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돈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돈지(朴惇之, 1342년 1월 6일 ~ 1422년 9월 2일[1])은 고려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박계양(趙啓陽), 자는 계신(季信)[1]이다.

생애[편집]

1360년(공민왕 9) 9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며[2], 10월 병과(丙科) 5위로 문과에 급제했다.[3]

1362년(공민왕 11) 문예부승(文睿府丞), 1363년(공민왕 12) 전의주부(典醫注簿), 1364년(공민왕 13) 7월 고공좌랑(考功佐郞), 12월 예의좌랑(禮儀佐郞), 1365년(공민왕 14) 군부좌랑(軍簿佐郞), 1366년(공민왕 15) 고공정랑(考功正郞)·예문응교(藝文應敎)·지제교(知製敎), 1367년(공민왕 16) 군부정랑(軍簿正郞), 1368년(공민왕 17) 내사사인(內書舍人), 1371년(공민왕 20) 비서감(祕書監)을 차례로 거쳤다.[4][1]

1374년(공민왕 23) 장모 홍씨(洪氏)와 통정하는 일이 있었는데, 탄로나자 도망쳐 버렸다.[5]

이후 박계양에서 박돈지로 개명했으며, 1388년(창왕 즉위년) 명에 사신으로 입조하는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 등과 압물관(押物官)으로서 동행했다.

이때 명에서 직접 물건을 매매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먼 고을로 유배되었는데, 진짜 이유는 이숭인(李崇仁)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6]

1398년(태조 7) 회례사(回禮使)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육주목(六州牧)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를 만났으며, 이듬해 5월 왜구 근절책을 교섭하고 돌아왔다.[7]

이 공으로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로 발탁되었으며[1], 11월 항복한 왜인들을 위로했다.[7]

12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이듬해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를 차례로 거쳤다.[1]

1401년(태종 원년) 남쪽 지방의 조세를 육로로 운송해서 생기는 폐단에 대해 상소했으며[8], 이듬해 4월 형조판서(刑曹典書)로 임명되었다.[1]

5월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발령받았으나, 같은 날 사간원(司諫院)의 상소로 면직되고 다음날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판군기감사(判軍資監事)로 고쳐 임명되었다.

같은 달 노숭(盧崇)을 대신해 명에 사은사(謝恩使)로 갔으나, 길이 막혀 8월 황제의 조서(詔書)만을 베끼고 돌아왔으며, 9월 공안부윤(恭安府尹)·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 임명되었다.

1404년(태종 4) 과거 자신의 범죄 기록을 파기했다는 이유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형조전서(刑曹典書) 이사영(李士穎)과 함께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며, 같은 달 인주(仁州)로 유배되었다.

1410년(태종 10) 4월 야인들이 동북면(東北面)에 침범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명에 주문사(奏聞使)로 갔다가 돌아왔으며[8], 9월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로 임명되었다.[1]

일찍이 명에 주문사로 갔을 때 무역을 자행한 일 때문에 11월 사헌부에서 죄를 청했으나, 왕이 이를 용서했으며[8], 이듬해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1422년(세종 4) 고향인 밀양부(密陽府)에서 졸했다.[1]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박성진(朴成進)[9] : 정용장군(精勇將軍)
    • 조부 - 박원(朴原)[9]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 아버지 - 박윤문(朴允文)[10] : 밀성군(密城君)
      • 어머니 -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상호군(上護軍),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1261년 ~ 1330년)의 차녀[11]
        • 형 - 박린(朴僯)[10] : 초명 박밀양(朴密陽), 밀산군(密山君)
        • 형 - 박대양(朴大陽)[10] : 밀천군(密川君)
        • 형 - 박소양(朴少陽/朴紹陽)[10] : 운남(雲南)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음
        • 형 - 박삼양(朴三陽)[10] : 정언(正言)
        • 부인 - 전주목사(全州牧使) 홍만룡(洪萬龍)의 딸[10]
          • 아들 - 박사제(朴思齊)[1] : 판도총랑(版圖摠郞)
          • 첫째 사위 - 이의산(李義山)[1]
          • 둘째 사위 - 정경(鄭耕, 1370년 ~ 1421년) : 전주부윤(全州府尹)

각주[편집]

  1. 『박돈지 묘지』
  2. 『고려사』 「선거지」
  3. 『고려열조등과록』
  4. 예문응교와 지제교 직은 비서감 임명 전까지 계속 유지했다.
  5. 『고려사』 「공민왕세가」
  6. 『고려사』 「이숭인전」
  7. 『정종실록』
  8. 『태종실록』
  9. 『씨족원류』
  10. 『박윤문 처 김씨 묘지명』
  11. 『김태현 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