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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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원
李翰元
조선 중종(中宗)조의 공신
전성군(全城君)
신상정보
출생일 ?
사망일 ?
가문 전의 이씨(全義李氏)
부친 이수남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고령박씨,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 교하현감(交河縣監) 박수림(朴秀林)의 딸
배우자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권금성(權金成)의 딸
자녀 이용강 , 이용유 , 이용경 , 이용륜 , 사위 조방종(趙邦宗:楊州人) , 사위 남궁 후(南宮厚:咸悅人) , 사위 윤심(尹深:茂松人)
묘소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

이한원(李翰元, ? ~ ?)은 조선의 공신(功臣)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字)는 휴문(休文)이다. 아버지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四等)에 책록(策錄)되어 전산군(全山君)에 봉군(封君)되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졸(卒)하고 양간(良簡)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追贈) 받은 이수남(李壽男)[1]이고 어머니는 봉렬대부(奉列大夫) 행(行) 교하현감(交河縣監)을 지내고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 3등(三等)에 녹훈(錄勳)된 박수림(朴秀林)[2][3]의 셋째 딸 고령박씨(高靈朴氏)이다.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4]의 외손녀 사위이며 중종(中宗)의 후궁인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이모부(姨母夫)이기도 하다. 희빈 홍씨(熙嬪洪氏)의 아버지 홍경주(洪景舟)[5]와는 동서사이이다. 병조 참판(兵曹叅判)을 지낸 청파(靑坡) 이육(李陸)[6]이 이모부(姨母夫)이다.
이한원의 외사촌(外四寸) 동생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낸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7]인데, 읍취헌은 박수림(朴秀林)의 손자이며 박담손(朴聃孫)[8]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07) 2월 24일 부사과(副司果)로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둔재(遯齋) 성세창(成世昌), 음애(陰崖) 이자(李耔) 등과 함께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급제(及第)하였고[9] 경력(經歷)[10]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1467∼1510, 順天人)[11], 성희안(成希顔:1461∼1513, 昌寧人)[12], 류순정(柳順汀:1459∼1512, 晉州人)[13] 등과 더불어 연산군을 폐위(廢位)시키고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安置)시키는 거사(擧事)를 단행하고, 성종(成宗)의 아들인 19세의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임금으로 추대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錄勳)되었다.

1506년(중종 01) 10월 19일 통정대부 행 회양도호부사 회양진관 병마첨절제사(通政大夫行淮陽都護府使淮陽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공신회맹(功臣會盟)에 참여하였다.[14] 그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15]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18년(중종 13) 통정 대부(通政大夫)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재임하였다. 사후(死後)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추증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封)해졌다.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한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이한원은 대간(臺諫)에게 여러 번 공박(攻駁:잘못을 몹시 따지고 공격함) 당하였다.

今淮陽府使李翰元, 專無來歷, 有何更事乎? 如此之類, 斷不可遣也
지금 지금 회양 부사(淮陽府使) 이한원(李翰元)은 내력이 전혀 없는데 무슨 경사(更事)가 있겠습니까? 이런 무리는 절대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 《중종실록》 , 중종 2년(1507년) 8월 1일 (임신)


臺諫啓: "楊州牧使李翰元、仁川府使柳軾, 貪鄙庸劣, 議論之出久矣, 而想於殿最, 必見貶下, 故不卽啓焉。 監司必聞公議, 而猶不貶下, 亦誤於等第。 翰元、柳軾, 不可一日在官。 請竝罷。" 又啓前事, 傳曰: "李希雍事, 大臣之議, 或曰可削, 或曰不可削之議多, 故從衆不改耳。 李翰元、柳軾等事, 監司與臺諫所聞各異而然也。 不可無故而遽罷其職。 餘不允。"
대간이 아뢰기를,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한원(李翰元)과 인천 부사(仁川府使) 유식(柳軾)[16]은 탐욕이 많고 용렬하므로 물론이 있은 지 오래되었으나, 전최(殿最) 때에 필시 하등으로 낮추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곧장 아뢰지 아니하였습니다. 감사도 필시 공의(公議)를 들었을 터인데 그를 낮추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등급(等級)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한원과 유식은 하루도 관직에 있을 수 없으니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고 전의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희옹(李希雍)[17] 의 일은, 대신(大臣)의 의논이 혹은 삭직(削職)함이 옳다고도 하나 삭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논이 많기 때문에 중론에 따라서 고치지 않은 것이다. 이한원과 유식 등의 일은, 감사와 대간의 들은 바가 각각 달라서 그런 것이다. 까닭없이 그들을 파직할 수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 《중종실록》 , 중종 13년(1518년) 6월 16일 (갑신)


내력(來歷)이 전혀 없는데 무슨 경사(更事:경력)가 있겠는가? 라거나 탐욕이 많고 용렬하고 물론이 있은 지 오래되었다는 등의 갖가지 이유를 들어 논핵(論劾)하였다. 하지만 그가 여러 차례 과거(科擧)에 응시했으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가 공신(功臣)에 참여하였고, 성품(性稟)이 호방(豪放)하면서도 까다롭고 꼼꼼하며(苛察) 강직하고(剛勁) 말이 곧은(言直) 까닭으로 대간(臺諫)에게 논박(論駁) 당한 것이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충순위(忠順衛)로서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되고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오른 권금성(權金成)[18][19]의 딸이다. 권금성(權金成)은 지강진현사(知康津縣事)와 지양산군사(知梁山郡事) 등을 지낸 권촌(權忖)의 손자이고 수의부위(修義副尉) 행(行) 사용(司勇) 권계우(權繼祐)의 아들이며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의 사위이다.

