도 엿보인다.

뿔랑은 부유한 공장주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가업을 이을 것으로 여겨져 음대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음악을 독학하다가,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네스의 가르침을 받는데 그는 뿔랑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그의 멘토가 되어준다. 뿔랑은 또한 에릭 사티와도 일면식이 있어 그의 후견 하에 젊은 프랑스 작곡가의 모임인 6인조(프랑스어: Les Six)의 하나가 된다. 뿔랑의 초기작품들은 활발함과 그 특유의 불손함이 특징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좀 더 진중한 부분이 계발되는데, 1936년을 시작으로 종교음악들이 가벼운 음악들을 대체해나가는 모습에서 이러한 음악적 전환을 엿볼 수 있다.

뿔랑은 작곡과 더불어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는데, 특히 성악곡 조언자였던 바리톤 피에르 베르낙과 소프라노 드니즈 뒤발과 구미를 돌며 유명세를 얻었다. 이 때를 비롯해 1928년 이후로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축음기의 중요성을 깨달은 1세대 작곡가들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말년부터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해학적이고 가벼운 음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다 21세기에 들어서 《카르멜회 수녀의 대화 (1957)》나 《인간의 얼굴 (1943)》 등 좀 더 무거운 음악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성악곡들과 합창곡들이 많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생애

초기

뿔랑은 파리 8구에서 에밀 뿔랑(Émile Poulenc)과 제니 뿔랑(Jenny Poulenc)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인 에밀 뿔랑은 아베롱주의 도시인 에스빨리옹(Espalion)의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후에 Poulenc Frères라는 화학 회사의 공동 소유주가 되는데, 이 회사는 현재까지도 Rhône-Poulenc라는 제약회사로 유지되고 있다. 어머니인 제니 뿔랑은 예술에 폭 넓은 관심을 가진 파리지앵으로, 뿔랑은 후에 자신의 독실한 신앙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세속적이고 예술적인 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회고한다[2]. 평론가인 클로드 로스탱(Claude Rostand)은 뿔랑을 일컬어 "반은 수도승, 반은 개구쟁이"라고 평가하였다.[n 1]

19th century buildings in Parisian style
뿔랑이 태어난 곳인 플라스 드 소세(Place des Saussaies)

뿔랑은 음악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덜 알려진 곡들이나 고전주의 곡들을 연습했는데, 이런 환경이 그가 살아가는 동안 "사랑스럽지만 나쁜 음악"의 취향을 갖는데 기여하였다고 한다.[11][n 2] 뿔랑은 다섯살 때 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여덟살에 드뷔시의 음악을 듣고 독창적인 음색에 매혹되었다. 또한 슈베르트겨울 나그네스트라빈스키봄의 제전으로부터 특히 깊은 영향을 받았다.[13] 그는 후에 음악원에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파리 9구에 있는 리세 콩도르세(Lycée Condorcet)에서 수학하였다.[14]

1916년에는 친구인 레몽 리노세(Raymonde Linossier, 1897-1930)으로부터 작가인 아드리엔 모니에(Adrienne Monnier)의 서점 Maison des Amis des Livres (책 친구들의 집)을[15] 소개받아 여기서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의 아방가르드 시인들을 만나는데, 뿔랑은 후에 이들의 시를 위한 음악을 작곡한다.[16] 또한 같은 해에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네스의 제자가 되는데, 뿔랑은 후에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middle aged man with huge moustache
뿔랑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네스의 1914년도 사진

아주 유쾌한 사람으로, 거대한 콧수염을 가진 괴짜 귀족(hidalgo)이었다. 가장자리가 평평한 솜브레로를 쓰고 단추가 달린 부츠를 신고 다녔는데, 내가 페달을 충분히 누르지 않았을 때면 부츠로 정강이를 툭툭 치곤 했다.[17] ... 나는 그를 미친듯이 좋아했었는데, 1914년에는 그만큼 드뷔시와 라벨을 잘 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네스와의 만남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것을 빚졌다. ... 풋내기 시절의 노력과 피아노에 대한 모든 지식이 다 그로부터 나왔다.[18]

뿔랑이 16살이 됐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의 아버지마저 2년 후에 돌아가신다. 뿔랑은 비네스를 단순히 스승이 아닌, 정신적인 멘토로[2] 깊이 의지하게 된다. 비네스는 뿔랑이 작곡을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그의 초기 피아노 곡 세곡을 초연해준다.[n 3] 비네스를 통해 뿔랑은 그의 음악적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두 사람, 조르주 오리크와 에릭 사티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20]

후에 뿔랑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길잡이가 되는 오리크는 뿔랑과 동갑으로, 이미 파리의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를 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열정과 음악관에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뿔랑은 오리크를 "나의 영혼의 참된 형제"라고 부를 정도였다.[21][19] 사티는 주류 프랑스 음악 단체로부터 고립될 정도로 괴짜기질이 심했는데, 오리크 루이 뒤레, 아르튀르 오네게르 등 젊은 신예 작곡가들의 멘토가 되어주었다. 그는 처음에 뿔랑을 단지 부르주아 아마추어 정도로 평가하여 무시했었는데,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후에 그의 멘티인 "새로운 젊은이Les Nouveaux Jeunes"로 받아들인다.[22] 뿔랑은 후에 그로부터 "정신적, 음악적 차원에서 밀접하고 넓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23] 실제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는 뿔랑의 곡 《세 개의 무궁동》에 대해 "현 지식인 계층의 민감한 잣대로 개조된 사티의 풍자적 관점"이라는 평을 남겼다.[21]

첫 번째 작곡과 프랑스 6인조

뿔랑은 1917년에 5악장 실내악 《흑인 랩소디Rapsodie nègre》를 작곡하여 사티에게 헌정하고, 제인 바토리가 기획한 신음악을 위한 콘서트에서 초연을 가진다.[n 4] 당시 파리에서는 아프리카 예술이 유행했었는데, 특히 뿔랑은 파리 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라이베리아 시가들을 아주 재미있어했다. 《흑인 랩소디》의 두 악장에 걸쳐 이러한 시가들 중 한 편이 가사로 사용된 것은 이를 반영한다. 영미의 비평가들이 여기서 사용된 경구에 대해 묘사하면서 "레그-뿔랑leg-Poulenc"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다.[26][n 5] 모리스 라벨 역시 이 곡을 재미있어 했으며 뿔랑이 새로운 민속을 개발했다고 평가하였다.[28]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역시 감명받아 뿔랑이 출판업자들과 계약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는데, 뿔랑은 이 은혜를 죽을때까지 잊지 못한다.[29]

1917년에 뿔랑은 라벨과 자신의 음악에 대해 깊은 논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그리 대단하지 않은 작곡가들을 라벨이 굉장히 높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당혹스러워한다.[30][n 6] 뿔랑은 이 만남에 대해 사티에게 편지하는데, 사티는 라벨이 "쓰레기 더미"라고 이야기한다.[30][n 7] 그러나 뿔랑은 라벨에게 한 명의 남자로서 존경심을 가졌으며, 라벨이 자신의 음악에 가졌던 겸손한 태도를 따라가는 삶을 산다.[33][n 8]

제1차 세계 대전 말인 1918년 1월부터 전쟁 직후인 1921년 1월까지 뿔랑은 프랑스 육군으로 징집된다. 1918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프랑스-독일 전선에서 복무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여러가지 보조작업을 하다가 항공부의 타자원으로 제대한다.[35] 그는 징집된 동안 여러 곡을 썼는데, 특히 생 마르땡 쉴레쁘(프랑스어: Saint-Martin-sur-le-Pré)의 초등학교에서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무궁동Trois mouvements perpétuels》과 피아노 이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으며 아폴리네르의 시를 바탕으로 연가곡 《동물시집Le bestiaire》 역시 작곡하였다. 비록 소나타는 대중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지만, 《동물시집》은 프랑스 내에서 뿔랑의 이름이 알려지는데 공헌을 했고, 《세 개의 무궁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35] 뿔랑은 전시에서 급박하게 작곡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악기는 가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로도 특이한 구성의 연주자를 위한 곡들을 몇 곡 작곡한다.[36]

이 시기의 뿔랑은 자신이 전문적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한다.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인 제레미 샘즈는 뿔랑의 음악이 기술적으로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풍부함으로부터 "신선하고 태평한" 음악으로 대중이 돌아선 덕분에 운 좋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37] 1917에서 1920년까지 몽파르나스살레 하위헌스에서 첼리스트 펠릭스 들그롱쥬(Félix Delgrange)가 젊은 작곡가들의 콘서트를 여러번 개최하는데, 여기서 뿔랑의 초기작들 중 네 곡이 초연된다. 오리크, 뒤레,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 제르맹 타유페르 역시 여기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후에 뿔랑과 더불어 프랑스 6인조를 결성한다.[38] 콘서트 하나가 끝난 후 앙리 콜레가 쓴 "다섯 명의 러시아인, 여섯 명의 프랑스인과 사티"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해 미요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콜레는 완전히 제멋대로 오리크, 뒤레, 오네게르, 뿔랑, 타유페르, 그리고 나를 육인조로 선정했다. 이는 순전히 우리들이 서로 친하게 알고지냈으며 같은 프로그램에서 등장했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성격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오리크와 뿔랑은 콕토의 사상을 따르며, 오네게르는 독일 낭만주의 곡들을 쓰는데 비해 내 취향은 지중해의 서정적인 예술이다 ... 콜레의 기사는 육인조 그룹이 탄생한 듯한 인상을 남겼다.[39][n 9]

