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전준현/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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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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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1931 인물 : 신분 : 비밀연락원 시대적 배경 우계 전진원은 옥천전씨로 전순일과 해주 최씨 사이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순 서울 토박이었다. 키가 크고 눈이 동그런 담력의 사나이었다. 그는 구문학과 신문학을 함께 공부하였으며 성품이 워낙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그는 진취적인 생각을 품어 당시 외세도전의 혼란스러운 격동기를 헤쳐 나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굳히게 되었다. 그는 20세가 되던 1905년경 대한제국 정부관리로 공채되어 임시 군용철도감부철도 이원(吏員)양성소의 제2생으로 졸업했다. 그 후 그는 철도원으로 각 역의 역무와 열차의 승무원으로 26년동안 철도인으로서의 긍지 속에서 청렴결백하게 살아왔다. 전진원은 1930년 조선총독부 철도국 대전열차구에서 판임관(서기4급)으로 퇴임하고 민간철도회사인 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가 1931년 2월 8일 열차충돌사고로 46세에 순직한 외곬 숨은 애국지사였다. 세부 사항 1919년 3.1혁명을 계기로 그해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는 이동녕 등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민주공화제가 시작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의 요원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한 제반 정책과 국내외를 총괄할 수 있는 비밀조직으로서 연통제와 교통국을 국내외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한편, 1919년 중반 이종욱이 서울에서 연통제 국내 본부를 조직하면서 대동단, 청년외교단 등과 접촉할 때 상해 임정과 다양한 연락선을 활용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철도 기관사 전진원이었다. 전진원은 만주로부터 경의선 철도 기관차를 직접 운전하던 역무원으로 청년외교단원인 동시에 비밀교통국의 연락원이었다. 그는 1919년 중반경 임정의 교통국이 설치된 만주 이륭양행에 도착한 임정의 각종 비밀문서, 자료, 물품 등을 서울 만리동에 살고 있던 이종욱에게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동삼성 안동에는 영국인 죠오지 쇼가 경영하는 이륭양행이 있었는데 이곳은 바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지역을 연결시켜 중계하는 연통제와 교통국의 중요한 연락을 이한 비밀연락 장소였다. 국내로부터 안동역에 도착한 전진원은 죠오지 쇼를 만나서 지령을 받는 것 외에도 봉천에서 살고 있던 우응규와도 비밀리에 교류하면서 수거된 정보자료를 국내로 들여오고 국내에서의 정보 등은 다시 안동으로 반출하는 등 연통제의 연락원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국가와 민족의 독립과 장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위함을 돌보지 않았다. 전진원이 경의철도 기관차를 직접 몰고 서울에 들어온 뒤 예정된 시간에 서강이나 동막(마포) 철도변을 통과하면서 서류뭉치를 던지면 그 가족이 주워서 이종욱 등 청년외교단원에게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이종욱은 전진원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시요, 전동지는 어디까지나 철도원이지 임정의 연통제 비밀련락원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왕래하시요, 누가 미행하거나 낌새를 채지 않게 완벽하게 위장해야 하오” 이 사실은 이종욱이 작고하기 전에 친필로 동지였던 전진원의 자제 전병각에게 증언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이종욱이 체포, 마포형무소에 수감 복역할 때 여가를 이용 전진원이 그 형무소로 면회를 가면 서로 눈물로만 신호하고 해후했다는 것이다. 이종욱이 전진원으로부터 문서를 전달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기에 전진원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지역에서는 6~7개 이상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거나 될 단계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13도 대표가 모여 조직하였던 한성임시정부의 창단멤버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 전진원이었다. 그해 3월 20일경에 이규갑, 한남수 등은 인천 월미도의 만국공원에서 회합을 가진 뒤 이승만을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추대하였다. 당시 주안역에서 철도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전진원은 그 주변지리에 밝고 그 지역 주민들과의 친분으로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였으므로 한성임시정부 조직에서 실질적인 연락책임을 맡에 되었다. 이러한 역사사실이 이종욱이 전진원의 독립투쟁을 위한 활약상을 만년에 털어 놓음으로써 숨겨졌던 전진원의 애국사실이 오랜만에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사실들은 1967년 이종욱이 전진원의 장남인 전병각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그에 대한 사실과 생각을 적음으로써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이종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관으로 전진원과 함께 청년외교단원의 한 사람으로 조국의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조직의 서울지역 책임자로서 전진원이 연략하여 준 각종 기밀자료와 무기류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던 스님 투사였다. 이종욱 대종사(조계종 총무원장, 제2대 국회위원 역임)는 전진원의 큰 자제인 전병각에게 띄운 서신에서 ‘당시 상해 임정에서 국내로 보내는 일체 서류를 임정에서 안동현 이륭양행으로 보내면 선춘부장(전진원)께서 그 양행에 직접 가셔서 찾아 가지고 온다. 서울에 은밀히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가 즉시 만리재댁(전진원의 집)에 가서 주위를 살피면서 찾아다가 항일투쟁에 활용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이어 이종욱은 ‘선춘부장은 이런 일 외에도 한성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철도원으로서 인천 지리에 밝고 의협심이 있어 이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임정 수립에도 기여하였다. 나와 같이 청년외교단원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외교원을 파견할 목표하에 조용주, 연병호, 송세호, 안재홍, 선춘부장 등이 힘을 모아 이 투쟁에 앞장 섰다’고 하는 회고하였다. 또 그는 이어 ‘표시가 분명한 동삼성 철도회사의 제복을 입은 채 생사를 건 일들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늠름히 해냈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고 하면서 전진원의 인품을 곁들어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3.1운동후 상해 임정은 항일 독립투쟁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위친왕을 모실 계획도 짜고 있었다. 그때 전진원이 승무하는 열차를 의친왕이 탔으면 분명히 압록강을 무사히 넘어 안동을 거쳐 상해까지 갈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친왕이 세검정에서 하루 더 유숙하므로 인해 전진원의 근무하던 열차를 놓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음 열차에 승차했던 의친왕은 신의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 점도 이종욱의 회고 가운데에 나타나 있다. 경의선으 일산역이나 경인선의 축현역의 역무로 근무할 당시 인근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나 관리들의 한국인 주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하였으므로 그는 항상 업무가 비번일 때에는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대변자가 되어 일본인의 언동을 규탄하곤 하였다. 이의 퇴치책으로 전진원은 월급이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사채를 털어 사설강습소를 운영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 깨우쳐야 자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박대받고 있던 서울 경기 인천지역의 청소년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교육계몽사업의 실천은 민족과 조국에 대한 투철한 정신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진원의 독립투쟁은 일거일동이 대담무쌍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국독립에 대한 예견력은 철도원으로 위장한 전진원이 남다른 자신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항일 독립투쟁에 관한 임무를 계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그 당시 전진원은 철도공무원으로서 고급 관리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위치를 이용한 친.인척의 취직이나 이권에 대한 청탁 등을 일체 수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직하고 청렴한 인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철도원인 우계 전진원은 경의선 열차 소화물 담당 책임자로서 근무하며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하여 열차의 공무연락임을 가장하여 동삼성으로부터 국내지역으로 반입되는 물품 속에 무기와 기밀서류를 물래 들여와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애국지사 전진원의 구국활동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아 국가의 독립유공자로서 아직까지 포상 받지 못하고 있다.

참고 문헌 이현희,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동방도서, 1987. 이현희. 《한국근현대인물사》, 새문사, 1993. 김정의, 〈전진원〉, 《근현대사강좌》제2호, 1993. 섬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