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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독일제4대 총리
임기 1969년 10월 21일~1974년 5월 7일
대통령 구스타프 하이네만

신상정보
출생일 1930년 4월 3일
출생지 독일의 기 독일 뤼벡
사망일 1992년 10월 8일
사망지 독일의 기 독일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종교 독일 개신교회

빌리 브란트(독일어: Willy Brandt, 1913년 12월 18일 - 1992년 10월 8일)는 독일연방공화국(당시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이다. 원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독일어: Herbert Ernst Karl Frahm)이었으나, 망명시절에 개명하였다.

나치 독재정권시절 노르웨이스웨덴에서 히틀러정권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 1949년 9월에 귀환하였으며, 1961년부터 1969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 서베를린의 시장을 역임했다. 제4대 연방총리로 재임하는 기간(1969~1974)동안, 과거 중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동방 정책을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다.

빌리 브란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1971년폴란드수도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 사건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그가 당시 진보-개혁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의장이자 그 자신이 나치 독재의 피해를 입은 망명자로서 (그의 표현을 빌려)'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사적 책임, 즉 독일을 1, 2차대전 전범 국가의 오명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복권시켜야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폴란드 국민들은 서독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고, 일각에서는 브란트 총리의 폴란드 방문 소식에 대해 나치 시절 점령했던 곳을 되돌려받으러 오는게 아니냐며 맹비난을 했었다. 그러나 브란트 총리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은채 고개를 숙인 것을 TV 생중계로 지켜본 폴란드 국민들은 서독에 대해 나쁜 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1974년,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인 것으로 드러나 수상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사퇴 후에도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의장으로 꾸준히 활약하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 등을 본 브란트는 1992년 10월 8일 에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생애초기[편집]

틀:미완성

1913년 뤼벡에서 태어났다. 사생아인 어머니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나 외할아버지 후견 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작 그의 외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로 알려지고 아버지 역할을 해준 '루트비히 하인리히 카를 프람'은 1875년 아릅스하겐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메클렌부르크의 한 영지에서 농노로 일했고 거기서 막드 빌헬미네 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빌헬미네는 사생아 마르타를 낳아 이미 키우고 있었다. 이 마르타를 데리고 프람에게 시집을 왔다. 그래서 프람은 젊은 나이에 마르타의 계부가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마르타가 또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곧 빌리 브란트였다. 루트비히 프람은 이 마르타의 사생아를 위해서도 후견인이 되어 브란트의 아버지 역할을 해주게 된 것이다. 브란트의 본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었다. 어린시절 브란트는 어머니 마르타와 외할아버지에 해당되는 루트비히 프람을 아버지로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계 입문과 나치스 정권 치하[편집]


망명 생활[편집]

귀국과 정치활동[편집]

수상 재임시[편집]

외교정책[편집]

국내정책[편집]

퇴임이후[편집]

말년[편집]

사후[편집]

평가와 비판[편집]

평가[편집]

비판[편집]


기타[편집]

간첩 의혹 논란[편집]

일화[편집]

연보[편집]

주석[편집]

  1. 이전까지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이었다.
  2. 당시 그가 포로로 잡혔을 당시 독일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 게오르크 키징거와 연립내각 체제 시기를 말한다.

바깥 링크[편집]

전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제4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후임
헬무트 슈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