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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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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은 [[영국]]의 [[간호사]], [[작가]], [[통계학자]]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은 [[영국]]의 [[간호사]], [[작가]], [[통계학자]]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윌리엄 에드워드와 프랜시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어]] 지명이다. 플로렌스의 위에 언니 파시노프가 있었는데, 이 이름도 [[나폴리]](파시노프의 출생지)의 그리스식 지명이다.
영국의 자선가의 딸로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여행 중이던 윌리엄 에드워드와 프랜시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어]] 지명이다. 플로렌스의 위에 언니 파시노프가 있었는데, 이 이름도 [[나폴리]](파시노프의 출생지)의 그리스식 지명이다.


플로렌스는 [[잉글랜드]] [[햄프셔 주]]의 엠블리와 [[더비셔 주]]의 리 허스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지리학]]등의 다양한 [[학문]]을 어릴때부터 익힐 수 있었다. [[인도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타임스]] [[신문]]에서 읽은 뒤 자극받아,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에서 간호사 수업을 받았다.
플로렌스는 [[잉글랜드]] [[햄프셔 주]]의 엠블리와 [[더비셔 주]]의 리 허스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지리학]]등의 다양한 [[학문]]을 어릴때부터 익힐 수 있었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인도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타임스]] [[신문]]에서 읽은 뒤 자극받아,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853년]]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크림 전쟁]]([[1854년]]-[[1856년]])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간호사]] 활동하였다.[[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써 [[조선]]의 [[의녀]]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스트웰로에 매장되었고, 묘비에는 'F.N.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고 간략히 기재되었다.이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말라는 나이팅게일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이듬해 [[크림 전쟁]]([[1854년]]-[[1856년]])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스쿠타리]]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써 [[조선]]의 [[의녀]]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밖에도 많은 병원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남북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로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만국 적십자사에서는 '[[나이팅게일 상]]'설정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표창하고 있다.

저서 <간호를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세계 모든 간호사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스트웰로에 매장되었고, 묘비에는 'F.N.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고 간략히 기재되었다.이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말라는 나이팅게일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터로 달려가 부사병들을 간호했다. 특히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적군의 부상병들까지 간호하는 인류애를 보여 주어, 사람들은 그녀를 '크림의 천사', 혹은 '등불을 든 천사'등으로 불렀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녀는 여왕으로부터 영국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간호 학교를 세워 훌롱한 간호사를 길러 내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파일:Florencenighting00abbouoft 0030.jpg|thumb|alt|나이팅게일|플로렌스 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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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ospital at Scutari 2a.jpg|right|250px|thumb|나이팅게일이 일한 세쿠타리 병원. 나이팅게일과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헌신으로 환경이 개선되었다.]]
[[파일:Hospital at Scutari 2a.jpg|right|250px|thumb|나이팅게일이 일한 세쿠타리 병원. 나이팅게일과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헌신으로 환경이 개선되었다.]]
[[파일:Nightingale receiving the Wounded at Scutari by Jerry Barrett.jpg|thumb|250px|나이팅게일이 열병치료를 마치고 세쿠타리에 돌아온 모습을 그린 그림. 제리 바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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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일 (수) 22:43 판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출생1820년 5월 12일
이탈리아의 기 이탈리아 피렌체
사망1910년 8월 13일
영국의 기 영국 런던
사인병사
성별여성
국적영국의 기 영국
별칭램프를 든 천사
학력독일에서 간호사 수업
직업간호사
종교성공회
부모부친은 윌리엄 에드워드 나이팅게일, 모친은 프랜시스 나이팅게일
친척언니 파시노프 나이팅게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은 영국간호사, 작가, 통계학자이다.

영국의 자선가의 딸로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에서 여행 중이던 윌리엄 에드워드와 프랜시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플로렌스라는 이름은 피렌체의 영어 지명이다. 플로렌스의 위에 언니 파시노프가 있었는데, 이 이름도 나폴리(파시노프의 출생지)의 그리스식 지명이다.

플로렌스는 잉글랜드 햄프셔 주의 엠블리와 더비셔 주의 리 허스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지리학등의 다양한 학문을 어릴때부터 익힐 수 있었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인도주의자인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웃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나이팅게일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타임스 신문에서 읽은 뒤 자극받아, 집안의 명예실추를 우려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853년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이듬해 크림 전쟁(1854년-1856년)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스쿠타리의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 학교(현재 킹스 칼리지 런던의 일부)를 설립하고 간호전문서적을 씀으로써 조선의녀처럼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를 전문직업으로 성숙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도 많은 병원 및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남북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영국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로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만국 적십자사에서는 '나이팅게일 상'을 설정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표창하고 있다.

저서 <간호를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세계 모든 간호사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이스트웰로에 매장되었고, 묘비에는 'F.N.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이라고 간략히 기재되었다.이는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지말라는 나이팅게일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이 일한 세쿠타리 병원. 나이팅게일과 38명의 성공회 수녀들의 헌신으로 환경이 개선되었다.
나이팅게일이 열병치료를 마치고 세쿠타리에 돌아온 모습을 그린 그림. 제리 바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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