콕토는 6인조와 비슷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40] "역설적이고 비문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문체는 낭만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간결하고 또한 불손했다.[42] 뿔랑은 이런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아 1919년에 처음으로 콕토의 글을 음악으로 만들었고, 1961년에 마지막으로 만든다.[43] 6인조는 각자 한 부분을 만드는 식으로 공동작업을 했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져 1920년에 발표된 피아노 조곡 《육인의 앨범L'Album des Six》은 6개의 독립적인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44] 1921년에 발표된 발레 《에펠탑 위의 결혼식Les mariés de la tour Eiffel》는 미요가 세 곡을, 오리크, 뿔랑, 타유페르가 각자 두 곡씩을, 오네게르가 한 곡을 작곡했다. 이미 6인조와 거리를 둔 뒤레는 이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다.[45]

전문적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자각은 1920년대 초반까지 남아있었다. 사티 역시 음악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운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라벨은 뿔랑에게 작곡 교육을 받을 것을 제안했고, 미요는 샤를 케클랭을 추천한다.[46][n 10] 뿔랑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그에게 간헐적으로 음악교육을 받는다.[48]

1920년대, 인기를 얻어가다

1920년대 초부터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 뿔랑은 국제적으로, 특히 영국에서 인정을 받았다. 어니스트 뉴먼은 1921년 《맨체스터 가디언》의 기사에서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젊은 사내인 프랑시스 뿔랑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소극 장르를 우선적으로 파보는것이 좋겠다"고 평했다. 특히 뉴먼은 코넷, 트롬본, 바이올린, 타악기의 특이한 구성을 가진 뿔랑의 가곡 《코카르데Cocardes》처럼 달콤하게 우스꽝스러운 음악은 거의 들어본 적 없다고 평가했다.[49] 1922년 뿔랑과 미요는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나기 위해 빈으로 갔다. 이들이 오스트리아의 혁명적인 12음주의에 감화되었다기 보다도, 새로운 사조의 제안자들에게 동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50] 이듬해 뿔랑은 세르게이 댜길레프로부터 발레 한편의 악보를 온전히 받는다. 뿔랑은 18세기 프랑스의 페트 갈랑트를 모던풍으로 재현하여 이 발레의 주제곡으로 삼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탄생한 《암사슴Les biches》은 1924년 1월 몬테 카를로에서 초연을 가지는데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5월에는 앙드레 메사제의 감독 하에 파리에서 공연을 가진다. 이 곡은 지금까지고 뿔랑의 가장 잘 알려진 곡들 중 하나다.[51] 유명인이 된 뿔랑은 사티가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음악학자 루이 라루아와도 교류를 가지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사티와 뿔랑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52] 오리크 역시 댜길레프의 발레 《귀찮은 것들Les Fâcheux》로 유명세를 얻었는데, 마찬가지로 라루아의 친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티와 절연하게 된다.[52]

Head and shoulders portrait of smiling middle-aged woman
뿔랑의 친구이자 동료, 완다 란도프스카 (1923년)

뿔랑은 10년동안 또다른 발레곡 《오바드》를 비롯해 가곡과 실내악에 이르기까지 여러 곡을 작곡했다. 앙리 헬은 케클랭이 뿔랑이 타고난 단순한스타일을 억제했으면, 오리크는 뿔랑이 가진 색채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말한다. 1926년에 열린 이 두 명의 음악회에서 바리톤 피에르 베르낙이 뿔랑의 가곡을 부르는데, 베르낙은 "곧 뿔랑의 이름과 분리될 수 없는" 사람이 된다.[53] 뿔랑이 가깝게 지낸 또 다른 사람으로는 하프시코드 연주자 완다 란도프스카가 있다. 란도프스카는 하프시코드가 사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현대음악인 마누엘 데 파야의 《페드로의 인형극El retablo de maese Pedro (1923)》의 독주자였는데, 뿔랑은 그 음색에 사로잡힌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뿔랑은 《전원 협주곡Concert champêtre》을 작곡해 1929년 피에르 몽퇴 지휘의 파리 교향악단(프랑스어: Orchestre Symphonique de Paris)과 함께 초연한다.[54]

1920년대 후반의 뿔랑은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막대한 부를 물려받아 독립해 유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55]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140마일(230km)에 떨어져있는 앵드르에루아르주의 시골인 누아제의 그랑 콕토(Le Grand Cocteau(프랑스어판))라는 저택을 구입해서 편안한 환경에서 곡을 쓰고 싶을때면 가서 쉬었다.[55] 그러나 그를 괴롭히던 문제가 있었는데, 동성애적 성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화가 리샤르 샹레르를 만나며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그에게 보낸 《전원 협주곡》의 악보에 써 넣은 "당신은 나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당신은 내 30년 인생의 태양이며, 내가 살아가며 일하는 이유입니다."라는 구절에서 잘 볼 수 있다.[56] 그러나 이러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뿔랑은 친구인 레몽 리노셰(Raymonde Linossier)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동성애적 성향에 대해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뿔랑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혼을 거절하고, 결국 둘의 사이는 어색해지게 된다.[57][58] 뿔랑은 이에 우울해지는데, 1930년 1월 리노셰가 32세의 나이로 급사하면서 엄청난 비탄에 빠진다. 뿔랑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내 삶의 모든 부분이 그녀의 것이었으니, 내 젊음은 그녀와 함께 떠났다. ... 난 지금 이십년을 늙었다"[57]라는 글을 남긴다. 샹레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에 대한 감정은 점점 희미해져 1931년에는 거의 사라진다. 그럼에도 그 둘은 평생동안 좋은 친구로 지낸다.[59]

1930년대, 진지해지다

1930년대 초, 뿔랑은 2년간 멈췄었던 가곡 작곡을 재개한다. 리노셰를 추억하며 말레르브의 시로 가곡 《묘비명Epitaphe》을 짓는데, 피아니스트 그레이엄 존슨은 이 곡을 "어떻게 봐도 심원한 곡"이라 평가한다.[60][n 11] 이듬해에는 아폴리네르와 맥스 제이콥의 글로 세 개의 가곡집을 작곡한다. 이 곡들중 일부에서 진지한 분위기가 나타나지만, 나머지는 그의 다른 1930년 초 곡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웠던 과거 작풍을 떠올리게 한다.[62] 1932년에는 레지널드 켈길버트 빈터BBC에서 그의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여 최초로 방송을 탄 음악 중 하나가 된다.[63] 이때쯤 뿔랑은 운전기사인 레몽 데투슈(Raymond Destouches)를 알게되어 샹레르와 비슷한 관계를 가지며 데투슈가 1950년대에 결혼하며 서로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낸다.[64]

1936년에는 신앙과 진지함을 일깨워준 두 사건이 일어난다. 친구 작곡가인 피에르 옥타브 페루가 차 사고로 목숨을 잃자 그는 매우 낙심하며, 얼마 후 휴일에 로카마두르 성지를 방문한다. 뿔랑은 이 방문에 대해 후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View of small cliff-top village
뿔랑이 종교적 작품을 작곡하는 계기가 된 장소 로크마두르

며칠 전 내 동료의 비극적인 죽음을 전해들었다 ... 인간의 나약한 육신에 대해 숙고하며 영적인 삶으로 빠져들었다. 로카마두르는 내 유년기의 신앙이 회복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 성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 모든 부분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 로카마두르를 방문한 날 저녁, 여성 가수와 오르간을 위한 《검은 성모의 연도(連禱)Litanies à la Vierge noire》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이 작품에서 나는 나를 높은 성당으로 힘차게 밀어넣은 "농부의 신앙"의 기운을 전달하고자 하였다.[65]

이어 작곡된 곡들은 이 진중함의 연장선이며 폴 엘뤼아르의 초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시들에 붙인 곡들 역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1937년에는 소프라노와 혼성 합창단의 아카펠라를 위한 사장조 미사를 작곡한다. 이 곡은 처음으로 작곡한 대형 종교음악이자, 그의 모든 종교음악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66] 그러나 이본 프랭탕을 스타로 만들어준 연극 《여왕 마고La Reine Margot》에 16세기 춤곡 풍의 음악을 붙여 《프랑스 모음곡Suite française》을 작곡하는 등 모든 곡이 진지했던 것만은 아니다.[67] 진중한 면모는 1950년대에나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고, 그 이전의 비평은 모두 뿔랑을 가벼운 느낌의 곡을 쓰는 사람으로 간주한다.[68]

1936년 뿔랑은 베르낙과의 연주회를 자주 가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엘뤼아르의 다섯 시Cinq poèmes de Paul Éluard》의 초연을 시작으로 1959년 베르낙이 은퇴하기까지 20년 넘게 전 세계를 누비며 함께 연주한다. 뿔랑은 그를 위해 90개가 넘는 곡을 썼으며,[69] 작곡가로서 그와의 만남을 에두아르와 란도프스카와 더불어 "세가지 중요한 만남"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70][n 12] 뿔랑은 그에게 가곡 뿐 아니라 오페라나 합창곡을 쓸 때도 조언을 받았는데, "25년동안 베르낙은 뿔랑의 상담가이자 양심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72]

