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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朴孝瑨/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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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성리학을 근본으로 유교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왕정은 중앙집권 관료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로 불리는 기성 관료 집단을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하면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붕당이 발생해 항구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붕당정치로 조정 내에서는 당쟁(黨爭)이 격화되었으며, 16~17C에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두 번의 난을 겪으면서 사회적·정치적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급격한 인구감소가 일어났으며, 전쟁자금 조달을 위하여 관직을 매매해 신분제도가 불안해졌다. 국토는 황폐화 되어 경작지가 1/3로 줄어들어 세금의 수금 문제가 생겼으며, 조선왕조실록 사고가 불에 타 많은 기록물들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는 국가의 물질적·문화적 황폐화라는 국가적 재난을 떠안게 되었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강력한 통치권을 가진 왕이 필요하게 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숙종이 붕당정치를 약화시키고자 탕평책(蕩平策)을 제기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영조가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완론탕평을 시행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당파경쟁을 없애고자 하였으며, 이는 정조대에 이르러 준론탕평으로 발전하였다. 정조 시대에 왕권강화를 위하여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인 규장각 설치 및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을 만들었으며, 수원 화성건설 등을 하였다.

정조 시대에 피폐해진 사회를 시정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이 시작되었다. 이를 가능할 수 있게 한 것은 실학사상이었다. 17C 중엽부터 나타난 실학사상은 당시 이론에 치우친 성리학을 비판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학,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였다. 또한 실학은 18세기에도 융성하여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양에서도 발전하여 문화의 황금기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왕권 강화를 통해 다양한 궁중의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궁중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보여주는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데, 이중 국연(國宴)은 악(樂)·가(歌)·무(舞)를 포함한 것으로 당시 궁중 음악과 정재(呈才)의 집약체이라 할 수 있다. 국연의 악무를 비롯해 모든 준비과정 사후처리까지 정리·기록한 것이 의궤(儀軌)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의궤가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의궤는 정조대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기점으로 체제와 내용 구성에 차이를 보인다. 즉 영조(英祖)때까지의 의궤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국연의 준비과정을 중심으로 기록한데 비하여, 정조(正祖) 이후의 의궤는 체제가 고정되고, 국연의 준비과정과 사후 조치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자료를 담고 있다. 따라서 많은 문제에서 시작한 시대이지만 문화중흥기라고 불릴 만한 시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