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평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권수평(權守平, ?~1250년)은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생애[편집]

권수평은 대정(隊正)으로 가난하게 지낼 때, 낭중 복장한(卜章漢)이 억울하게 귀양가게 되자 그의 토지에서 나오는 조(租)를 대신 받았다. 몇 년 뒤 복장한이 사면되어 돌아오게 되자 권수평은 평소 서로 알지 못하는 데다 또 그 전조(田租)도 이미 강으로 조운(漕運)하고 있었다. 권수평이 조부(租簿)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가져다주자, 복장한은 말하기를, "내가 유배가 있었으니 당신이 그 토지의 소출을 받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받았을 거요. 그대가 지금 나를 딱하게 여겨 그 토지를 돌려주는 것만도 족한데 어떻게 조세까지 받겠소?" 라고 하였다. 권수평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앙을 틈타 그 전지를 먹고 산 것도 오히려 의당한 것이 아니오. 지금 당신이 돌아왔으니 내가 어찌 차마 그걸로 생계를 삼겠소?" 라고 하고는 그 장부를 던졌다. 복장한이 받지 않고 문을 닫고 들어가니 권수평은 결국 장부를 돌에 매어서 던져 넣고 갔다. 부로(父老)들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은 쟁탈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이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견룡군(牽龍軍)은 직위가 낮아도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자리라 권세가의 자제들이 모두 원하였는데, 권수평은 대정(隊正)을 거쳐 보임될 수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다 하여 사양하니, 친구들이 말하기를, “이 자리에 선발된 것만도 영광이네. 많은 사람들이 아내를 바꾸어가며 부귀를 구하는 데 그대가 만일 부잣집에 다시 장가들려 한다면 누가 딸을 주길 바라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권수평은 말하기를, “빈부는 하늘의 뜻이다. 어찌 차마 20년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잣집 딸을 구하겠는가?”라 하니 말한 자들이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권수평은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1]

가족[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