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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金益達, 경상북도 상주군, 1916년 5월 9일 ~ 1985년 11월 2일)은 대한민국언론인이자 출판인이다. 호는 학원(學園)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소년기[편집]

김익달은 1916년 5월 9일 경상북도 상주군 화서면 중문리에서 김응원을 아버지로, 김안동을 어머니로 하여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빈농의 집안이었던 탓에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몸에 밴 검소한 생활 태도는 그의 일생을 통해 나타난 근검ㆍ절약의 생활 철학으로 발전한다.

일제 치하 농촌의 생활, 그것도 빈농의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김익달이었지만, 늘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생활 태도를 가진 소년이었다. 특히 자신이 마음먹은 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꼭 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많은 식구를 부양해야 했던 부친 김응원은 상주에서의 농삿일을 정리하여 김익달이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대구로 나와 조그마한 쌀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대구에서의 생활도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당시 대구 해성보통학교(현재의 대구 효성초등학교에 다니던 소년 김익달은 늘 학비 걱정의 고통을 참으며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이때 만난 담임선생의 따뜻한 가르침은 소년 김익달을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나눌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 주었다. 이러한 마음은 훗날 김익달의 근본 철학인 '나라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해성보통학교 시절 소년 김익달은 훗날 평생 출판 동지의 한 사람이 된 김상문(동아출판사 창립자 및 전 회장, 상문출판사 회장)을 만난다. 김익달과 보통학교 동기동창이자, 한 반에서 같이 졸업했던 김상문은 소년 김익달을 "사람을 잘 다스리는 남다른 심성이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소년 김익달에게 생활고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힘을 길러 자립하는 길이며, 그것은 곧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인들에게 이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청년기와 일본 유학[편집]

보통학교를 마친 소년 김익달은 자립하는 방법으로 일본행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일본행은 그의 졸업반 담임선생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즉 '일본을 이기는 길은 곧 일본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는 가르침이 소년 김익달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에 오른 소년 김익달은 '주먹을 불끈 쥐고 꼭 성공해야만 돌아오겠다.'고 울부짖으며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격적인 '고학'이라는 더욱 큰 시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친분이 있었던 몇몇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도쿄의 한 서점의 점원으로 일자리를 구한 김익달은 타고난 성실성과 근면함으로 인해 금방 주인의 눈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일본에서의 생활은 힘든 만큼 소년 김익달에게는 값진 경험이었고, 그 경험들은 후에 그가 출판인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서점에서 받는 급료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게 된 소년 김익달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여 중ㆍ고등학교 과정을 비롯, 대학의 일부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객지에서 고학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김익달은 놀랍게도 그 속에서 '고통을 이겨 낸 사람만이 진실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값진 인생 철학을 터득한다. 이것은 후에 그가 학원장학재단을 설립하는 직접적인 동기로 발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맞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참다운 인생'이라는 진리를 산 경험 속에서 발견한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고학 시절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결과로 얻어낸 귀중한 승리였다고 하겠다.

이렇듯 어려운 객지 생활 중에도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참으로 지극했다. 서점일로 버는 돈으로는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고,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 당시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었던 아르바이트를 통해 버는 돈은 고스란히 모아 매달 대구에 있던 부모에게 생활비로 부쳐 주었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서점 주인은 그에게 서점 경영에 관한 업무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김익달을 자신의 사업의 동반자쯤으로 키울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년으로 성장한 김익달은 한국에서의 서점 경영의 꿈을 안고 1935년 대구로 돌아온다. 그 해 청년 김익달은 대구 동성로에 '춘강당(春江堂)'이란 간판을 걸고 서점을 차린다. 물론 일본에서의 서점 경험이 밑거름 되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에서의 서점 경험은 일본에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김익달의 첫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20세의 나이에 맛본 쓰라린 경험이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청년 김익달은 운명에 굴하지 않았다.

