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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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적요점

- 의병장 유종환 휘하에서 항일투쟁

- 서울 3.1운동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귀향

- 진주 3.1운동의 핵심적 지도자

- 진주와 대구에서 재판받아 3년형 언도되어 옥고를 치름

- 진주청년회, 노동공제회, 형평운동, 기근구제회 등에서 활동

-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로 활동

♦ 정부포상

- 1968년 대통령 표창 추서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과 성장배경

박진환 선생의 생년월일에 대하여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국가보훈처에서 1888년 3월 2일생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진주지역의 호적이 광복 후 혼란기에 불타고 없기 때문에 호적으로 확인했다기 보다 다른 문헌 또는 족보를 보고 쓴 것 같다. 1963년 5월 20일 진주 3.1동지회에서 진주시 사회계로 보고한 <유공자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생년월일을1886년 2월 24일생으로 기록하였고 후손이 진주시 남성동 254번지에 거주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렇다면 앞선 기록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찰청 기록에는 1888년 3월이라고 기록되고 생일이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진주시 상봉동과 남성동 부근에서 주로 생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의병활동과 사회활동

 

박진환 선생은 조선 말기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당하였을 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유종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우고 귀향하였다. 진주 3.1운동의 핵심지도자로 활동하다 피체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간회 활동, 구제회 활동, 노동공제회 등에서 10여 간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박 선생은 진주 출신 의병장으로 전북지역으로 진출하여 무주군 일대와 충북 영동 추풍령 등지에서 의로운 청년들을 모아 일본군과 접전하고 혁혁한 공을 세운 유종환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함께 공을 세웠다. 1907년 4월경 전라도와 경상도 접경지역인 대덕산 일원에 주둔할 때 함안 지역에 파견되었던 일본군이 대덕산으로 왔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져 밤새도록 싸운 적도 있었다.

유종환 장군에 의한 <독립유공자공훈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본다.

⌜진주시 의병장이었던 그는 전북, 경북 일원에서 대활약을 전개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일제에 의해 폭압정치가 단행되자 이에 격분하지 않는 백성이 없었다. 이 때 스스로 애국애족심을 발휘하여 떨쳐 일어나 무력항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유종환 장군은 1907년 김동신과 함께 의거를 일으켜 의병진의 비장이 되었다. 1908년 황간군에 사는 김진규의 주선으로 다시 의병을 모집ㄷ하여 무주, 장수 등지에서 의로운 투쟁에 앞장서게 된다.

김동신이 피체된 후에는 80여 명을 거느리고 전성범 장군과 함께 용담, 금산, 영동 등지에서 전투를 감행하였다.

이 때 박진환 선생이 동참하여 큰 공을 세운 것 같다.⌟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박진환 선생의 공적내용에 대하여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라고 기재되었을 뿐이다. 박 선생은 유종환 장군이 1909년 5월 거창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었다고 순국하자 곧 바로 귀향한 것인지 그전에 귀향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21)세 청년 박진환이 애국충정의 마음으로 의병대열에 참전하여 일본 수비대와 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투쟁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민영환, 조병세 등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시작될 그 시기에 박 선생도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에 동참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간 애국지사는 김재화, 박대업 등이고 강달영 선생도 동참하였다.

이들은 서울 3.1운동에 참가하여 만세를 고창하고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가하여 수종한 후 우리도 하는 생각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챙기고 태극기를 주워 바지 끝의 댓님 속에 감추고 귀향하였다.

강달영, 박용근, 이강우, 권채근, 김재화 등과 비밀회합을 개최하여 진주의 거의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진주시내 5,6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남으로서 일제에 혼란을 주고 한 곳이 진압되더라도 다른 곳에서 함성이 들리면 기세가 지속적인 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장소에서 일순간에 일어나야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각기 다른 장소에 있다 보면 몇 시, 몇 분에 일어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한 가지로 다같이 알 수 있는 방법이나 소리를 찾다가 교회로 달려갈 사람을 정해 놓고 교회 종을 치면 바로 시위를 시작하라는 소리로 인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이 정하고 태극기의 제작과 독립선언서의 격문, 교유문 등의 등사는 박진환 선생, 심두섭 선생, 정준교 선생 등 4명이 배 건너 천전리 망경산중에서 하기로 결정한 그대로 시행되었다.

학교, 사회단체, 종교단체, 즉 교회, 천주교, 천도교, 기타 종교 등도 각기 맡아 연락하고 교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책임분담은 박진환 선생, 김재화 선생 등의 지도에 따라 갈 뿐이었다.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뜻이다.

의거일은 진주 장날인 3월 13일과 18일 중에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 13일로 결정되지 못한 것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애국동지 중에 순사출신이 3명 있었기 때문에 말하기를 13일은 모종의 시위가 있을 것을 일경들이 미리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18일을 의거일로 하면 지난 13일은 조용히 지나갔으니 하고 18일은 조금은 소홀함이 있을 것이니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18일에는 수비가 소홀하다는 것인가라고 몯자 13일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항일투쟁이 가능하다는데 모두 동의함으로 3월 18일 화요일로 결정되었다.