1930년대에는 영국에서도 유명세를 얻는다. 런던의 BBC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 그가 쓴 여러 곡들이 방영되었으며,[73] 1938년에는 베르낙과 함께 영국에서의 첫 번째 연주여행을 가진다.[74] 미국에서도 유명세를 얻어 "프랑스의 재치, 우아함, 기개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는다.[75] 뿔랑은 1930년대 말에도 진중한 곡과 가벼운 분위기의 곡을 모두 작곡한다. 《네 개의 고해 모테트Quatre motets pour un temps de pénitence (1938-39)》와 죽음에 대한 슬픈 명상곡인 《수레국화Bleuet (1939)》은 이 시기에 작곡된 대표적인 진중한 곡이고, 연가곡집 《유희의 약혼식Fiançailles pour rire》은 《암사슴》의 가벼운 분위기를 물려받고 있다.[76]

1940년대, 전쟁을 겪으며

제2차 세계 대전동안 뿔랑은 1940년 6월 2일 소집되어 보르도의 방공부대에서 복무하였다.[77] 프랑스의 항복 이후 1940년 7월 18일에 소집 해제되어 그 해 여름은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중심지인 브리브라가야르드에서 보낸다.[78] 전쟁 초기에 그는 새로운 곡을 쓰기보다도 《암사슴》의 관현악부를 다듬거나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육중주》를 재작업한다. 브리브라가야르드에서는 세 곡의 작업을 시작하고, 누아제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10월달에 네 번재 곡의 작업을 시작한다. 피아노와 내레이터를 위한 《아기 코끼리 바바 이야기L'Histoire de Babar, le petit éléphant》, 《첼로 소나타》, 발레 《전형적 동물들Les Animaux modèles》, 연가곡 《평범한 것들Banalités》이 이 때 작곡되었다.[76]

Exterior of grandiose 19th-century theatre
1942년 《전형적 동물들》이 초연된 파리 오페라(오페라 가르니에)

뿔랑은 전쟁중 대부분을 베르낙과 파리에서 가곡 연주회를 열며 지냈다.[n 13]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나치 치하에서 매우 위험한 위치에 놓여있었는데, 실제로 데투슈는 가까스로 체포와 추방을 모면한다. 그럼에도 뿔랑은 음악에 독일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는다.[79] 레지스탕스 사이에서 유행하던 폴 엘뤼아르루이 아라공의 시구에 노래를 붙였으며, 이 외에도 1942년에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한 《전형적 동물들》에서 독일 체제에 반대하는 음악 《알자스로렌은 네 것이 아니다Vous n'aurez pas l'Alsace et la Lorraine》의 선율을 반복해서 사용하였다.[81][82][n 14] 또한 그는 나치가 금지한 음악가인 미요와 파울 힌데미트와 내통중이라는 의심을 받던 국민전선의 설립 멤버이기도 했다.[83] 1943년에는 벨기에를 위해 엘뤼아르의 여덟 시에 기반하여 무반주 이중합창을 위한 칸타타인간의 얼굴Figure humaine》을 작곡한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은 "자유Liberté"인데,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대조적이다. 이 곡은 1945년 3월 런던의 BBC 스튜디오에서 초연되나[84] 파리에서는 1947년까지 연주되지 않는다.[85] 타임스지의 비평가는 이 곡이 "우리 시대의 가장 우수한 합창곡들 중 하나로, 이 곡 하나만으로도 그가 이류 작곡가라는 평이 그를 격하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글을 남긴다.[86]

1945년 1월, 프랑스 정부의 명을 받고 파리를 떠난 뿔랑과 베르낙은 런던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응접을 받았으며,[87] 로열 앨버트 홀에서 벤저민 브리튼과 뿔랑 본인의 피아노 연주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한다.[88] 또한 위그모어 홀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베르낙과 함께 멜로디와 피아노곡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BBC가 연주를 녹음하였다.[89] 베르낙은 대중의 반응을 버거워했는데, 뿔랑과 함께 위그모어 홀의 무대로 나갈 때 "관중들이 일어나자 나는 노래를 시작할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90] 2주간의 런던 순회공연을 마친 후, 1940년 5월에 첫 차와 첫 배를 타고 파리로 돌아간다.[91]

파리에서 《아기 코끼리 바바 이야기》와 《티레시아스의 유방Les mamelles de Tirésias》의 작업을 마치는데, 아폴리네르의 동명의 연극을 기반으로 하는 《티레시아스의 유방》은 뿔랑의 첫 오페라로 한 시간 길이의 오페라 부파 형식이다.[92] 이 오페라는 "활기찬 뒤죽박죽"속에 "전쟁으로 파괴된 프랑스를 다시 일으키고 번성케 해야 한다는" 깊은 슬픔의 주제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92] 1947년 6월에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어 호평을 받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n 15] 소프라노 드니즈 뒤발이 주연을 맡았는데, 후에 베르낙이 그랬듯 뿔랑과 함께 많은 연주회를 다녔으며 곡을 헌정받기도 한다.[94] 뿔랑은 그녀를 "나를 울게하는 나이팅게일Mon rossignol à larmes"라는 애칭으로 불렀다.[95]

Image of bald late middle-aged man
피에르 베르낙 (1960년)

전쟁 직후 프레드릭 레베데프(Fréderique Lebedeff)라는 여성과 염문이 난다. 1946년 둘 사이에 마리 앙주(Marie-Ange)라는 이름의 딸이 생기는데, 뿔랑은 대부를 자처하며 레베데프와 딸에 대한 지원을 계속 이어갔다.[71]

이 시기의 뿔랑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들을 부정하고 오직 신빈악파의 음악만 고집하는 신세대 작곡가들과 논쟁을 벌인다. 뿔랑은 스트라빈스키를 변호하며 불신을 담아 "1945년에 우리는 12음 기법만이 현대음악을 구원할 미학이라는 양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68] 그는 쇤베르크의 음악은 "불모지, 돌멩이 죽, 유사 음악, 시적인 마약"이며 베르크가 음렬주의를 제대로 이끌고 있다고 평하는데, 이는 피에르 불레즈 등의 작곡가를 그로부터 등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n 16] 이들은 뿔랑을 전쟁 이전의 하찮고 반동적인 골동품이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뿔랑은 진중한 음악에 더욱 집중하여 프랑스 대중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의 교회에서는 뿔랑의 종교곡이 자주 연주되었지만, 프랑스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해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종종 경시받게 된다.[68][97][n 17]

뿔랑은 1948년 미국에 처음으로 방문해 베르낙과 대략 2개월간의 연주 여행을 다닌다.[97] 1961년 전까지 베르낙이나 뒤발과 함께 미국을 자주 방문하여 1949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피아노 협주곡을 초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가진다.[2]

1950–63,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와 말년

1950년대 초부터 뿔랑은 외판원인 루시앙 로베르(Lucien Roubert)와 은밀한 관계를 가진다.[98] 이 시기에 엘뤼아르의 시에 기반한 일곱개의 연가곡 《냉기와 불La Fraîcheur et le feu》, 화가 크리스티앙 베라르를 기리기 위한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를 작곡한다.[99]

Church stained-glass window depicting the martyrdom of a line of nuns
콩피에뉴의 순교자

1953년에는 밀란의 출판사 카사 리코르디라 스칼라 극장으로부터 발레의 작곡을 부탁받는다. 뿔랑은 종교적 주제로 오페라를 쓰고 싶어했는데, 코르토나의 성 마르가리타의 이야기를 두고 고민하다가 무용을 삽입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해 포기한다. 리코르디는 프랑스 혁명중에 단두대에서 순교한 콩피에뉴의 순교자를 배경으로 한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의 단편을 기초로 작성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각본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를 제안한다. 뿔랑은 "이처럼 감동적이고 고결한 작품"에[34] 상당히 만족스러워 했고, 그해 8월 작곡을 시작한다.[100]

이 오페라를 작곡하는 동안 뿔랑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하나는 베르나노스와 에멧 레버리(Emmet Lavery) 사이의 분쟁이다. 이 둘은 게르트루트의 저작을 극으로 개조할 권리를 두고 다투었으며, 결국 뿔랑은 오페라의 작곡을 중단한다.[101] 다른 하나는 뿔랑의 내연남 로베르가 중병에 걸린 것이다.[n 18] 뿔랑은 심한 근심으로 많이 힘들어했으며, 결국 1954년 11월 진정제를 처방받고 파리 근교에 있는 라이레로즈에서 요양한다.[103] 이 문제들은 곧 해결되었고, 뿔랑은 베르낙과 영국에 연주여행을 떠나 거기서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를 작곡한다. 1920년 후 계속된 재산 감소로 인해 연주여행을 많이 다니던 때였다.[104]

이 시기에 오페라를 포함해 두 개의 멜로디, 관현악 소품 《목가적Bucolique》 역시 작곡된다. 《목가적》은 오리크와 미요와 함께 발표한 《마르그리트 롱의 이름에 대한 변주곡Variations sur le nom de Marguerite Long (1954)》의 일부이다.[105] 뿔랑이 오페라의 마지막 장을 완성한 1955년 10월, 로베르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 때 뿔랑이 쓴 편지에서 "루시안은 10일 전에 고통에서 벗어낫다네. 내가 카르멜회 수녀들의 마지막 장을 끝내던 바로 그 때 마지막 숨을 내쉰거지"라고 언급한다.[68]

