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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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 1975년 4월 9일)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이다.

생애[편집]

고문 의혹[편집]

인혁당 관련자들은 1974년 4월 18일 구속 직후부터, 1심, 2심, 대법원 판결과 사형이 집형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가족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도관의 도움을 받은 덕에 오직 이수병씨의 아내 이정숙씨만 수감 중인 남편의 얼굴을 잠깐 동안 본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 사형당한 나머지 7명의 유족은 그런 행운조차 누리지 못했다. 또한 법정에서 조차도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하록 했다.[1]

법정에서도 뒷모습밖에 못 봤어요. 아빠들 옆에 선 헌병들이 뒤도 돌아보지 못하게 했어요.
 

1975년 4월 9일 새벽에 사형이 집형된 후 오후 6시가 넘어서 시신을 인도받았다. 죽은 이수병의 몸뚱이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1]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손톱 10개,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 있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당국이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관련 서적[편집]

  • 《이수병평전》, 민족문제연구소, 저자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2008년 4월 8일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시신으로 돌아온 남편,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다”, 《한겨레신문》, 2012년 9월 12일, 진명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