오랜 고향 친구의 권유로 만주행을 결심한 김익달은 또 다른 운명을 향해 일어섰다. 당시 만주는 중국인을 비롯, 한국인, 일본인, 소련인, 서양인들이 모여들어 한창 개발이 벌어지던 때라 사업을 벌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 김익달이 만주에서 어떤 사업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잠시 다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귀국과 결혼[편집]

만주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1세에 대구로 돌아온 청년 김익달은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만주에서의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해 병까지 얻은 청년 김익달은 전생애에 걸쳐 가장 심한 좌절 속에 빠져 있었다. 죽음까지 생각했다는 대구에서의 몇 달 간은 청년 김익달을 더욱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 자신이 스스로 이겨 낸 결과이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한 번 더 일어서 보자.'고 결심한 청년 김익달은 폐결핵을 고치는 방법으로 해주행을 택하게 된다.

당시 해주에는 그의 여동생이 황해도 도청 회계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도청 일로 알게 된 해주종합병원에 다리를 놓아 오빠인 김익달의 병을 고쳐 보려는 심산이었다.

동생의 권유로 해주로 온 청년 김익달은 해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해주항에 있던 해주종합병원 분원의 병원 서무로 취직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택한 당시로서는 유일한 길이었다.

병원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병원 업무를 거들며 꾸준히 치료를 해 나갔다. 타고난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병원장의 신임을 얻게 된 청년 김익달은 얼마 안 가 병원장의 비서로 발탁된다.

병원장은 청년 김익달을 양아들처럼 생각하며 병원 행정을 모두 맡겼고, 정성을 다해 폐결핵을 치료해 주었다. 그 덕에 청년 김익달은 병을 고칠 수 있었고,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청년 김익달은 이곳에서 일생의 반려자가 된 하성련 여사를 만난다. 하성련 여사는 당시 김익달의 동생과 같은 직장인 황해도 도청 농촌진흥과에 타이프라이터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성련 여사의 고향도 대구였던 탓에 김익달의 동생과 동향이라는 동류의식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던 그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성련 여사는 당시 김익달을 '미남형에 패기에 가득 찬 자신만만한 청년이었다.'고 기억하며, "해주항이 들어선 용당포는 퍽 아름다운 항구였지요. 우리는 서해의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며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분은 한밤중에도 불현듯 찾아와서는 '얼굴을 보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열적인 청년이었지요."라고 회고한다.

청년 김익달은 하성련 여사와 1941년 1월 22일 해주시에서 결혼을 한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해주에서의 생활과 수안으로의 도피[편집]

병도 고치고 일생의 반려자를 찾은 청년 김익달은 한동안 접어두었던 출판에의 꿈을 다시 펼치기 시작한다.

해주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청년 김익달은 시내 중심가에 '낙동서관(洛東書舘)'이란 서점을 차린다. 고향의 낙동강을 생각하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대구에서의 실패이후 7년여 만의 일이다.

낙동서관은 대구에서의 실패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번창했다. 식민지 말기였던 당시 한국은 출판이란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출판물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서점들은 거의가 다 헌책을 위주로 한 책방이었다. 청년 김익달의 낙동서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쌓은 서점 경영에 대한 지식을 한껏 발휘하여 훌륭히 책방을 키워 나갔다.