초연은 1957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이태리어로 이루어진다.[92] 이로부터 프랑스어 초연 사이에 《플루트 소나타》가 작곡되는데, 지금까지도 뿔랑의 대표곡 중 하나로 여겨진다. 소나타의 초연은 6월 스트라스부르 페스티벌에서 장 피에르 람팔의 연주로 이루어진다.[106] 이로부터 3일 뒤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의 프랑스어 초연이 이루어진다. 이 연주회는 굉장히 큰 성공을 거두어서, 뿔랑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107] 이 때 즈음 뿔랑은 육군 출신의 루이 고티에(Louis Gautier)와 연애하기 시작하여 삶이 끝날 때 까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한다.[108]

난 훌~~륭한[n 19] 음악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힌건 아니지만, 대중에게 있어서 내가 단지 2류 작가일 뿐이라는 데에는 화가난다. ... "스타바트 마테르"에서 "인간의 목소리"까지 난 이러한 생각이 그다지 재미있는건 아니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뿔랑의 1959년 편지[109]

1958년 뿔랑은 오랜 친구인 장 콕토와 함께 그의 모노드라마인간의 목소리La Voix humaine》를 오페라로 만든다.[n 20] 이 작품은 1959년 2월 오페라 코미크에서 콕토의 지도 아래에서 초연을 가진다. 이 때 뒤발은 전화로 그의 전 애인에게 이야기하는 비극적인 여인의 역할을 맡는다.[110] 1959년 1월 뿔랑은 60세가 되었는데, 조금 늦춰 5월 베르낙의 은퇴 공연이 열릴 때 회갑잔치를 한다.[107]

1960년에서 61년 사이엔 미국을 방문한다. 이 시기에 뒤발과 함께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인간의 목소리》 미국 초연을 가지고,[110] 샤를 뮌슈의 지휘 아래에서 소프라노와 사성부 합창을 위한 《글로리아Gloria》의 세계 초연을 가진다.[111] 1961년에는 에마뉘엘 샤브리에에 대한 187페이지짜리 연구서적을 내놓는데, 한 평론가는 이 책에 대해 "그는 사랑과 통찰 - 유머의 본질적인 진중함과 선율의 우월성 - 을 담아 글을 썼다"고 평했다.[112] 뿔랑은 마지막 12개월동안 《테네브레의 7개 응창Sept répons des ténèbres》과 《클라리넷 소나타》, 《오보에 소나타》 를 작곡한다.[2]

1963년 1월 30일, 뤽상부르 공원 맞은편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생 쉴피스 교회에서 장례가 치뤄진다. 그의 바람에 따라 자신의 음악은 연주되지 않았고, 마르셀 뒤프레바흐의 오르간 곡을 연주한다.[66] 뿔랑은 페르 라셰즈 묘지의 가족들 곁에 묻힌다.[107][113]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뿔랑의 묘지

음악

뿔랑은 온음계를 기본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뿔랑이 타고난 선율 창작의 재능과 결부지을 수 있다.[114] 음악학자 로저 니콜스(Roger Nichols)는 "[뿔랑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선율인데, 아직 탐구되지 않은 가락의 영역에서 막대한 보물창고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역은 최신 음악계의 계속 탐구와 작업 끝에 소진되었다"[2]고 평가한다. 논설가 조지 켁(George Keck)은 "단순하고 편안하며, 쉽게 기억되는데, 무엇보다도 감정표현이 풍부하다"고 말한다.[115]

뿔랑은 자신이 화성에 있어 그렇게 독창적이진 않았다고 말한다. 작곡가 레녹스 버클리는 "그는 살면서 기꺼이 전통적인 화성을 사용했지만, 그 사용방식은 매우 독특한 것이어서 신선하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의 음악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한다.[116] 조지 켁은 뿔랑이 사용한 화성의 언어를 두고 "그 선율만큼이나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특징적이다 ... 분명히 정의된 조성 속에서 반음계를 넘나들며 깔끔하고 단순한 화성 진행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115] 뿔랑은 음악 이론을 공부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는데, 실제로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그를 "이론과 원칙, 법칙에 따른 작곡에 대한 휴전"으로 소개했다.[117] 그는 당시 12음주의를 추종하며 교조적 태도를 취하던 르네 라이보비츠를 무시했으며,[118]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올리비에 메시앙이 이론적인 작곡방식을 채택한 것에 대해 상당히 서운해 했다.[n 21] 뿔랑의 음악은 "사람 목소리의 선율적 관계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121] 또한 그는 굉장한 노력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굉장히 쉽게 쓴다는 전설(프랑스어: a légende de facilité)이 생겨났는데, 뿔랑은 이에 대해 "나는 최대한 내 노력을 숨겨왔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122]

1999년 피아니스트 파스칼 로제는 뿔랑의 양면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면서 "그를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중함이나 가벼움 중 하나를 무시한다면 그를 파괴하는 것이요, 흐릿한 복사물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123] 뿔랑은 이러한 견해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작품을 통해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슬라브적인 것 처럼, 건강하고 명료하며 억센 프랑스적 음악을 숨김없이" 보여주기를 바랬다고 한다.[124][n 22]

관현악과 협주곡

뿔랑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들 중 하나인 에마뉘엘 샤브리에의 사진.

뿔랑의 대표적인 대편성 관현악곡으로는 두 편의 발레와 《신포니에타Sinfonietta》, 그리고 건반을 위한 협주곡 네 편이 있다. 두 발레중 하나인 《암사슴》은 1924년 작곡되어 '밝고 선율적인 악보에는 깊이도, 얕음도 없으며, "바그너식의 금관, 감정적인 단9도를 통해 강조되는" 상징이나 사실도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2] 건반을 위한 협주곡 네 편 중 첫 두곡은 뿔랑의 가벼운 작풍을 여실히 보여준다. 1927년에서 1928년 사이에 작곡된 《전원 협주곡Concert champêtre》은 지방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특히 마지막 악장의 팡파르는 파리 교회의 뱅센에 있는 병영의 나팔소리를 묘사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2]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1932)》 역시 앞의 곡과 유사하게 가벼운 분위기의 곡이다. 이 곡의 1악장은 발리가믈란과 유사하게 끝나며, 2악장은 모차르트의 형식으로 시작하는 등, 이 곡에서는 다양한 음악적 형식을 들을 수 있다.[125]오르간 협주곡 (1938)》은 이 두 곡과 비교할 때 더 진지한 양상을 띈다. 뿔랑은 이 곡에 대해 그가 쓴 종교 음악들 중 가장 바깥쪽에 있다고 고백하는데, 실제로 바흐의 전통적인 교회 음악과 쾌활한 대중음악의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다. 그가 두 번째로 작곡한 발레인 《전형적 동물들 (1941)》은 《암사슴》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오리크와 오네게르로부터 화성이 풍부하고 관현악법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126] 특히 오네게르는 "그와 함께 해온 샤브리에, 사티,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이 완전히 동화되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할 것이다. 아, 이게 뿔랑이구나."[127]신포니에타 (1947)》에서는 전쟁 이전의 음악에서 나타났던 가벼움이 완전히 뒤집한다. 그는 "내 나이보다 너무 어린 옷을 입었었다 ... 암사슴의 새로운 버전이긴 하지만, 마흔 여덟살 먹은 젊은 소녀(암사슴을 의미한다)가 나온다고 생각해보라. 끔직하지 않은가!"라는 글을 남긴다.[68]피아노 협주곡 (1949)》은 처음에는 그의 전쟁 이전 음악보다 발전한 점이 없다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뿔랑 본인도 이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최근들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여 1996년에는 한 저술가로부터 뿔랑의 콘체르탄테중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128]

피아노곡

프랑시스 뿔랑과 완다 란도프스카

뿔랑은 피아니스트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피아노를 위한 곡도 많이 작곡했다. 뿔랑의 피아노곡은 타악기적 특성을 가진 곡과, 좀 더 부드러운 하프시코드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곡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뿔랑 본인은 가곡의 반주로 피아노가 사용될 때 가장 뛰어난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2][129] 뿔랑의 피아노곡 대부분은 "'미니어처'라고 불릴만 하다"는 평가도 있으며,[130] 뿔랑 본인은 1950년대에 과거의 피아노 작품들에 대해 "세 개의 무궁동, 예전에 쓴 다장조 모음곡, 그리고 세 작품들Trois pieces은 견딜만 하다. 즉흥곡 두 묶음과 내림가단조 인터메조, 그리고 녹턴 몇 곡은 아주 좋다. 그러나 나폴리Napoli나젤의 밤은 기꺼이 비난하겠다"고 말한다.[131]

위에서 뿔랑이 아주 좋다고 명시한 곡들 중 15개의 즉흥곡은 1932년에서 1959년 사이에 쓰여졌다.[n 23] 모두 짧으며 가장 긴 것도 3분을 넘지 않는다. 조급한 발레풍의 곡에서 부드럽고 서정적인 곡까지, 오래된 행진곡풍과 페르페투움 모빌레, 왈츠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마음아픈 음악적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가진다.[132] 즉흥곡 다음에 언급된 내림가단조 인터메조는 세 개의 인터메조 중 마지막 곡을 말한다. 첫번째와 두번째 곡은 1934년 8월에 쓰여졌고, 마지막 내림가단조 인터메조는 1943년 3월에 쓰여졌다. 이 작품은 "'매력적'이라는 단어를 구현했다. 쉽게 악보가 넘어가고 각 음은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음을 이어가는데 의심할 여지 없는 프랑스의 색채와 웅변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133] 여덟편의 녹턴은 거의 10년동안 작곡되었다. 뿔랑이 여덟번째 곡에 "사이클의 종결부(Pour servir de Coda au Cycle)"라는 제목을 붙이긴 했었나 이 곡들을 하나의 모음집으로 생각했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뿔랑의 녹턴은 밤의 정경과 음악적 심상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존 필드, 쇼팽, 포레의 녹턴이나 낭만파의 음악시들보다 뛰어나다.[133]

