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직제학공파 김약시·김췌 묘역내 묘표·문인석

광산김씨 직제학공파 김약시·김췌 묘역내 묘표·문인석
대한민국 광주시향토문화유산
종목향토문화유산 제3호
(2008년 12월 4일 지정)
수량김약시 묘표 1, 김췌 묘표 1, 김약시 석인 1
시대조선
소유광산김씨직제공파종중
위치
광주 곤지암읍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광주 곤지암읍
광주 곤지암읍
광주 곤지암읍(대한민국)
주소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삼합리 산50-1
좌표북위 37° 22′ 51″ 동경 127° 25′ 55″ / 북위 37.38083° 동경 127.43194°  / 37.38083; 127.43194

광산김씨 직제학공파 김약시·김췌 묘역내 묘표·무인석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있는, 여말선초 학자인 김약시와 그의 아들 김췌의 묘 앞에 모신 묘비석과 석물이다. 2008년 12월 4일 광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김약시(金若時: 1335~1406)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382년(고려 우왕 8)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조선이 개창된 후에 은거(隱居)하였다. 태조가 오랜인연으로 관직에 나올 것을 청하였으나 끝까지 절개를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1]

김약시 묘표(墓表)는 1727년(영조 3) 건립되었다. 비문을 지은 이재(李縡: 1680~1746)는 송시열의 학맥을 계승한 김창흡, 이간의 학설을 따르는 낙론(洛論)계의 거두로서 비문 제술 당시 대제학으로 있었다. 비문의 글씨를 쓴 대사간 김조택(金祖澤)은 김약시의 방손으로 숙종의 국구(國舅) 김만기의 손자이고, 김진구의 5남이다. 비석은 원수(圓首)형에 자연석을 대강 다듬은 받침석을 썼는데, 규모는 높이 149㎝, 최대폭 64.5㎝, 두께 20.5㎝이다. 이 비석은 전조(前朝)인 고려를 부정하고 건국하였던 조선이 16세기 이후에 고려에 충절을 지킨 이들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분위기속에서 건립된 몇가지 예의 하나이다.[1]

석인은 복두공복 양식이 유행하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얼굴은 과장되어 전체 크기의 1/3을 차지하고 눈∙코∙입을 우스꽝스럽게 배치하였다. 측면에서 본 모습은 분명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면에는 그것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목을 표현하기 위해 깊은 홈을 내었다. 몸통은 사각기둥처럼 단순하게 표현되었는데, 양손을 가운데 모으고 64×9㎝의 긴 홀을 잡고 있다. 양손 모두 손가락 5개씩 표현하느라 사실보다 과장되어 있다. 발은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다.[1]

김췌(金萃: ?~1452)는 김약시의 아들로 15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18세에 직부전시(直赴殿試)하였다고 한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경기도 경력(經歷), 지상원군사(知祥原郡事), 여흥부사(驪興府使), 성주목사(星州牧使) 등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444년(세종 26) 세종의 명을 받아 청주 초수리(椒水里: 지금의 수안보)에 가서 목욕하고 안질을 치료한 후 '안질이 조금 나았다'고 복명하여, 세종이 초수리에가서 안질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웠다.[1]

김췌 묘표는 하엽방부(화관형) 형태로 하엽과 비신을 하나의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건립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5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비신에는 사주(四周)에 경계선을 치고 가운데에 '星州牧使金君諱萃妻令人庇仁縣夫人金氏之墓' 라 2줄로 묘주를 밝혔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녀를 구분하여 1줄씩 써야 할 것인데 부인 쪽의 글자 수가 많아 계속 이어 쓴 점이 특이해 보인다. 김췌는 품계가 4품에 머물러 당상관(堂上官)에오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군(君)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후면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1]

각주[편집]

  1. 《광주시사》4권, 광주시사편찬위원회, 98-99쪽, 2010년 3월

참고 문헌[편집]

  •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지정신청 조사보고서』(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