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소재국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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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명* | The Grand Canal |
프랑스어명* | Le Grand Canal |
등록 구분 | 문화유산 |
기준 | (i), (iii), (iv), (vi) |
지정번호 | 1443 |
지역** | 아시아 · 태평양 |
지정 역사 | |
2014년 (38차 정부간위원회) | |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
대운하(중국어 간체자: 大运河, 정체자: 大運河, 병음: Dà Yùnhé)는 중국의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운하다. 베이징-항저우 대운하(중국어 간체자: 京杭大运河, 정체자: 京杭大運河, 병음: Jīng-Háng Dà Yùnhé)라고도 한다. 대운하 시작은 기원전 5세기[1] 또는 7세기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나라 양제가 7세기에 시작했다고 하며, 원나라 쿠빌라이칸 시기 개수했고, 명나라 영락제 시기 완성했다고 한다.[2] 운하 노정은 대체로 진푸선과 병행하고 있다. 수나라 대운하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그 도정은 다르다.[3]
역사[편집]
수나라 시기[편집]
604년 (인수 4년)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605년 (대업 원년)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파기 시작하였다.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다. 통제거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허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허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화이허(淮河)와 합류한다. 통제거로 인해 황허와 화이허(淮河)를 연결되자, 그 해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화이허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하였다. 영제거는 608년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天津)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닿을 수 있었다. 2년 뒤, 강남운하(江南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다.[4] 모두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 정도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으로 모두 400km 정도이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였다.
당나라~원나라 시기[편집]
대운하는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중요한 수로가 되었다. 대운하는 원나라 때 다시 대공사를 하여 황허 유역 동안진과 위하 유역의 임청을 잇는 회통 운하라는 새로운 운하가 건설되었다.
명나라 시기 이후[편집]
1411년 명나라 때에는 명나라 공부 대신 송례가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대운하를 6개 주요 부분으로 나누었다.
- 북경 주변 통현을 잇는 짧은 수로
- 백하와 천진을 잇고 다시 위하 유역 임청까지 운하를 파서 이어지는 강
- 산동성에 있는 구간
- 서주에서 황허의 남쪽 진로를 따라 칭장강까지 뻗은 구간
- 칭장강에서 옛 산양 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장강 유역 금강까지 이어진 구간
- 강남 운하 라 불리는 장강 남쪽 구간 운하로 장강 남동쪽에서 소주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항주까지 이어지는 320km의 운하
이렇게 6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운하는 19세기에는 몇 차례 홍수로 제방이 무너져 큰 문제가 일어났고 1934년 국민당 정부가 칭장강과 장강 구간의 운하를 수리했다. 1958년에는 공산당 정부가 600t 선박이 지나갈 수 있도록 다시 수리했고 근대식 갑문과 64km의 새로운 운하를 연결하고 이렇게 여러 번 준설하고 보강하여 지금의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건설의 효과[편집]
대운하가 개통되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남쪽이 북쪽과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운하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괴롭혔기 때문에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사실 당나라야말로 대운하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자체 생산력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었던 장안(長安)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덕분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개봉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경제적인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개봉 성의 성곽 중심을 운하가 관통하고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네이버 지식백과] 징항대운하 [京杭大运河, Grand Canal of China]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2010. 8. 1., 황매희 편집부)
- ↑ Huang Ray, "The Grand Canal during the Ming Dynasty, 1368-1644", ph.d diss. University of Michigan, 1964. p.2
-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대운하〉
- ↑ John K. Fairbank and Denis C. Twitchett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Sui and T'ang China, 589–906 AD, Part 1, 1979. ISBN 978-0-521-21446-9. pp.134-137.
외부 링크[편집]
- 위키미디어 공용에 대운하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