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치아 디 로렌초 데 메디치
루크레치아 디 로렌초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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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470년 8월 4일 |
출생지 | 피렌체 공화국 |
사망일 | 1553년 11월 15일 (83세) |
가문 | 메디치 가문 (결혼 전) 살비아티 가문 (결혼 후) |
부친 | 로렌초 데 메디치 |
모친 | 클라리체 오르시니 |
배우자 | 야코포 살비아티 |
루크레치아 디 로렌초 데 메디치(Lucrezia di Lorenzo de' Medici, 1470년 8월 4일 – 1553년 11월 10일과 15일 사이)는 이탈리아의 귀족 여성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와 클라리체 오르시니[1]의 장녀이자 마리아 살비아티와 조반니 살비아티의 어머니이다.[2] 그녀의 초상화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성모자와 다섯 천사》에 있는 아기 예수로 여겨지고 있다.
친 동생이 교황 레오 10세(재위1513~21)였고 사촌동생이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였다. 1494년과 1527년에 자신의 출신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하자 가문의 일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왔다.
생애[편집]
그녀는 1488년 2월 야코포 살비아티와 혼인했다.[3][4] 그녀는 결혼 지참금으로 2,000 플로린을 가져갔다.[5] 그녀의 형제들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을 때, 그녀는 야코포가 새로운 통치자의 지지자여서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6] 1497년 8월 그녀는 남동생 피에로가 권력을 되찾는 계획을 지원하러 3,000 두캇을 보냈다.[6] 계획은 실패했고, 이 음모에 참여한 자들은 처형당했지만, 피렌체의 지도자 프란체스코 발로리는 여성을 해치려 하지는 않았다.[6]
그녀는 메디치 가의 지원 작업을 계속했고, 이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층에 맞서 그녀의 조카 클라리체 데 메디치를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시집을 보내는데 중매를 나서기도 했다.[7] 그녀의 남동생 줄리아노가 1512년 피렌체에 돌아오고나서, 그는 그의 누이와 여동생에게 정부를 재구성하는 방법을 요청하기도 했다.[8]
1513년 3월 그녀의 남동생이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메디치 가는 피렌체에서 이를 축하하는 기념일을 며칠간 벌였다.[9] 루크레치아와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가문 궁전 밖의 외부인들에게 선물과 돈을 주었다.[9] 1514년에 교황 레오 10세는 베네치아의 은행에게서 많은 빚을 졌고 그는 루크레치아와 그녀의 남편에게 교황관 (44,000 두캇의 가치)을 저당잡히기도 했다.[10]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아들 로렌초를 교황군 지휘관이자 나중에는 공작으로 만드려고 하던 그녀의 시누이 알폰시나 오르시니와 공개적인 갈등을 갖게 됐다.[11]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개인으로서 보다는 부부가 같이 피렌체의 통치 무리로 여겨지는 걸 선호했다.[12] 교황 레오 10세는 1517년에 그녀의 아들 조반니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10] 루크레치아는 그녀의 아들이 교황의 특사로 여행을 가 있는 동안, 그의 집과 공직을 관리했다.[13] 그녀는 로마에서 메디치 가 출신들을 선출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다.[14] 루크레치아는 교황 레오 가 사망할 때 같이 있었다.[13]
1527년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야코포는 루크레치아의 사촌동생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와 함께 카를 5세의 포로가 되었다.[15] 루크레치아는 보석금을 만들어 그녀의 남편이 석방되도록 하였다.[16]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중요한 메디치 가의 상속자는 이탈리아내에서 혼인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증손녀 카테리나 데 메디치를 장차 미래의 앙리 2세에게 혼인시키기로 한 클레멘스 7세의 결정에 반대했었다.[13] 야코포는 1533년 사망했다. 루크레치아는 그보다 20년이나 오래 살았다. 루크레치아의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고, 1553년 11월 10일에서 15일 사이에 사망했을것으로 추측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 83세였다.
후원[편집]
1520년에 교황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수녀원을 지원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그녀에게 요청했었다.[17] 그녀는 공동 침실, 회랑, 작업장등 산조르조 수녀원에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17] 그녀는 1530년 로마에 채플들을 지었다. 그녀와 아들 조반니는 메디치 가의 무덤으로서도 쓰기 위해 로마의 채플에 같이 비용을 지불했다.[17] 1520년 11월 그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애를 정리하는 것에 대한 필리포 네를리 (Filippo Nerli)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18] 그녀는 지롤라모 베니비에니의 후원자 한 명이였다.[19] 그녀와 함께 베니비에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시신을 그의 고향인 피렌체로 가져와야한다는 그들의 노력을 지원해달라고 교황 레오 10세에게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19]
자녀[편집]
살비아티와 사이에서 그녀는 10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들 중 일부는 유럽 르네상스 역사에서 중요했던 인물들이였다:
- 추기경 조반니 살비아티 (1490년 - 1553년)
- 로렌초 살비아티 (Lorenzo Salviati, 1492년 - 1539년) - 의원이자 후원자
- 피에로 살비아티 (Piero Salviati) - 정치인
- 엘레나 살비아티 (Elena Salviati, 1495년 경 - 1552년) - 팔라비치노 팔라비치노 (Pallavicino Pallavicino) 후작과 초혼을 했고 아피아노 공작 이아코포 5세 아피아니와 재혼
- 바티스타 살비아티 (Battista Salviati, 1498년–1524년)
- 마리아 살비아티 (1499년–1543년) -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와 혼인. 이 혼인은 메디치 가 본가와 포폴라노 분가의 결합이였다. 그의 아들 코시모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 사후 피렌체를 이끌도록 지명된다.
- 루이사 살비아티 (Luisa Salviati) - 시지스몬도 데 루나 (Sigismondo de Luna), 페랄타 (Peralta)와 혼인
- 프란체스카 살비아티 (Francesca Salviati, 1504년 ~ 1536년) - 피에로 구알테로티 (Piero Gualterotti)와 초혼을 했고, 1533년에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와 재혼했으며, 교황 레오 11세의 어머니이다.
- 베르나르도 살비아티 (1505/1508년 - 1568년) - 구호기사단의 기사이며; 프랑스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섬기기도 했고; 1561년 추기경이 됐다.
- 알라마노 (Alamanno, 1510년–1571년) - 정치인
각주[편집]
- ↑ Tomas 2003, 7쪽.
- ↑ Tomas 2003, 5쪽.
- ↑ Tomas 2003, 21쪽.
- ↑ 위키백과 '야코포 살비아티'에는 결혼 년도가 1486년으로 되어있다.
- ↑ Tomas 2003, 20쪽.
- ↑ 가 나 다 Tomas 2003, 109쪽.
- ↑ Tomas 2003, 112쪽.
- ↑ Tomas 2003, 115쪽.
- ↑ 가 나 Tomas 2003, 126쪽.
- ↑ 가 나 Tomas 2003, 130쪽.
- ↑ Tomas 2003, 132-133쪽.
- ↑ Tomas 2003, 133-134쪽.
- ↑ 가 나 다 Tomas 2003, 141쪽.
- ↑ Tomas 2003, 5,142쪽.
- ↑ Tomas 2003, 116쪽.
- ↑ Tomas 2003, 117쪽.
- ↑ 가 나 다 Tomas 2003, 88쪽.
- ↑ Tomas 2003, 94-95쪽.
- ↑ 가 나 Tomas 2003, 95쪽.
참고 자료[편집]
- Tomas, Natalie R. (2003). 《The Medici Women: Gender and Power in Renaissance Florence》. Aldershot: Ashgate. ISBN 0754607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