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김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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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2년 전 (김길수님) - 주제: 김시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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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영합니다 (토론) 2012년 3월 10일 (토) 14:58 (KST)답변

대한 독립군 협회[편집]

대한 독립군 협회[편집]

대한 독립군 협회

청산리대첩의 김시진장군 후손 모임
대한 독립군 후손들 모임,단체

김길수 (토론) 2012년 3월 17일 (토) 14:51 (KST)답변

김시진 장군[편집]

김시진 장군 [金時眞 將軍]

?~1943년,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1933년 ~1942년)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봉오동전투는1942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김시진, 최진동,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연합군

제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를 말

한다. 김시진장군이 이끈 대한독립군 안무가 이끈 국민회군

최진동 이끈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 군부

와 한경세가 이끈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야스카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 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를 쳐부수고 전과

를 올린다.1941년 8월 활발히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던 김시진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연합 대한북로독

군부를 결성 봉오동에 집결 강력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친다.

1942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

성군 강양동에 진입습격, 다음날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한다.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

를 편성하여 중국영토를 침입하여 독립군의 근거진인 봉오동

공격에 나선다. 김시진 장군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

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지로가 이끈 일본군 추격

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한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는데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큰 전과를

남기게 된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에 큰 충격을 준다.

일본군측은 독립군의 전투력을 제평가하고 이에 토벌계획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구체화시킨다. 국내외 독립군은

일제식민이후 1919년 3.1운동과 산발적으로 이뤄진 열사

(안중근,윤봉길)들의 독립운동,독립단체(김원봉의 의열단,

조선국민회,1926년 한인애국단,1927년 신간회,광복단)들의

독립활동은 일본군과 상대하여 그 전투의 성격을 달리하게

되는데 일본 정규부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독립의 희망을

갖게 시작된다.1942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대대적토벌작전을 시작한다. 일본군 제13사단,

제14사단과 그외 혼합 부대로 이뤄진 정규부대 20만이 청산리

로 향하는데 청산리전투는 그렇게 시작된다.


청산리 대첩 [靑山里大捷]


청산리 전투는 백운평, 완루구,천수평,어랑촌,고동하지역

에서의 치룬 전투를 말한다. 일본 제 13,14사단과 혼합부대로

이뤄진 20만과 대한독립군 김시진장군,북로군정서 김좌진장군

외 2만이 청산리에서 전투를 시작하게 되는데 1942년 10월 21일

백운평으로 진입한 일본 선발부대를 미리 매복한 김좌진.이범

석부대는 일제 사격을 가한다. 매복과 지리적 이점에 전투초기

에 일본 선발부대는 전세에 뒤지나 일본군의 집중공격에 김좌

진.이범석부대는 와해 되버린다. 전투에 패배한 김좌진.이범석

은 청산리에서 이탈하고 승리에 도취된 일본군은 완루구, 천수

평 어랑촌 지역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수가 대병력이다. 원래

청산리 지역은 안개가 자주끼는 골짜기가 많은 지역이다.

안개가 끼게되면 언제 겉칠지 모르고 어떤지역은 몇미터 앞도식

별하기 힘든 지역도 많아 일본군은 이 안개지역으로 대규모병력

을 들어서게 된다. 전투상황을 살펴본 김시진장군은 수적으로

상대할 상황이 아니고 김좌진과 이범석이 초면에 전투에 패하자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일본 대규모 부대가 안개지역으로 들어오게끔 하고 김시진장군은

대한독립군 부하들로 하여금 일본군 복장으로 변장하고 일본군부대

중간 중간에 잠입시킨다. 옆에서도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니 일본군

복장으로 변장한 독립군을 의심할리 없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사격을 가하는데 일본군은 독립군이 나

타나 사격한줄 알고 사격을 하는데 그 전투가 치열할데로 치열하여

일본군끼로 전투를 하게된 셈이 된다. 어떤 일본군은 안개지역에서

육박전을 벌이고 서로 사격을 가하고 그 청산리전투의 안개지역은

일본군의 아수라장이 된다.

일본군의 적군과 아군이 식별이 되지 않아 일본군들의 전투가 된

셈이 되는데 20만 대규모 병력이 사실상 초토와 되버린다. 생존

자는 1만 ~2만 정도이니 청산리 전투의 상황이 어떠한지 자명하게

되는데 일본의 이 참패로 전투상황을 축소 왜곡 시켜버린다. 1942

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부상자를 이끌고 일본으로

물러간다. 일본군의 아시아 식민지화를 포기하게 되는데 일본군의

완벽한 전쟁패배인것이다.


김길수 (토론) 2012년 3월 17일 (토) 15:34 (KST)답변

김시진장군[편집]

청산리 대첩 [靑山里大捷]

1942년 10월 백두산 청산리 대한 독립군 김시진장군은 일본군과

맞서 안개지역을 이용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이긴 전쟁.



김시진장군 과 대한독립군의 1942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1만의

대한독립군으로 적(일본군)군 20만명을 안개지역으로 유인 적들끼

리 교전하게끔하여 많은 사망자와 부장자가 발생했음.




1942년 10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 사령관 김시진 장군을

주축으로 된 대한 독립군이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고동하지역에서 6일간 일본군 3개 사단 및 혼합부대

20만명과 전투를 치룬걸 말한다. 이때 김시진 장군은 독립군중

한명의 계책에 의해 대한 독립군으로 하여금 일본군 복장으로 위장시켜 청산리 백운평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안개지역으로 유인하여 변장한 대한독립군을 일본군 곳곳에 침투시켜 일본군끼리

싸우게끔 하였는데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 가 생겼다. 이때 일본군은

사망자 11 만명과 부상자 4 만 5 천명 그리고 전투를 치룰수

5만 일본군의 전투결과가 발생했다. 청산리 독립군을 토벌계획이

무산된 일본군은 부상자와 함께 일본으로 퇴각한다

김시진[편집]

청산리 대첩 [靑山里大捷]

1942년 10월 백두산 청산리 대한 독립군 김시진장군은 일본군과

맞서 안개지역을 이용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이긴 전쟁.



김시진장군 과 대한독립군의 1942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1만의

대한독립군으로 적(일본군)군 20만명을 안개지역으로 유인 적들끼

리 교전하게끔하여 많은 사망자와 부장자가 발생했음.




1942년 10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총 사령관 김시진 장군을

주축으로 된 대한 독립군이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고동하지역에서 6일간 일본군 3개 사단 및 혼합부대

20만명과 전투를 치룬걸 말한다. 이때 김시진 장군은 독립군중

한명의 계책에 의해 대한 독립군으로 하여금 일본군 복장으로 위장시켜 청산리 백운평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안개지역으로 유인하여 변장한 대한독립군을 일본군 곳곳에 침투시켜 일본군끼리

싸우게끔 하였는데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 가 생겼다. 이때 일본군은

사망자 11 만명과 부상자 4 만 5 천명 그리고 전투를 치룰수

5만 일본군의 전투결과가 발생했다. 청산리 독립군을 토벌계획이

무산된 일본군은 부상자와 함께 일본으로 퇴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