특히 그는 징용 나가는 일본인들이 내놓은 책 중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끌어 모으는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김익달의 낙동서관은 날로 번창하여 해주 일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큰 서점으로 발전하였다. 서점 경영으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의 생애 처음으로 신문 사업에 손을 댄다. 나중에 수안에서 만난 박상련(원효연구소 대표, 소설가 박태순 씨의 부친)도 회고하듯이 김익달은 출판보다는 신문 쪽에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꿈은 그가 60년대 들어서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일간 신문인 《새나라신문》이나, 그 이후의 《독서신문》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낙동서관과 함께 《해주일보》 지국을 경영하면서 신문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한다. 당시 김익달이 경영한 《해주일보》 지국은 영업과 취재를 겸한 형태의 사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도 잠시뿐, 일본제국주의는 청년 김익달에게 또 다른 고난을 던진다. 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서 패전으로 몰리던 일본한국인들을 징용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청년 김익달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일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청년 김익달은 징용이 무엇인지, 더구나 한국인징용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난관을 꼭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수안으로의 은둔이었다. 황해도에서 곡산과 함께 가장 험준한 산골로 꼽히는 수안은 광산촌이었다. 수안에서 해방될 때까지 1년여의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 김익달은 여기서 자신의 출판 인생의 주춧돌이 되는 출판 동지 중 한 사람인 박상련을 만난다. 김익달의 첫 출판 사업인 대양출판사 시절 부사장을 지내게 되는 박상련은 청년 김익달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상대편의 눈치를 볼지언정 함부로 말하기를 꺼리던 당시의 극한 상황에서 초면부지의 두 젊은이-김 선생은 20대 중반이었고 나는 20대 초반-는 나름대로의 짚이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둘은 서로 눈인사를 하면서 금세 십년지기처럼 돼 버렸다. 우리 둘 사이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부인 하성련 여사의 화사한 웃음이 봇물을 터놓듯 서로 가슴을 여는 촉매가 되지 않았는지……."

김익달의 수안 생활은 출판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다지는 소중한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박상련 씨의 회고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김익달은 이곳 수안에서 9만리의 꿈을 가꾼 것이었다. 그 꿈은 붕(鵬)의 잔등이 만큼이나 광활했으며, 그 날개처럼 무서운 작용을 할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첩첩산중에서의 조용한 대화에서도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중략)…… 그는 즐겨 말하기를 사람들의 귀가 열리고 눈을 뜨게 하는 일 이상으로 우리에게 시급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의중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김익달은 첫 아들 영수(현 민주일보ㆍ학원사 사장)를 얻는다. 국난을 피해 은둔하면서 거둔 삶의 기쁨이었다. 이때를 부인 하성련 여사는 "운둔 생활이라 생활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 시름을 한꺼번에 잊을 수 있다는 듯 그분은 기뻐했지요."라고 회고한다.

수안에서 해방을 맞은 김익달은 그동안 숨어서 가다듬어 온 출판에의 꿈을 펼치기 위해 고향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수안은 그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즉 평생의 운명을 결정지어 준 출판과 신문에 대한 꿈을 잉태한 것과, 그 꿈을 오늘의 《민주일보》라는 신문 사업으로 연결시켜 준 첫아들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했던지는 그가 수안을 떠나면서 박상련 씨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박 선생, 수안에서의 한 해는 영영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그동안 타관살이 같지 않게 여러 모로 보살펴 주셔서 더더구나 고맙구요. 일단 고향으로 갑니다만, 부디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 수안에서 그토록 이야기하던 우리들의 시대를 우리가 껴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복 이후 대양출판사의 설립[편집]

해주로 돌아온 김익달은 해방을 맞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서둘러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길을 재촉한다. 당시 해주의 점령군이었던 소련군의 눈을 피해 38선을 넘은 것이 1945년 8월이었다. 김익달이 수안에서 나와 해주를 거쳐 월남하기까지의 시간이 불과 한 달여 남짓이었던 것으로 볼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제 나의 시대가 왔다. 내 뜻대로 출판을 해서, 이 나라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 놓겠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38선을 넘은 김익달은 곧 대구로 내려와 구체적인 출판 사업에 발을 내딛게 된다.

해방 바로 뒤끝이라 세상이 몹시 어수선했다. 대구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니던 시절이었다. 김익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해주에서 서점 운영으로 성공을 맛보긴 했지만, 1년 간의 수안 은둔생활 끝에 해방을 맞고 대구로 내려온 김익달의 수중에는 사업을 펼칠 만한 자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넘쳐 있었다고 한다.

