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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8일 (목) 11:08 (KST)

김한정(金漢正)[편집]

김한정은 20년 가까이 김대중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셨습니다.

1989년부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의 공보비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기 시작해 김대중 대통령님이 퇴임하실 때까지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역임했습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에 다녀왔고,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의 기쁨을 함께했습니다. 동티모르에 평화유지군 파견을 건의해 동티모르 주민들을 살려 내기도 했습니다.

경원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쳤고, 김대중 대통령 계승모임인 ‘(사)행동하는 양심’ 상임이사 겸 운영위원장, 환경재단 기획위원 겸 그린에너지협력위원장, 양천지역발전위원회 고문 등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야권통합정당 건설을 위한 ‘혁신과 통합’ 제안자로 양천(을)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 실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살아온 길>

김한정은 1963년 9월 6일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에서 태어납니다.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서울 휘문고로 전학을 했고 1982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경제학 계열 입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신군부의 쿠데타와 80년 5월 광주학살로 민주화의 열망이 뜨거웠던 시절입니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던 경남 출신의 청년 김한정은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1983년 전두환 정권 반대시위에 참석했다가 시위 도중 붙잡혀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1985년 대학 4년 때 전두환 정권퇴진을 위한 대학교 연합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10개월간 안양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1986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 1989년 서울대를 늦깎이 졸업을 합니다.

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합니다. 故 문익환 목사, 이해찬(전 국무총리), 임채정(전 국회의장) 등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김대중 선생 단일후보 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김추위‘)’가 결성되고, 김한정은 대학생을 조직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김대중-김영삼 야당 후보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군부정권이 집권합니다. 김대중과 평화민주당은 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김대중 책임론과 정계은퇴 요구 등 긴박한 상황에서 1988년 2월 김추위에 참여했던 故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 박사를 대표로 한 98명의 재야인사들이 평화민주당에 입당합니다. 김한정은 학생운동대표 자격으로 입당합니다.

평화민주당은 재야인사의 입당에 힘입어 1988년 총선에서 승리해 제1야당이 됩니다. 김한정은 총선 후 평화민주당 내 재야파모임인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총무국장을 맡습니다. 그해 11월 전라북도 정읍 출신의 서울대 동창생 박정희와 백년가약을 맺습니다.

김한정은 경상도 출신 동계동계 직계 막내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게 됩니다. 1989~1992년 김대중 총재의 공보비서로 연설문 작성, 언론분석, 홍보기획 및 전략 등 미디어 관련 업무를 담당합니다.

199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대선기획단 핵심멤버로 활동하며 김대중 후보의 연설문, 홍보기획, TV유세, 미디어전략 등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대선에서 패배한 뒤 영국으로 갔다가 1993년 7월 귀국합니다.

귀국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 설립해 평화문제, 아시아 민주화에 전념합니다. 김한정은 아태평화재단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1993~1997년까지 미국 럿거스대학교 정치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와 대통령 선거가 겹친 상황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귀국합니다. 김대중 후보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룹니다. 김한정은 1998년~1999년 국가안전기획부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해외업무를 담당했고,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 설립한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사무부총장을 맡아 해외 인권단체와 연계해 아웅산 수지 여사 석방운동, 동티모르 독립 지원활동 등을 전개합니다.

1999년 12월 청와대 제1부속실장에 임명되어 김대중 대통령 퇴임까지 3년 반 동안 부속실장으로 지근거리에서 보좌합니다.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1급비서관으로 대통령의 눈과 귀, 손발이 되어 보좌하는 역할을 합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김한정은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인 2003년 2월 김대중 대통령 퇴임 후 활동을 준비합니다. 아태재단을 해산하고 재단건물을 연세대에 기증한 뒤 김대중대통령도서관으로 전환해 김 전 대통령의 활동과 업적 연구 등의 활동을 하도록 합니다. 

2005년 코넬대 동아시아센터 초청연구원으로 연구생활 했습니다.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국민의 정부에서 함께했던 분들을 설득해 ‘행동하는 양심’ 창립, 김대중 대통령의 저서와 정책 중심으로 토론 및 일반인 대상 강좌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0년 경원대 정치학과(국제정치학) 교수로 강단에 섰고, 환경재단 기획위원 겸 그린에너지협력위원장을 맡아 핵발전 의존도를 낮추고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전환 정책을 연구, 공론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북구, 미주의 인도주의단체와 협력해 북한의 병원, 탁아소, 학교 등에 태양광과 풍력을 접목시킨 소형발전소 보급 사업도 추진 중입니다.

야권통합운동인 ‘혁신과 통합’ 각계대표 105인 제안자로 참여하고, 2011년 10.26 서울시장 재선거에서 박원순 후보 정책특보로 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