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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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권씨
懿嬪 權氏
조선 태종의 후궁
이름
이칭 권궁주(權宮主)
별호 정의궁주(貞懿宮主)
신상정보
출생일 1384년
사망일 미상 (1457년 이후)
가문 안동 권씨
부친 권홍
모친 경주 이씨
배우자 태종
자녀 정혜옹주

의빈 권씨(懿嬪 權氏, 1384년[1]~ ? ) 또는 정의궁주(貞懿宮主)는 조선 태종의 후궁이자 정혜옹주의 생모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을 양육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384년(우왕 10년), 성균관 악정 권홍(權弘)과 아내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계는 고려말 권문세족과 혼인관계를 맺어 큰 세력을 형성한 안동 권씨 집안의 후손으로, 증조모인 조씨는 조인규의 손녀이며, 어머니 이씨는 고려의 성리학자인 이제현의 증손녀이기도 하다.

입궁과 후궁 책봉[편집]

1402년(태종 2년) 태종이 후궁 제도를 법제화하여 맞아들인 첫번째 후궁이다.[2] 태종은 원경왕후의 투기가 심한것을 비판하며, 역대 제왕들의 비빈의 숫자와 빈첩의 제도를 상고하게 하였고, 새로운 간택 후궁을 맞이하기로 결정한다.[3]

태종은 사대부가 출신의 권씨를 후궁으로 맞이하면서 왕비나 세자빈에 준하는 가례를 준비하게 했는데[2], 이를 안 원경왕후가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자 태종은 가례를 취소하였다.[4]

태종은 권씨를 정의궁주(貞懿宮主)로 봉하고, 권씨를 위해 대궐 북쪽에 연못을 파고 누각을 지어주었다.[5] 이후 태종의 승은을 입어 외동딸인 정혜옹주를 출산하였다.

1409년(태종 9년),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자 공녀 출신인 현인비 권씨가 정의궁주에게 백은 1백냥을 내리자 상의원에서 이를 보관하였다.[6]

불교에 귀의[편집]

1422년(세종 4년) 2월,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병수발을 든 공을 생각하여 정의궁주 권씨를 정1품 의빈(懿嬪)으로 승격시켰다.[7] 같은 해 5월에 태종이 죽자 비관하여 세종에게 고하지 않고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으며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태종의 명복을 빌어 후궁들이 이를 따라했다.[8]

 

의빈 권씨와 신녕궁주 신씨가 임금(세종)에게 계하지 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후궁들이 서로 경쟁하여 머리를 깎고 염불하는 기구를 준비하여,
아침 저녁으로 불법을 행하였는데, 임금이 금하여도 되지 아니하였다.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5월 20일 (병자)

1424년(세종 6년), 딸인 정혜옹주가 죽자 사위인 박종우로 하여금 재취하게 하여 세종이 이를 허락하였다.[9] 한편 의빈을 비롯한 태종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불사를 행하자 정인지 등이 상소를 올려 의빈 등이 원래대로 머리를 기르도록 청하기도 했다.[10]

최후[편집]

이후 의빈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을 맡아서 길렀다.

1453년(단종 1년)에 의빈이 늙고 병들어 질병가(疾病家, 궁인(宮人)이나 나인(內人)이 병들면 죽을 때까지 옮겨 두던 대궐 밖의 집)로 거처를 옮기자, 금성대군이 자신의 사저에 의빈이 머물 수 있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청했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11][1]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아뢰기를,

"신이 의빈(懿嬪)에게서 자라나서 그 은혜가 심히 무거운데,
 나이가 지금 70이므로 궁중에 기거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신은 부마(駙馬)의 예가 아니니, 원컨대 신의 집으로 나가도록 명하시어
 평안하게 봉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중략)
—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6월 26일 (신해)

금성대군은 의빈을 혜빈 양씨의 처소로 옮겨 지내게 하였다.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이 세조에 의해 처형된 이후, 권씨에 대한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457년(세조 3년), 예조의 주청에 의해 의빈궁(懿嬪宮)의 칭호를 없애고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자수궁과 수성궁의 예에 따라 영수궁(寧壽宮)으로 고쳤다.[12]

가족 관계[편집]

각주[편집]

  1.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6월 26일 (신해)
    금성대군 이유가 의빈을 자신의 집으로 나가 봉양하기를 청하다
  2. 최향미, 《조선 공주의 사생활》, 북성재, 2011, p.128, ISBN 978-89-92162-35-7
  3.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1월 8일 (신묘)
    예조에 역대 왕조의 빈첩의 제도를 상고하게 하다
    이 때에 임금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못하여 빈첩(嬪妾)이 미비하여, 다만 평시의 시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비(靜妃, 원경왕후)는 천성이 투기가 심해 사랑이 아래로 이르지 못하여, 임금이 빈첩을 갖추고자 하였다.

  4.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3월 7일(경인)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성균 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別宮)으로 맞아들이었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송씨(宋氏)1)정비(靜妃)2)에게 말하기를,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 하였는데, 정비의 투기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정비가)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과 시녀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에 맞아들였다.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1) 대부인 송씨(大夫人 宋氏, ?~1424) : 삼한국대부인 송씨. 원경왕후의 어머니
    2) 정비(靜妃) : 원경왕후 민씨
  5.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8월 13일 (갑자)
    정의궁주를 위해 대궐 북쪽에 누각과 연못을 마련하다
  6.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10월 21일 (기미)
    현인비가 정의궁주에게 내린 백은 1백 냥을 상의원에서 보관토록 하다
  7.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2월 20일 (정미)
    정의궁주를 의빈으로, 신녕옹주를 궁주로 삼다
  8.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5월 20일 (병자)
    의빈 권씨 등이 비구니가 되다
  9. 성종실록》 39권, 성종 5년(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2월 1일 (병진)
    졸한 운성 부원군 박종우의 아내가 자신을 첩으로 논한 것이 억울하다고 아뢰다
    졸(卒)한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의 아내 장씨(張氏)가 상언(上言)하기를,

    "박종우는 13세에 부마(駙馬)에 뽑힌 지 3년 만에 옹주(정혜옹주)가 졸(卒)하였는데, 세종께서 후사가 없음을 가련하게 여겨 양가(良家)에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신 까닭에 신녀(臣女, 장씨 본인)를 아내로 삼았고, 아들과 사위가 벼슬길에 오르도록 허락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10.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12월 9일 (신축)
    지중추원사 정인지 등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실망을 상소하다
  11. 단종실록》 6권, 단종 1년(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5월 3일 (기미)
    금성대군 이유가 의빈의 거처하는 곳을 옮기기를 청하다
  12.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5월 22일 (갑신)
    예조가 태종대왕의 후궁의 의빈궁을 영수궁으로 고칠 것을 아뢰다
  13. 세종실록》 114권, 세종 28년(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12월 28일 (신유)
    영돈녕부사 권홍의 졸기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