뿔랑이 견딜만하다고 언급한 작품인 《세 개의 무궁동 (1919)》, 《다장조 모음곡 (1920)》, 《세 작품들 (1928)》은 모두 초기의 작품들이다. 모두 짧은 소곡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길이가 긴 곡인 《세 작품들》의 두 번째 곡 "찬송가Hymne"도 4분을 넘지 않는다.[132]

기꺼이 비난한 곡들인 《나폴리 (1925)》에서는 이탈리아를 세 악장을 통해 묘사하고, 《나젤의 밤 (1936)》에서는 그의 친구들의 작품을 자그맣게 그려넣었다. 특히 나젤의 밤은 후세에 "엘가수수께끼 변주곡과 동등"하며 재치있고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134]

여기서 언급된 곡들 외에 잘 알려진 피아노 작품들로는 노벨레테 두 집(1927-28)과 아이들을 위한 여섯 개의 소품인 《빌라쥐와즈Villageoises (1933)》, 일곱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관현악곡인 《프랑스 모음곡 (1935)》의 피아노 편곡,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시테르를 향한 승선L'embarquement pour Cythère (1953)》이 있다.[135]

실내악

뿔랑의 실내악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22세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을 초기 실내악 작품으로 분류하는데,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 (1918),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918),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소나타 (1922), 호른, 트럼펫, 트롬본을 위한 소나타(1922) 총 네 개의 소나타가 이에 포함된다.[136] 이 곡들에서는 재즈의 화성과 로코코 시대의 디베르티시망(divertissements)양식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으며, 모두 10분을 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작곡된 다른 곡으로는 《흑인 랩소디 (1917)》와 오보에, 바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26)가 있다.[2]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작곡된 곡들은 중기 실내악 작품으로 분류한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육중주(1932)는 디베르티멘토 형식의 2악장을 활발한 1악장과 3악장이 둘러싼 구조의 가벼운 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곡가 본인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초연 후에 상당한 교정을 하는데, 1939년과 1940년에 쓰인 곡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137][n 24] 바이올린 소나타(1942-43)와 첼로 소나타(1948) 역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뿔랑은 이 소나타들을 쓰기 전에 두 편의 작품에서 실패를 겪고[n 25] 1947년에 쓴 현악 사중주 습작을 폐기하는 등[n 26] 현악 작품들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Both sonatas are predominantly grave in character; that for violin is dedicated to the memory of Federico García Lorca.[2] Commentators including Hell, Schmidt and Poulenc himself have regarded it, and to some extent the cello sonata, as less effective than those for wind.[140] The Aubade, "Concerto choréographique" for piano and 18 instruments (1930) achieves an almost orchestral effect, despite its modest number of players.[n 27] The other chamber works from this period are arrangements for small ensembles of two works in Poulenc's lightest vein, the Suite française (1935) and the Trois mouvements perpétuels (1946).[142]

The final three sonatas are for woodwind and piano: for flute (1956–57), clarinet (1962), and oboe (1962). They have, according to Grove, become fixtures in their repertoires because of "their technical expertise and of their profound beauty". The Elégie for horn and piano (1957) was composed in memory of the horn player Dennis Brain.[2] It contains one of Poulenc's rare excursions into dodecaphony, with the brief employment of a twelve-note tone row.[143]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뿔랑이 자주 사용했다.


가곡

Poulenc composed songs throughout his career, and his output in the genre is extensive.[n 28] In Johnson's view, most of the finest were written in the 1930s and 1940s.[145] Though widely varied in character, the songs are dominated by Poulenc's preference for certain poets. From the outset of his career he favoured verses by Guillaume Apollinaire, and from the mid-1930s the writer whose work he set most often was Paul Éluard. Other poets whose works he frequently set included Jean Cocteau, Max Jacob, and Louise de Vilmorin.[146] In the view of the music critic Andrew Clements, the Éluard songs include many of Poulenc's greatest settings;[147] Johnson calls the cycle Tel Jour, Telle Nuit (1937) the composer's "watershed work", and Nichols regards it as "a masterpiece worthy to stand beside Fauré's La bonne chanson".[2] Clements finds in the Éluard settings a profundity "worlds away from the brittle, facetious surfaces of Poulenc's early orchestral and instrumental music".[147] The first of the Deux poèmes de Louis Aragon (1943), titled simply "C", is described by Johnson as "a masterpiece known the world over; it is the most unusual, and perhaps the most moving, song about the ravages of war ever composed."[148]

In an overview of the songs in 1973, the musical scholar Yvonne Gouverné said, "With Poulenc, the melodic line matches the text so well that it seems in some way to complete it, thanks to the gift which the music has for penetrating the very essence of a given poem; nobody has better crafted a phrase than Poulenc, highlighting the colour of the words."[149] Among the lighter pieces, one of the composer's most popular songs is a setting of Les Chemins de l'amour for Jean Anouilh's 1940 play as a Parisian waltz;[150] by contrast his "monologue" "La Dame de Monte Carlo", (1961) a depiction of an elderly woman addicted to gambling, shows the composer's painful understanding of the horrors of depression.[151]

합창곡

Apart from a single early work for unaccompanied choir ("Chanson à boire", 1922), Poulenc began writing choral music in 1936. In that year he produced three works for choir: Sept chansons (settings of verses by Éluard and others), Petites voix (for children's voices), and his religious work Litanies à la Vierge Noire, for female or children's voices and organ.[152] The Mass in G major (1937) for unaccompanied choir is described by Gouverné as having something of a baroque style, with "vitality and joyful clamour on which his faith is writ large".[149] Poulenc's new-found religious theme continued with Quatre motets pour un temps de pénitence (1938–39), but among his most important choral works is the secular cantata Figure humaine (1943). Like the Mass, it is unaccompanied, and to succeed in performance it requires singers of the highest quality.[2] Other a cappella works include the Quatre motets pour le temps de Noël (1952), which make severe demands on choirs' rhythmic precision and intonation.[153]

Poulenc's major works for choir and orchestra are the Stabat Mater (1950), the Gloria (1959–60), and Sept répons des ténèbres (Seven responsories for Tenebrae, 1961–62). All these works are based on liturgical texts, originally set to Gregorian chant.[66] In the Gloria, Poulenc's faith expresses itself in an exuberant, joyful way, with intervals of prayerful calm and mystic feeling, and an ending of serene tranquillity.[66] Poulenc wrote to Bernac in 1962, "I have finished Les Ténèbres. I think it is beautiful. With the Gloria and the Stabat Mater, I think I have three good religious works. May they spare me a few days in Purgatory, if I narrowly avoid going to hell."[66] Sept répons des ténèbres, which Poulenc did not live to hear performed, uses a large orchestra, but in Nichols's view it displays a new concentration of thought.[2] To the critic Ralph Thibodeau, the work may be considered as Poulenc's own requiem and is "the most avant-garde of his sacred compositions, the most emotionally demanding, and the most interesting musically, comparable only with his magnum opus sacrum, the opera, Dialogues des Carmélites."[66]

오페라

Stage design, fairly abstract
Design by Sylvain Lhermitte for Les mamelles de Tirésias

Poulenc turned to opera only in the latter half of his career. Having achieved fame by his early twenties, he was in his forties before attempting his first opera. He attributed this to the need for maturity before tackling the subjects he chose to set. In 1958 he told an interviewer, "When I was 24 I was able to write Les biches [but] it is obvious that unless a composer of 30 has the genius of a Mozart or the precociousness of Schubert he couldn't write The Carmelites – the problems are too profound."[34] In Sams's view, all three of Poulenc's operas display a depth of feeling far distant from "the cynical stylist of the 1920s": Les mamelles de Tirésias (1947), despite the riotous plot, is full of nostalgia and a sense of loss. In the two avowedly serious operas, Dialogues des Carmélites (1957) and La Voix humaine (1959), in which Poulenc depicts deep human suffering, Sams sees a reflection of the composer's own struggles with depression.[2]

In terms of musical technique the operas show how far Poulenc had come from his naïve and insecure beginnings. Nichols comments in Grove that Les mamelles de Tirésias, deploys "lyrical solos, patter duets, chorales, falsetto lines for tenor and bass babies and ... succeeds in being both funny and beautiful".[2] In all three operas Poulenc drew on earlier composers, while blending their influence into music unmistakably his own. In the printed score of Dialogues des Carmélites he acknowledged his debt to Mussorgsky, Monteverdi, Debussy and Verdi.[154] The critic Renaud Machart writes that Dialogues des Carmélites is, with Britten's Peter Grimes, one of the extremely rare operas written since the Second World War to appear on opera programmes all over the world.[155]