김익달이 대구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출판 사업은 책과 신문 등을 거리에 펼쳐 놓고 파는 노점이었다. 이처럼 김익달의 본격 출판 사업은 출판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같은 노점으로 출판을 시작한 김원대(현 계몽사 회장)는 김익달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지금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자그마한 키에 두 눈은 맑게 빛났으며 결단성이 있고 매우 능동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첫눈에도 앞으로 무엇인가 큰일을 해 낼 사람처럼 여겨졌다."

노점상으로 어느 정도 자금을 모으게 된 김익달은 대구 중앙로에 위치한 삼중정백화점 터에 '대양출판사(大洋出版社)'란 이름으로 본격 출판 사업을 시작한다. 해주에서 차렸던 낙동서관이 낙동강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라면 낙동강이 흘러가는 곳은 곧 '대양'이 아니겠느냐 하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시작된 대양출판사는 그 이후 서울의 대양출판사-학원사로 이어지면서 김 선생을 한국 출판의 제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모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한 대양출판사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고 부인 하성련 여사는 말한다.

"말이 출판사였지 형편없었어요. 바라크를 이어 만든 서너 평 판잣집을 지어 반은 생활 터전으로 썼고, 나머지 반에다 출판사를 차리고 출판을 시작한 것이죠."

이때 김익달은 자신이 직접 등사기로 만든 유행가요집 프린트 본을 대양출판사란 이름으로 찍어서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출판물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김대원은 회고한다.

"단순히 가사와 악보만을 실은 것이 아니라 화가 박종유 씨로 하여금 삽화를 적절히 그려 넣게 했다. 당시만 해도 이것은 기발한 착상이었다. 김 선생이 정성을 쏟은 대가로 이 첫 출판물은 놀라운 판매고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게 된 대양출판사는 당시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사조(思潮)》의 총판을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대구에서의 사업으로 자금을 모은 김익달은 곧바로 서울로 진출한다. 을지로4가로 자리를 옮긴 대양출판사의 첫 출판물은 《명심보감》, 《시조 5백수》를 비롯하여 《열차시간표》등으로 보다 대중적인 출판을 시도했다.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시기에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몸소 체험을 통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김익달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띄우는 친근한 메시지로 '우리 것 찾기', '새 시대 익히기'의 지침서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고 한다.

'대양'이라는 이름이 독자들 사이에 점차로 알려지기 시작하자, 김익달은 전국 중학교 입시 문제집인 《지능고사》를 펴내게 된다. 《지능고사》는 김익달의 예상대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13만 부라는 판매고를 기록할 정도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김익달의 출판의 목적은 처음부터 돈을 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원하는 좋은 출판물을 내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가 두 번째로 구상한 것은 우리나라 학습물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간추린》 시리즈였다. 당시로서 순 우리말인 '간추리다'에서 나온 말을 제목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놀라운 발상인 동시에 일대 혁신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김 선생이 독자의 편에 서서 내린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즉, 이 출판물의 대상은 중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알맞는 제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학원사가 현재로까지 성장하면서 한글 전용에 앞장 선 출판·언론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김익달이 간추린이란 순 우리말을 선택한 데는 나라 사랑이라는 깊고 큰 뜻이 숨겨져 있다.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일깨워 나라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거창한 구호를 내세워 외치지 않으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실천해 낸 것이다.

김익달의 이러한 생각은 간추린 시리즈의 첫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익달이 이 학습물 시리즈를 통해 제일 먼저 출판한 것은 《간추린 한국 지리》, 《간추린 생물》, 《간추린 물상》등 3종으로 모두 과학에 관한 책을 우선적으로 내놓았다. 학습물 하면 으레 국어, 영어, 수학 등을 먼저 내놓아야만 장사가 되는 법인데, 김익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우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알아야 하며, 이 땅에 더불어 사는 생명체를 알아야 하며, 그것에 기초하여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앞으로 올 세계는 과학이 선도하는 사회이어야 하며, 그것도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알맞는 합리적 사고가 주해야만 나라가 진실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양출판사의 《간추린》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각 지방의 총판들이 책을 찍어내기가 무섭게 앞다투어 사 갔다고 한다.

