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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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李玖)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생애[편집]

1350년(충정왕 2) 성균좨주(成均祭酒) 전경(全卿)이 주관한 승보시(升補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1],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했다.[2]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당시 왕이 남쪽으로 피난가면서 춘추사적(春秋史籍)·전교제향의궤(典校祭享儀軌)를 땅에 묻고 숨겼는데, 난이 평정된 후에 임박(林樸)·류구(柳玽)와 함께 이를 다시 발굴했다.[3]

원이 멸망한 후 기철(奇轍)의 아들인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김바얀(金伯顔) 등과 동녕부(東寧府)에 웅거하여 고려의 변경을 침입하려 했는데, 1370년(공민왕 19) 왕이 이성계(李成桂), 서북면상원수(西北面上元帥) 지용수(池龍壽),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 양백연(楊伯淵), 안주상만호(安州上萬戶) 임견미(林堅味) 등을 보내 동녕부를 공격하게 했다.

이 때 이구도 병마사(兵馬使)로서 참전했다.[4]

이후 목사(牧使)를 지냈다가, 1375년(우왕 1) 왕석기(王釋器)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음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전 판사(判事) 정양보(鄭良輔)와 함께 순위부(巡衛府)에 하옥되어 국문을 받았는데, 끝까지 불복하여 정양보는 참수되고, 이구는 장 100대에 처해졌다.[5]

1387년(우왕 13)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과 함께 명에 하정사(賀正使)로 갔으나, 요동(遼東)에서 입국을 거부당해 한 달 만에 고려로 돌아왔다.[6]

이후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각주[편집]

  1. 『고려사』 「선거지」
  2. 『고려열조등과록』
  3. 『고려사』 「임박전」
  4. 『고려사』 「지용수전」
  5. 『고려사』 「충혜왕 왕자전」
  6. 『고려사』 「신우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