Even when he wrote for a large orchestra, Poulenc used the full forces sparingly in his operas, often scoring for woodwinds or brass or strings alone. With the invaluable input of Bernac he showed great skill in writing for the human voice, fitting the music to the tessitura of each character.[154] By the time of the last of the operas, La Voix humaine, Poulenc felt able to give the soprano stretches of music with no orchestral accompaniment at all, though when the orchestra plays, Poulenc calls for the music to be "bathed in sensuality".[156]

녹음본

Poulenc was among the composers who recognised in the 1920s the important role that the gramophone would play in the promotion of music.[2] The first recording of his music was made in 1928, with the mezzo-soprano Claire Croiza accompanied by the composer at the piano, in the complete song cycle La bestiaire for French Columbia.[157] He made numerous recordings, mainly for the French division of EMI. With Bernac and Duval he recorded many of his own songs, and those of other composers including Chabrier, Debussy, Gounod and Ravel.[158] He played the piano part in recordings of his Babar the Elephant with Pierre Fresnay and Noël Coward as narrators.[159] In 2005, EMI issued a DVD, "Francis Poulenc & Friends", featuring filmed performances of Poulenc's music, played by the composer, with Duval, Jean-Pierre Rampal, Jacques Février and Georges Prêtre.[160]

Middle-aged man looking towards camera
뿔랑의 친구이자 통역가였던 벤저민 브리튼

A 1984 discography of Poulenc's music lists recordings by more than 1,300 conductors, soloists and ensembles, including the conductors Leonard Bernstein, Charles Dutoit, Milhaud, Charles Munch, Eugene Ormandy, Prêtre, André Previn and Leopold Stokowski. Among the singers, in addition to Bernac and Duval, the list includes Régine Crespin, Dietrich Fischer-Dieskau, Nicolai Gedda, Peter Pears, Yvonne Printemps and Gérard Souzay. Instrumental soloists include Britten, Jacques Février, Pierre Fournier, Emil Gilels, Yehudi Menuhin and Arthur Rubinstein.[161]

Complete sets of Poulenc's solo piano music have been recorded by Gabriel Tacchino, who had been Poulenc's only piano student (released on the EMI label), Pascal Rogé (Decca), Paul Crossley (CBS), Eric Parkin (Chandos) and Olivier Cazal (Naxos).[162][163] Integral sets of the chamber music have been recorded by the Nash Ensemble (Hyperion), and a variety of young French musicians (Naxos).[123][164]

The world premiere of Dialogues des Carmélites (in Italian, as Dialoghi delle Carmelitane) was recorded and has been released on CD. The first studio recording was soon after the French premiere, and since then there have been at least ten live or studio recordings on CD or DVD, most of them in French but one in German and one in English.[165]

평가

The two sides to Poulenc's musical nature caused misunderstanding during his life and have continued to do so. The composer Ned Rorem observed, "He was deeply devout and uncontrollably sensual";[166] this still leads some critics to underrate his seriousness.[123] His uncompromising adherence to melody, both in his lighter and serious works, has similarly caused some to regard him as unprogressive. Although he was not much influenced by new developments in music, Poulenc was always keenly interested in the works of younger generations of composers. Lennox Berkeley recalled, "Unlike some artists, he was genuinely interested in other people's work, and surprisingly appreciative of music very far removed from his. I remember him playing me the records of Boulez's Le marteau sans maître with which he was already familiar when that work was much less well-known than it is today."[116] Boulez did not take a reciprocal view, remarking in 2010, "There are always people who will take an easy intellectual path. Poulenc coming after Sacre [du Printemps]. It was not progress."[167] Other composers have found more merit in Poulenc's work; Stravinsky wrote to him in 1931: "You are truly good, and that is what I find again and again in your music".[168]

In his last years Poulenc observed, "if people are still interested in my music in 50 years' time it will be for my Stabat Mater rather than the Mouvements perpétuels." In a centenary tribute in The Times Gerald Larner commented that Poulenc's prediction was wrong, and that in 1999 the composer was widely celebrated for both sides of his musical character: "both the fervent Catholic and the naughty boy, for both the Gloria and Les Biches, both Les Dialogues des Carmélites and Les Mamelles de Tirésias."[123] At around the same time the writer Jessica Duchen described Poulenc as "a fizzing, bubbling mass of Gallic energy who can move you to both laughter and tears within seconds. His language speaks clearly, directly and humanely to every generation."[169]

각주, 참고문헌, 출처

각주

  1. "...y a en lui du moine et du voyou."[3] "Voyou" has no exact English translation, and as well as "naughty boy",[4] it has been variously rendered as "ragamuffin or street-urchin",[5] "guttersnipe",[6] "bad boy",[7] "bounder",[8] "hooligan",[9] and "rascal".[10]
  2. Jenny Poulenc's favourites ranged from Mozart, Schumann and Chopin to popular sentimental pieces by composers such as Anton Rubinstein.[11] Poulenc dedicated his opera Dialogues des Carmélites (1956) to "the memory of my mother, who revealed music to me".[12]
  3. The works were Trois mouvements perpétuels, Trois pastorales and Suite pour piano.[19]
  4. The Poulenc scholar Carl B Schmidt lists two works earlier than Rapsodie nègre, unperformed and known to have been destroyed by the composer: "Processional pour la crémation d'un mandarin" (Processional for the Cremation of a Mandarin) (1914) and Préludes (1916) both for solo piano;[24] several later pieces composed between 1917 and 1919 were also destroyed or lost.[25]
  5. A pun on the English colloquial expression "leg-pulling" – playful, humorous deception.[27]
  6. Poulenc recalled Ravel as saying that Saint-Saëns was a genius, Schumann was mediocre and much inferior to Mendelssohn, late Debussy (such as Jeux) was poor, and Chabrier's orchestration incompetent.[30] Chabrier's music was one of Poulenc's particular enthusiasms. He said in the 1950s, "Ah! Chabrier, I love him as one loves a father! An indulgent father, always merry, his pockets full of tasty tit-bits. Chabrier's music is a treasure-house you could never exhaust. I just could not do without it. It consoles me on my darkest days, because you know ... I am a sad man – who likes to laugh, as do all sad men."[31]
  7. In the original, Poulenc's quotation of Satie's words is given as, "Ce c... de Ravel, c'est stupide tout ce qu'il dit!"[32]
  8. Poulenc commented in 1958 how much he had come to admire Ravel and that he had been glad to be able to show it, not only in words, but as a pianist, through his interpretations of Ravel's works.[34]
  9. Milhaud's view has been questioned by later writers. In Music & Letters in 1957 Vera Rašín cast doubt on the statement that Collet's choice was arbitrary, surmising that the label "Les Six" was carefully planned by Jean Cocteau, who had taken the group under his wing.[40] A similar view was put forward by the musicologist Robert Orledge in 2003.[41]
  10. Koechlin, like Ravel, was a pupil of Gabriel Fauré, but Poulenc did not share their love of Fauré's music: the Fauré scholar Jean-Michel Nectoux comments that Poulenc's aversion seems strange because of all the members of Les Six, Poulenc "is the nearest to Fauré in the limpid clarity and singing quality of his own writing, in his charm".[47]
  11. In addition to "Epitaphe", other Poulenc works were dedicated to Linossier or her memory are the Sonata for Horn, Trumpet and Trombone (1922), Ce doux petit visage (1939), Les Animaux modèles (1941) and "Voyage" from Calligrammes (1948).[61]
  12. Bernac's timbre and sensitive musicianship considerably influenced Poulenc's compositional style in his mélodies, to a degree comparable with the musical relationship between Poulenc's friends the tenor Peter Pears and the composer Benjamin Britten, although unlike their English counterparts Poulenc and Bernac were partners only professionally.[69][71]
  13. Poulenc recalled later that they performed only French songs, but his recollection was inaccurate: German songs, notably those of Schumann, were included in some programmes.[79][80]
  14. This song, "You shall not have Alsace and Lorraine", was a popular patriotic French ditty dating from the Franco-Prussian War, when the Germans defeated France and annexed much of Alsace and Lorraine. France regained them after the First World War, but at the time of Les Animaux modèles they were once again under German control.[82]
  15. The piece was not produced in the US until 1953, and did not reach Britain until 1958, when Britten and Pears presented it at the Aldeburgh Festival.[92] It remains by a considerable margin the least popular of Poulenc's three operas; Dialogues des Carmélites and La Voix humaine each received more than four times as many productions worldwide between 2012 and 2014.[93]
  16. Despite their musical differences, Poulenc and Boulez maintained amicable personal relations: exchanges of friendly letters are recorded in Poulenc's published correspondence.[96]
  17. In 1949, thrilled by a new American recording of his 1936 Mass conducted by Robert Shaw, Poulenc exclaimed, "At last the world will know that I am a serious composer.[68]
  18. The illness is variously reported as pleurisy and lung cancer.[68][102]
  19. 원본은 프랑스어로 "grrrrrande"[109]
  20. There was a joke in musical circles at the time that Poulenc was writing his solo opera for Maria Callas, who was known for her reluctance to share the spotlight with anybody, but in fact there was never any thought that Callas, or anyone apart from Duval, should play the lead.[110]
  21. 과거 프랑스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로 메시앙을 꼽았던 뿔랑은,[119] 1950년 미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메시앙의 요즘 작품은 과거와 비교할 때 "비데에서 나오는 성수"같다는 사견을 달았다.[120]
  22. "Je souhaite une musique saine, claire et robuste, une musique aussi franchement française que celle de Strawinsky est slave."[124]
  23. At the time of Poulenc's comments there were only twelve: the first set, numbers 1–10, date from the 1920s and the second set, numbers 11 and 12, from the 1930s; numbers 13–15 were written in 1958–59.[2]
  24. The List of compositions by Francis Poulenc gives dates for the major revisions
  25. 1919년에 하위헌스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 소나타가 바이올린 소나타가 연주된 기록이 있으나, 출판되지 않았으며 현재 소실되었다.[138]
  26. 이 사중주의 주제는 《신포니에타》에서 사용되었다.[139]
  27. Hell lists the piece under the separate heading of "Works for Chamber Orchestra" along with the occasional work Two Marches and an Intermezzo (1937).[141]
  28. A 2013 CD set of the complete songs occupies four full discs and plays for more than five hours in total.[144]