생애 중반[편집]

잡지 학원의 창간과 학원사의 설립[편집]

'대양'이란 깃발을 내걸고 시작한 김익달의 출판 항해가 첫 번째 닻을 내린 곳은 《학원(學園)》이라는 청소년 잡지였다.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있던 1952년 11월대구에서 창간된 《학원》은 우리나라 본격 잡지 문화의 서장을 여는 고리였다. 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 게 될지 몰라 대구로 피난 온 서울 출판업자들이 감히 출판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시절, 김익달은 이 혼돈된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터전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학원》 창간 때부터 김익달과 친교를 맺어 40여 년 간 가장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소설가 정비석은 김익달을 만난 첫인상에 대해 "시국을 초월한 선구적인 결단에 우선 감탄했다."고 말하면서 《학원》 창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선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출판 같은 것은 누구도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그 때에 김 선생은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 나갈 청소년 학생들에게 인생의 등불이 되어 주기 위해 《학원》이라는 잡지를 간행하기로 결심했다니, 그 얼마나 원대한 포부인가. 어떤 철인은 80노령에 나무를 심으면서 '지구가 비록 내일로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는다.'고 말한 일이 있거니와 비록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장래를 위해 《학원》을 발간하기로 결심했다는 김 선생의 결심을 듣고 나는 위대한 철인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학원》이 나올 당시 우리나라에는 잡지라는 것은 한 권도 없다시피했다. 몇몇 잡지가 있긴 있었으나 그나마 전쟁 때문에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학원》은 나오면서부터 독자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당시 학생으로서 《학원》을 읽지 않은 사람은 학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고 하니 《학원》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따라서《학원》은 당시 청소년들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정신적인 등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4대 《학원》 편집장을 지낸 바 있는 최덕교(현 창조사 사장)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학원》은 한때 거의 십만 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이러한 부수는 엄청난 것이다. 그 무렵 국내 최대 일간지 편집국장이 자기네 신문이 5만 부를 넘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학원》의 판매고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학원》의 인기를 말해 주는 일화는 많은데 그 중 김익달이 생전에 말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4년에는 서점과의 할인율 문제로 이견이 생겨 전국의 서점이 단합하여 《학원》 취급을 보이콧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전 직원을 동원하여 서울역광화문 등 요지에다 잡지를 수천 권씩 쌓아 놓고 가판을 했는데 학생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 가자 서점들은 삼 일도 못 돼서 손을 들었다."

또한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유경환(조선일보 논설위원)은 당시 경복고에 재학 중이었는데 "《학원》이 나오는 날은 조퇴를 한 채 서점으로 달려갔다."고 회고한다. 당시 서울의 몇몇 학교에서는 《학원》이 1천 권씩 매진되어 판매라기보다는 배급에 가까웠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청소년들에게 《학원》은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필담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 내 공감대를 넓혀 갔다.

이렇듯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낸《학원》은 전란의 폐허 속에서 한 세대를 건강하게 일궈 낸 셈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에게는 죄스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도 《학원》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고 회고하는 진덕규(이화여대 교수)는 스스로를 《학원》이 만들어 준 학원 세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 세대는 참 행복했던 것만 같다. 아마도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학원》이라는 우리들 잡지 때문이라 해도 지나침은 아닐 것 같다. 《학원》,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전쟁터의 소년소녀들이었지만 꿈을 키울 수가 있었다. 《학원》이 있었기 때문에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고, 저 멀리 떨어진 세계를 바라보면서 가까이 있지 않은 낯 모르는 친구에게도 만나고 싶다는 충동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학원》은 창간 때부터 독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10만에 가까운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돈을 벌어 주는 잡지는 아니었다. 즉 한 번도 회사 측에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는 출판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익달은 자신의 출판 의지를 《학원》을 통해 유감없이 펼쳤다고 생전에 늘 얘기했다.