박진환 선생은 각 사회단체에 대한 교섭을 맡아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다.

3월 18일 12시경 진주읍내 유일한 교회였던 진주교회에 설치된 종각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키로 함에 라 그대로 실시되었다. 12시를 조금 지난 시각에 종소리를 울리자 다섯 장소 이상에서 동시에 일제히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만세소리는 점점 크고 우렁차게 퍼져 나가고 군중 수도 점점 늘어가더니 마침내 진주읍내 전체가 만세소리로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여 지축을 흔들었다.

서울에 배포된 내요으이 격문이 배포되었고 진주에서 제작된 교유문도 배포되었다.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고 긴 장대에 꼽힌 태극기도 흥분하기 좋은 자료가 되었다.

한규상 선생은 강주한, 박진환 선생 등과 함께 중앙시장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진환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읽고 있을 때 다 읽기 전에 일본 순사가 나타나 독립선언서를 압수했으나 군중들이 두려운지 주동자를 체포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박 선생의 중앙시장통의 투쟁에 대하여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시장통에서 항일운동을 개시하였는데 18일 오후 1시경 진주시장 통에서 군중을 모아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배포하였다.⌟

또 시장에서 항일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때 일본순사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압수되었다.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의 인쇄에 대하여 박 선생 자신은 “심두섭, 정준교 등과 함께 3월 16일 밤 12시경 천전리 망경산중에서 약 2천장을 인쇄하였고 격문은 정준교, 심두섭 등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약 1천장을 등사하였다 라고 했으며 이 인쇄물을 각 동지들에게 배포한 후 3월 18일 시장통에 나아가 배포하게 되었다.” 라고 진술하였다.

<고등경찰관계적록> 10면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배일사상을 가진 박진환, 이강우, 강대창, 강상호, 박용근 등 주모자들은 3월 18일 진주 예수교 예배당에서 울리는 정오의 종소리를 기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약 1만군중이 모여 재판소에서부터 남행하고 남강변에서 본성동으로 일대 시위를 전개하여 소요를 발생케 했다. 진주경찰서와 헌병대가 협력하고 소방대 지휘로 운집한 군중을 해산하고 그 주모자와 관계자 3백여 명을 검거했다는 것이다.

진주 3.1운동은 박 선생이 직접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인쇄하고 현장에서 총지휘한 지도자였음이 확실해졌다.

박 선생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배포한 한규상의 자서전에서도 박 선생에 대하여 기록되었고 교회 종소리에 라 일제히 독립만세시위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관에서 진주독립운동사에 대하여 최초로 기록한 <경상남도지>에 보면 <진주 3.1운동사>라는 제목이 있는데 3.1 항일투사 이기주 선생이 1959년에 쓴 것이다.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진주 3.1운동이 시작되었고 3월 18일 12시 교회종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었으니 정의의 종소리며 독립의 우렁찬 소리였다.⌟ 라고 기재되었다.

진주시위는 특별한 시위가 있었다. 기생들의 시위, 노동독립단의 시위, 걸인독립단의 시위 등이다. 박진환 선생은 그 당시 직업이 잡화상이라고 기록되었으니 중앙시장에서 잡화상을 경영하였다.

거주지는 평안동이었기 때문에 시장 상인들과 조석으로 만나는 사이로 시장상인들과 주위에 사는 이들을 독립시위에 참여시키는데 유리하였다.

박 선생은 그날 중앙시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조선독립만세를 수차례 외쳐 주위를 환기시키고 독립선언서를 큰 소리로 3분 가량 낭독하고 있을 때 일본순사가 올라와 선언서를 탈취하였고 이어 주동자들을 체포하려고하자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하고 고창하니 홍수가 창일한 것처럼 항일의 기치가 오르는 형세가 되자 일본순사는 물러가 버렸다. 인근의 노점 상인들도 모두 호응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박 선생이 중앙시장에서 시위를 총지도, 총지휘하고 독립선언서를 읽고 교유문을 배포하였으며 이어 경남도청으로 군중을 이끌고 나아가 군중 앞에서 연설하니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하였다. 그러나 곧 일경에 검거되어 진주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박 선생이 진주 3.1운동과 진주시장에서 시위를 총지휘한 사실이 밝혀지자 혹독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혼절하여 수일 만에 깨어나기도 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 의하여 권채근, 김재화 선생이 결국 죽어 순국하였음이 그 증거가 된다.

부산지법 진주시청에서 재판을 받고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이 언도되었다. 법적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재판장 앞에서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우리도 국권을 가진 국가가 되어야 한다면서 항일정신을 강조하니 일본인 판사의 심사가 뒤틀어지더니 형벌을 추가해 징역 3년형을 선고하였다.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으므로 3년 징역이 확정되었다.