참고문헌

  1. Schmidt (2001), p. 3
  2. Chimènes, Myriam and Roger Nichols. "Poulenc, Francis", Grove Music Online, Oxford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4 August 2014 (구독 필요)
  3. Roy, p. 60
  4. Poulenc (2014), p. 247
  5. Burton, p. 15
  6. Buckland and Chimènes, p. 85
  7. Ivry, p. 8
  8. Schmidt (2001), p. 105
  9. Walker, Lynne. "The alchemical brother", The Independent, 27 January 1999
  10. Hewett, Ivan. "Part monk, part rascal", The Daily Telegraph, 23 March 2013
  11. Hell, p. 2
  12. Quoted in Schmidt (2001), p. 6
  13. Hell, pp. 2–3
  14. Schmidt (2001), pp. 6 and 23
  15. Poulenc (1978), p. 98
  16. Schmidt (2001), pp. 26–27
  17. Poulenc (1978), p. 37
  18. Quoted in Schmidt (2001), p. 20
  19. Schmidt (2001), p. 21
  20. Hell, pp. 3–4
  21. Hell, p. 4
  22. Schmidt (2001), pp. 38–39
  23. Romain, p. 48
  24. Schmidt (1995), pp. 11–12
  25. Schmidt (1995), p. 525
  26. Harding, p. 13
  27. "leg-pull", Oxford English Dictionary, retrieved 20 September 2014 (구독 필요)
  28. Machart, p. 18
  29. Poulenc (1978), p. 138
  30. Nichols, p. 117
  31. Poulenc (1978), p. 54
  32. Poulenc (1963), p. 75
  33. Nichols, pp. 117–118
  34. "Les Dialogues de Poulenc: The Composer on his Opera", The Times, 26 February 1958, p. 3
  35. Hell, pp. 9–10
  36. "Francis Poulenc", The Guardian, 31 January 1963, p. 7
  37. Sams, Jeremy. " Poulenc, Francis",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 Grove Music Online, Oxford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4 August 2014 (구독 필요)
  38. Hell, pp. 13–14
  39. Quoted in Hell, pp. 14–15
  40. Rašín, Vera. "'Les Six' and Jean Cocteau", Music & Letters, April 1957, pp. 164–169 (구독 필요)
  41. Orledge, pp. 234–235
  42. Hell, p. 13
  43. Hell, pp. 13 and 93; and Schmidt (2001), p. 451
  44. Hinson, p. 882
  45. Desgraupes, p. 5; and Hell, p. 19
  46. Hell, p. 21
  47. Nectoux, p. 434
  48. Schmidt (2001), p. 144
  49. Newman, Ernest. "The week in music", The Manchester Guardian, 28 April 1921, p. 5
  50. Hell, p. 23
  51. Hell, pp. 24–28
  52. Schmidt (2001), p. 136
  53. Hell, pp. 31–32
  54. Canarina, p. 341
  55. Burton, p. 37
  56. Ivry, p. 68
  57. Ivry, p. 74
  58. Schmidt (2001), p. 154
  59. Ivry, p. 86; and Schmidt (2001), p. 461
  60. Johnson, p. 140
  61. Schmidt (2001), p. 480
  62. Hell, pp. 38–43
  63. "A Television Transmission by the Baird Process will take place during this programme", Genome – Radio Times, 1923–2009, BBC, retrieved 17 October 2014
  64. Schmidt p. 476
  65. Poulenc (2014), p. 233
  66. Thibodeau, Ralph. "The Sacred Music of Francis Poulenc: A Centennial Tribute", Sacred Music, Volume 126, Number 2, Summer 1999, pp. 5–19 (구독 필요)
  67. Hell, p. 48
  68. Moore, Christopher. "Constructing the Monk: Francis Poulenc and the Post-War Context", Intersections, Volume 32, Number 1, 2012, pp. 203–230 (구독 필요)
  69. Blyth, Alan. "Bernac, Pierre", Grove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5 October 2014 (구독 필요)
  70. Ivry, p. 96
  71. Johnson, p. 15
  72. Poulenc (1991), p. 11
  73. Doctor, pp. 69, 74, 78, 147, 226, 248, 343, 353–354, 370–371, 373, 380 and 382
  74. Poulenc (2014), p. 141
  75. "N.Y. Musical Tributes to Francis Poulenc", The Times, 17 April 1963, p. 14
  76. Hell, pp. 60–61
  77. Schmidt (2001), p. 266
  78. Schmidt (2001), p. 268
  79. Fancourt, Daisy. "Les Six", Music and the Holocaust, retrieved 6 October 2014
  80. Ivry, p. 119
  81. Poulenc (2014), pp. 207–208
  82. Simeone Nigel. "Making Music in Occupied Paris", The Musical Times, Spring, 2006, pp. 23–50 (구독 필요)
  83. Schmidt, p. 284
  84. "Broadcasting Review", The Manchester Guardian, 24 March 1945, p. 3
  85. Hell, p. 67
  86. Mann, William. "Poulenc's Choral Masterpiece", The Times, 8 March 1963, p. 15
  87. "Court Circular", The Times, 5 January 1945, p. 6
  88. "Albert Hall", The Times, 8 January 1945, p. 8
  89. "National Gallery Concert", The Times, 10 January 1945, p. 8; and Schmidt (2001), p. 304
  90. Schmidt (2001), p. 303
  91. "The Paris Boat-Train", The Manchester Guardian, 16 January 1945, p. 4
  92. Sams, p. 282
  93. "Francis Poulenc", Operabase, retrieved 6 October 2014
  94. Schmidt (2001), pp. 291 and 352
  95. Poulenc (1991), p. 273
  96. Poulenc (1994), pp. 818, 950 and 1014
  97. Hell, p. 74
  98. Ivry, p. 170
  99. Hell, pp. 97 and 100
  100. Hell, pp. 78–79
  101. Gendre, Claude, "The Literary Destiny of the Sixteen Carmelite Martyrs of Compiègne and the Role of Emmet Lavery", Renascence, Fall 1995, pp. 37–60
  102. Schmidt (2001), p. 404
  103. Schmidt (2001), p. 397
  104. Burton, p. 42
  105. Hell, pp. 97 and 104
  106. Wheeler, Mike. "Francis Poulenc (1899–1963) Flute Sonata (1957)", Scottish Chamber Orchestra, retrieved 22 October 2014
  107. "Biography", Francis Poulenc: musicien français 1899–1963, retrieved 22 October 2014
  108. Ivry p. 194 and Schmidt (2001), p. 477
  109. Poulenc 1994, letter 917, quoted in Moore, Christopher. "Constructing the Monk: Francis Poulenc and the Post-War Context", Intersections, Volume 32, Number 1, 2012, pp. 203–230
  110. Sams, p. 283
  111. Schmidt (2001), p. 446
  112. Nichols, Roger. "Views of Chabrier", The Musical Times, July 1983, p. 428 (구독 필요)
  113. Schmidt (2001), p. 463
  114. Hell, p. 87
  115. Keck, p. 18
  116. "Francis Poulenc", The Musical Times, March 1963, p. 205 (구독 필요)
  117. Schmidt, p. 342
  118. Poulenc (2014), p. 36
  119. Langham Smith, Richard. "More Fauré than Ferneyhough", The Musical Times, November 1992, pp. 555–557 (구독 필요)
  120. Chimènes, p. 171
  121. Hell, pp. 87–88
  122. Buckland and Chimènes, p. 6
  123. Larner, Gerald. "Maître with the light touch", The Times, 6 January 1999, p. 30
  124. Landormy, Paul. 162
  125. Delamarche, p. 4
  126. Hell, p. 64
  127. Schmidt (2001), p. 275
  128. Delamarche, p. 6
  129. Hell, p. 88
  130. Daniel, p. 165
  131. Schmidt (2001), p. 182
  132. Ledin, Marina and Victor. "Francis Poulenc (1899–1963) Piano Music, Volume 3", Naxos Music Library, retrieved 22 October 2014
  133. Ledin, Marina and Victor. "Francis Poulenc (1899–1963) Piano Music, Volume 1", Naxos Music Library, retrieved 22 October 2014
  134. Bush, p. 11
  135. Hell, pp. 100–102
  136. Keck, p. 285
  137. Hell, p. 59
  138. Schmidt (1995), p. 29
  139. Hell, p. 73
  140. Daniel, p. 122; Hell, p. 65; and Schmidt (2001), pp. 282–283 and 455
  141. Hell, p. 104
  142. Schmidt (2001) p. 148
  143. Schmidt (2001), p. 419
  144. Johnson, pp. 4–10
  145. Johnson, p. 13
  146. Hell, pp. 93–97
  147. Clements, Andrew. "Poulenc: The Complete Songs – review", The Guardian, 17 October 2013
  148. Johnson, p. 70
  149. Gouverné, Yvonne. "Francis Poulenc", Francis Poulenc: musicien français 1899–1963, retrieved 27 October 2014
  150. Johnson, p. 64
  151. Johnson, p. 128
  152. Hell, pp. 98–99
  153. Vernier, David. "Resonant, Resplendent Poulenc Motets, Mass, Chansons", Classics Today, retrieved 18 July 2016
  154. Sams, Jeremy. "Dialogues des Carmélites",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 Grove Music Online, Oxford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2 October 2014 (구독 필요)
  155. Machart, Renaud. "Francis Poulenc", Francis Poulenc: musicien français 1899–1963, retrieved 27 October 2014
  156. Sams, Jeremy. "Voix humaine, La",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 Grove Music Online, Oxford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2 October 2014 (구독 필요)
  157. Bloch, p. 34
  158. "A recital by Pierre Bernac and Francis Poulenc"; and "Francis Poulenc et Denise Duval interprètent", both WorldCat, retrieved 22 October 2014
  159. Hell, p. 112
  160. "Francis Poulenc & Friends", WorldCat, retrieved 21 November 2014
  161. Bloch, pp. 241–253
  162. "Poulenc Piano Music", WorldCat, retrieved 22 October 2014
  163. Gill, Dominic and Charles Timbrell. "Tacchino, Gabriel", Grove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10 October 2014 (구독 필요)
  164. "Poulenc Chamber Music", WorldCat, retrieved 22 October 2014
  165. "Poulenc Carmelites" WorldCat, retrieved 27 October 2014
  166. Rorem, Ned. "Poulenc: A Memoir", Tempo, New Series, Number 64, Spring, 1963, pp. 28–29 (구독 필요)
  167. Clark, Philip, "The Gramophone Interview – Pierre Boulez", Gramophone, October 2010, p. 49
  168. Poulenc (1991), p. 94
  169. Duchen, Jessica. "Plucky chicken: Sensual, witty and unfairly dismissed as lightweight", The Guardian, 1 January 1999