이러한 김익달의 생각은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 기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값이 싸고 좋은 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그때의 내 생각이었습니다. 카레멜이나 소비품 광고를 아예 싣지 않았지요. 소비품 광고를 싣자는 광고주에게 당시의 통상 광고비의 20배 이상을 내서 엄청난 이득이나 올려 준다면 몰라도 돈 없는 아이들에게 과자나 값비싼 학용품을 사라고 권하는 광고는 실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지요."

김익달은 《학원》을 발간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보다 실질적인 지원 제도를 마련하는데, 그것은 창간 기념 사업으로 벌인 학원장학사업과 창간 1주년 기념 사업으로 벌인 학원문학상이다. 학원장학사업이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여건을 뒷받침해 주는 물질적 지원 제도였다면, 학원문학상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정신적 지원 제도였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민간장학사업, '학원장학회'[편집]

여유가 있어 남을 돕는 것은 생색을 내기 위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 자기 것을 쪼개어 주는 일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참 도움의 방법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나눔은 곧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가 고파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 보석을 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겐 허기를 이길 수 있는 밥을 주어야만 진정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학원장학제도이다. 김익달 자신이 학창시절 뼈저리게 느꼈던 가난, 그 굴레의 무게를 덜어 주는 일을 그는 '학원장학회(學園奬學會)'를 통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김익달은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를 통해 학원장학회를 만든 직접적인 동기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피난지에서 장사를 해 가며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결심했습니다. 노변이나 천막 교실에서 공부하는 그들을 보니 어려서 보리죽도 제대로 못 먹고 고학을 하던 저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가 새삼스러워지고 뼈가 아파옵디다."

따라서 학원장학제도는 선발 방법이나 지원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선발 방법은 성적이 우수하고 높은 덕성을 갖춘 모범생으로서 가정이 극빈하여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중학생들을 전국 각지에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에서 시험으로 가려 뽑는다. 이때 시골에서 오는 학생에겐 왕복 여비, 숙박비, 잡비 등까지 지급할 정도로 자상한 배려를 했다.

이렇게 해서 뽑힌 장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대학 4년 과정까지 (의대인 경우 6년) 학비를 전액 지불해주었다.

김익달은 이들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때마다 꼭 세 마디씩의 다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첫째 건강할 것, 둘째 국가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이 되지 말 것, 셋째 농촌을 잊지 말 것 등이었다.

김익달의 학원장학회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그는 출판계의 거목으로 불릴 정도로 평생 동안 3천여 종에 달하는 무수한 출판물을 기획하고 생산해 내면서 한국 출판계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족적을 남겼지만, 그보다 더 큰일은 학원장학회를 통해 우리 사회에 심어 놓은 인재의 씨앗이었다.

그 때문인지 김 선생이 출판 일선에서 물러나면서도 끝까지 지킨 것은 학원장학회 사업이었다. 따라서 장학 사업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도 중단하지 않았다. 더구나 여유가 많아 시작한 장학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곤란을 겪어 내야 했다. 심지어 학원사 직원들의 봉급까지 늦춰가며 장학금을 지급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한때 학원장학재단에 관여한 적이 있는 소설가 정비석은 "사업을 하다 보면 경제 사정이 곤란할 때가 누구든지 있게 마련인 법이다. 학원사도 그런 경우가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 그런 경우는 수많은 장학생들의 장학금을 일시에 지불하기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 선생은 막대한 장학금을 단 하루도 기일을 늦추지 않기 위해 시중에서 높은 이자돈을 얻어 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고 회고한다.

1953년 2월 제1기 장학생 12명을 뽑은 학원장학회는 1985년 김익달이 별세한 후에도 큰아들인 김영수 씨가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을 계속 이어오다, 2005년 밀알장학재단과 통합하여 현재의 학원밀알장학재단(學園밀알奬學財團)에 이르고 있다.

밀알장학재단은 학원장학생 출신들이 '김익달 선생의 숭고한 은덕을 미약하나마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1997년 설립한 재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