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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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함(朴仲涵(1711~1778) )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함 혹은 중함보(仲涵甫), 호는 창암(蒼巖)이다.

그의 부친은 박필기(朴弼琦, 1677~1757)로, 자는 치규(稚圭), 호는 무취옹(無臭翁)이다.

박사해는 1755년(영조 31)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66년 대사간이 되었고, 1775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당시 세력이 있는 자들이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고 임금을 흔드는 일까지 있었다. 영조는 골고루 인재를 등용학자 탕평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 때 박사해는 지방의 숨은 인재들을 천거하니 권력자들의 반발이 심하였다.

권력을 나누어 차지하던 자들의 횡포로 영조가 한발 뒤로 물러서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박사해는 여러번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간관이 감히 임금 앞에서 간쟁하였으니 골경지신(骨鯁之臣)의 기풍이 있었다. 골경(骨鯁)은 짐승의 뼈나 생선의 가시를 뜻하며 억세서 목에 걸리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즉, 듣기 거북한 말도 거침없이 하였다는 것이다.영조 때 대사간 박사해(朴師海)가 아뢴 말 가운데에 ‘한갓 성상의 마음만 번뇌한다. [徒煩聖慮]’란 네 글자가 있어 골경지신(骨鯁之臣)이라 이를만 하다는 것으로써 특별히 외구마(外廐馬)를 하사하여 친히 차비문 밖에서 받도록 하였다.

저서로 창암집이 있다. 1700여 작품이 필사본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