3.1운동 후 일제는 고도의 술책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하게 되는데 감시가 계속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범죄인에 대해서도 사면, 감형이란 방법으로 완화책으로 유도하였다. 그러므로 1921년 3월에 3년형이 2년으로 감형되어 대구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21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재작년 3월 만세범인 출옥 진주출신 박진환, 정준교, 심두섭, 강달영 4명⌟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진주로 귀향한 박 선생은 약 한 달간 요양하며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었다. 1921년 4월부터 진주청년회에 가입해 회원 겸 후원자 역할을 감당하였다. 출옥한지 한 달 만인 1921년 4월부터 진주청년회 서무 겸 사교부장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3년 1월 14일에는 진주청년회관에서 도서관 설치를 위한 교섭위원으로 선정되었고 1923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간사가 되어 노동운동의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진주청년회관에서 진주 노동공제회 1주년 기념식이 2월 20일 개최되었는데 박진환 선생은 <노동자의 설음>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실시하였다. 축하식이었기 때문에 김주학의 독창, 내빈축사가 있었고 소작부원 이성조의 노동자 독창이 있었다.

1923년 8월에는 진주유학생친목회가 8월 4일 개최되었는데 박 선생은 사회자로서 경과보고를 실시하였다.

1924년 10월에는 지난 10월 18일 신현수 집에서 신사상연구와 잡지 발간을 위해 동우사를 발족했는데 박진환, 정준교, 조우제, 신현수, 강대창, 김종명, 강상호 등이 발기인이 되었고 23일 총회에서 책임사원 제도로 하기로 한 후 조우제, 정준교, 신현수, 강대창, 박진환 등이 당선되었다.

1923년 4월에는 역사적인 형평운동의 시발점에서 형평운동의 발기인이 되었다.

1924년 3월에는 동경지진으로 조선인이 많이 죽었고 살아난 동포는 일본인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동포추모회를 개최할 때 단상에 올라가 소감피력을 했다.

1924년 10월에는 진주기근구제회 집행위원으로서 항일운동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에도 앞장 선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주 최초로 진주유치원이 개원될 때 어린이들이 장차 해방된 조국의 기둥이 될 것이라면서 희생적으로 후원하고 봉사하였다.

1927년 2월 25일에는 진주농민, 노동의 양 연맹총회에서 노동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곳에서 조선노동총동맹의 신강령을 따르기로 하고 기존 노동조합을 부흥시킨다는 내용을 통과시켰다.

1927년 10월 신간회 진주지회 창립 발기인대회를 열었고 같은 달 19일 창립대회에서 청년부 간사로 선출되어 독립사상의 고취에 진력을 다했다. 신간회 진주지회 창립의 주역이었고 처음 총회때부터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등 약 4년간 꾸준히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9년 2월 15일 신간회 설립 2주년 기념식 전국대회가 개최될 때 일경의 방해가 있었으나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대표자 대회에 진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과 1929년에도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 또는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신간회 본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는 등 진주를 대표하는 항일활동과 사회활동을 살펴볼 때 선생을 제외하고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다. 1927년 9월부터 1931년 전반기까지 3년 6개월 이상 신간회 진주지회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진주에서 발간된 <중앙공중보> 1935년 11우러 1일자에 의하면 진주시 수정동에 경로당을 신축했다는 큼직한 기사가 실렸다. 박진환 선생이 경노당 신축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며 많은 돈을 기부하여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이는 항일투사 강상호 선생과 함께 봉사했음을 알 수 있다. “1934년 9월 9일 장성룡, 박진환, 정창조, 강상호 등의 청장년들이 진주사회가 너무나도 질서가 문란하고 인륜이 땅에 떨어져 있음을 개탄하여 미풍양속을 조장하고자 본 회를 창립한지 1년 만에 3천여 원을 모아 경로당을 신축하여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라고 보도했는데 장소는 수정동 중복에 조선식 목조기와로 세웠다. 이 건물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지역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37년 12월에는 진주직업학교를 세우기 위해 하영진씨가 십 만원을 희사했으나 금액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시 기성회를 조직하기로 했는데 이 때 박 선생이 총무로 선출되었다.

사람이 충∙효를 모두 갖추고 실천하기 힘든 일인데 박 선생은 이 모두를 이루고 실천하신 분으로 추앙되어야 한다. 명심보감에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기뻐함에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함에는 즐거움을 다하고 병중에는 근심을 다하고 상중에는 슬픔을 다하고 또 엄숙함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박 선생은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벼슬이 제일이지만 마을에서는 나이 많은 것이 제일이다.”

박 선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감옥에서 3년간 고생하고 이웃 어른들을 위해 경노당을 지었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훌륭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라고 칭송하였다.

박진환 선생의 사망일에 대하여 해방 후라는 설과 해방 전이라는 설이 있으나 <독립유공자공훈록>에서는 1940년 6월 12일을 사망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헌에 의하면 1946년 3월 5일 오후에 진주극장에서 인민당 진주지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때 중앙당에서 염정권, 임윤재 등이 파견되고 박진환, 최웅제(진주 제1보통학교 출신) 대표가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되었다.

1949년 12월 8일 국민보도연맹 진주연맹 결성 및 선포대회가 진주극장에서 전향자, 자수자와 관내 유지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박진환 선생이 간사장으로 인사를 했다.

박 선생이 1949년 12월 말 혼란기 때 상봉서동에 사는 친족 박우희씨 댁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에 의해 밤중에 끌려가 행방불명되었다. 총살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정확한 사망일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해 박진환 선생은 1949년 12월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사망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