출처

  • Bloch, Francine (1984). 《Francis Poulenc, 1928–1982: Phonographie》 (프랑스어).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Département de la phonothèque nationale et de l'audiovisuel. ISBN 978-2-7177-1677-1. 
  • Buckland, Sidney; Myriam Chimènes, 편집. (1999). 《Poulenc: Music, Art and Literature》. Aldershot: Ashgate. ISBN 978-1-85928-407-0. 
  • Burton, Richard D E (2002). 《Francis Poulenc》. Bath: Absolute Press. ISBN 978-1-899791-09-5. 
  • Bush, Geoffrey (1988). 《Notes to CD set Poulenc – Works for Piano》. Colchester: Chandos. OCLC 705329248. 
  • Canarina, John (2003). 《Pierre Monteux, Maître》. Pompton Plains, US: Amadeus Press. ISBN 978-1-57467-082-0. 
  • Cayez, Pierre (1988). 《Rhône-Poulenc, 1895–1975》 (프랑스어). Paris: Armand Colin and Masson. ISBN 978-2-200-37146-3. 
  • Chimènes, Myriam (2001). 〈Évolution des goûts de Francis Poulenc à travers sa correspondance〉. Arlette Michel; Loïc Chotard. 《L'esthétique dans les correspondances d'écrivains et de musiciens, XIXe–XXe siècles》 (프랑스어). Paris: Presses de l'Université de Paris-Sorbonne. ISBN 978-2-84050-128-2. 
  • Daniel, Keith W (1982). 《Francis Poulenc: His Artistic Development and Musical Style》. Ann Arbor, US: UMI Research Press. ISBN 978-0-8357-1284-2. 
  • Delamarche, Claire (1996). 《Notes to CD set Poulenc Concertos》. London: Decca. OCLC 40895775. 
  • Desgraupes, Bernard; Keith Anderson (trans) (1996). 《Notes to CD set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 Munich: MVD. OCLC 884183553. 
  • Doctor, Jennifer (1999). 《The BBC and Ultra-modern Music, 1922–1936》. Cambridge an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66117-1. 
  • Harding, James (1994). 《Notes to CD set Ravel and Poulenc – Complete Chamber Music for Woodwinds, Volume 2》. London: Cala Records. OCLC 32519527. 
  • Hell, Henri; Edward Lockspeiser (trans) (1959). 《Francis Poulenc》. New York: Grove Press. OCLC 1268174. 
  • Hinson, Maurice (2000). 《Guide to the Pianist's Repertoire》. Bloomington, US: Indiana University Press. ISBN 978-0-253-10908-8. 
  • Ivry, Benjamin (1996). 《Francis Poulenc》. London: Phaidon Press. ISBN 978-0-7148-3503-7. 
  • Johnson, Graham (2013). 《Notes to CD set Francis Poulenc – The Complete Songs》. London: Hyperion. OCLC 858636867. 
  • Keck, George Russell (1990). 《Francis Poulenc – A Bio-bibliography》. New York: Greenwood Press. ISBN 978-0-313-25562-5. 
  • Landormy, Paul (1943). 《La musique française après Debussy》. Paris: Gallimard. OCLC 3659976. 
  • Machart, Renaud (1995). 《Poulenc》 (프랑스어). Paris: Seuil. ISBN 978-2-02-013695-2. 
  • Nectoux, Jean-Michel; Roger Nichols (trans) (1991). 《Gabriel Fauré – A Musical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23524-2. 
  • Nichols, Roger (1987). 《Ravel Remembered》. London: Faber and Faber. ISBN 978-0-571-14986-5. 
  • Orledge, Robert (2003). 〈Satie and Les Six〉. Richard Langham Smith; Caroline Potter. 《French Music since Berlioz》. Aldershot, UK and Burlington, US: Ashgate. ISBN 978-0-7546-0282-8. 
  • Poulenc, Francis (1963). Stéphane Audel, 편집. 《Moi et mes amis》 (프랑스어). Paris and Geneva: Palatine. OCLC 504681160. 
  • Poulenc, Francis (1978). Stéphane Audel, 편집. 《My Friends and Myself》. 번역 James Harding. London: Dennis Dobson. ISBN 978-0-234-77251-5. 
  • Poulenc, Francis (1991). Sidney Buckland, 편집. 《Francis Poulenc: Correspondence 1915–1963》. 번역 Sidney Buckland. London: Victor Gollancz. ISBN 978-0-575-05093-8. 
  • Poulenc, Francis (1994). Myriam Chimènes, 편집. 《Correspondance 1910–1963》 (프랑스어). Paris: Fayard. ISBN 978-2-213-03020-3. 
  • Poulenc, Francis (2014). Nicolas Southon, 편집. 《Articles and Interviews – Notes from the Heart》. 번역 Roger Nichols. Burlington, US: Ashgate. ISBN 978-1-4094-6622-2. 
  • Romain, Edwin (1978). 《A Study of Francis Poulenc's Fifteen Improvisations for Piano Solo》. Hattiesburg, US: University of Southern Mississippi. OCLC 18081101. 
  • Roy, Jean (1964). 《Francis Poulenc》 (프랑스어). Paris: Seghers. OCLC 2044230. 
  • Sams, Jeremy (1997) [1993]. 〈Poulenc, Francis〉. Amanda Holden. 《The Penguin Opera Guide》. London: Penguin Books. ISBN 978-0-14-051385-1. 
  • Schmidt, Carl B (1995). 《The Music of Francis Poulenc (1899–1963) – A Catalogue》.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816336-7. 
  • Schmidt, Carl B (2001). 《Entrancing Muse: A Documented Biography of Francis Poulenc》. Hillsdale, US: Pendragon Press. ISBN 978-1-57647-026-8. 

더 읽어보기

  • Bernac, Pierre (1978). 《Francis Poulenc et ses mélodies》 (프랑스어). Paris: Éditions Buchet-Chastel. OCLC 5075759. 
  • Lacombe, Hervé (2013). 《Francis Poulenc》 (프랑스어). Paris: Fayard. ISBN 978-2-213-67199-4. 
  • Mellers, Wilfrid (1993). 《Francis Poulenc》.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816337-4. 
  • Poulenc, Francis (1993) [1964]. 《Journal de mes mélodies》 (프랑스어). Paris: Cicero. ISBN 978-2-908369-10-6. 
  • Poulenc, Francis (1999). Lucie Kayas, 편집. 《À bâtons rompus (écrits radiophoniques, Journal de vacances, Feuilles américaines)》 (프랑스어). Arles: Actes Sud. ISBN 978-2-7427-2033-0. 
  • Poulenc, Francis (2011). Nicolas Southon, 편집. 《J'écris ce qui me chante: écrits et entretiens》 (프랑스어). Paris: Fayard. ISBN 978-2-213-63670-2. 
  • Ramaut, Alban, 편집. (2005). 《Francis Poulenc et la voix》 (프랑스어). Lyon: Symétrie. ISBN 978-2-914373-02-9. 

외부 링크

틀:Francis Poulenc 틀:Les Six 틀:Neoclassicism (mu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