이한원(李翰元)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용강(李用剛)은 울진현령(蔚珍縣令), 강릉판관(江陵判官), 익위사 좌사어(翊衛司左司禦)를 거쳐 통훈대부 행 충훈부도사(通訓大夫行忠勳府都事)에 이르렀고, 차남 이용유(李用柔)는 수의부위(修義副尉), 병절교위(秉節校尉) 등을 지냈으며, 삼남 이용경(李用經)은 효력부위(効力副尉), 사남은 이용륜(李用綸)이다. 이용유, 이용경, 이용륜은 후손이 없다. 첫째딸은 1544년(중종 3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낸 조방종(趙邦宗:楊州人)[20][21]에게 출가하였는데 이가 곧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른 정견공(貞堅公) 기대항(奇大恒)[22]의 장모이다. 기대항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종형(從兄:사촌형)이다. 둘째딸은 조산대부 행 예빈시 참봉(朝散大夫行禮賓寺叅奉) 남궁 후(南宮厚:咸悅人)[23]에게, 셋째딸은 충의위(忠義衛) 윤심(尹深:茂松人)[24]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조방종은 기대항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는데 기대항의 손자이자 기응세(奇應世)의 아들인 기자헌(奇自獻)[25]이 광해군(光海君)때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남궁 후(南宮厚:1504년 갑자생)는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용인 현령(龍仁縣令), 사도시 정(司䆃寺正), 인천 부사(仁川府使), 장악원 정(掌樂院正), 부평 부사(富平府使), 통훈대부 행 성균관사성(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을 역임한 남궁 지(南宮芷:1530년 경인생)[26] 등을 두었고, 윤심(尹深:1495년 을묘생)은 아들 윤언청(尹彦清:1520년 경진생)을 두었는데 윤언청의 아들이 1586년(선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등을 지내고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에 봉하여진 충정공(忠靖公) 윤형(尹泂)[27] [28]이다.

이한원의 묘소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합폄(合窆)하여 경기도 금천현 사성리(京畿道 衿川縣 巳省里)[29]에 조성(造成)하였으나 사후(死後) 4백 수십년(數十年)[30] 만에 도시개발 계획에 포함됨에 따라 1975년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江原道 洪川郡 瑞石面 豊岩里 81) 번지(番地)로 천장(遷葬)하였다.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홍치십사년신유이월일생원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榜』(1501년의 司馬榜目),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구공신회맹문(九功臣會盟文), 『관동읍지(關東邑誌)의 회양읍 선생안(淮陽邑 先生案)』, 묘갈(墓碣), 1680년 간행 선원록5-2985, 5-3056, 5-3284

※1501년(연산군 07) 사마방목(司馬榜目)인 『홍치십사년신유이월일생원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榜』에서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한 사실[31]을 살펴볼 수 있다.

※1548년에 건립(建立)된 묘갈(墓碣)이 전(傳)해지고 있는데 전면(前面)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嘉靖二十七年七月 日
奮義靖國功臣贈資憲大夫工曹判書全城君行通政大夫楊州牧使李公之墓
貞夫人安東權氏之墓

가계[편집]

  • 고조부 : 이정간(李貞幹)[32] 효정공(孝靖公),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중추원사(中樞院使)
  • 증조부 : 이사관(李士寬)[33]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한성부윤(漢城府尹)
  • 조부 : 이함장(李諴長)[34]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叅判)
    • 아버지 : 이수남(李壽男)[35] 좌리공신(佐理功臣) 전산군(全山君),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시호는 양간(良簡)
        • 아들 : 이용강(李用剛)[36] 울진현령(蔚珍縣令), 강릉판관(江陵判官), 통훈대부 행 충훈부도사(通訓大夫行忠勳府都事)
        • 아들 : 이용유(李用柔) 수의부위(修義副尉), 병절교위(秉節校尉)
        • 아들 : 이용경(李用經) 효력 부위(効力副尉)
        • 아들 : 이용륜(李用綸)
        • 사위 : 조방종(趙邦宗) 문과 급제(文科及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강릉부사(江陵府使)
        • 사위 : 남궁 후(南宮厚) 조산대부 행 예빈시 참봉(朝散大夫行禮賓寺叅奉)
        • 사위 : 윤심(尹深) 충의위(忠義衛)
          • 손자 : 이충(李忠)[37]어모장군 행 충좌위 부호군(禦侮將軍行忠佐衛副護軍)
          • 손자 : 이서(李恕)
          • 손자 : 이각(李慤)
          • 손녀사위 : 최홍한(崔弘僴) 문과 급제(文科及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38][39]

이한원(李翰元)의 팔고조도(八高祖圖)[편집]

이한원(李翰元)의 팔고조도(八高祖圖)[40]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원사(中樞院使)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
 
 
 
 
 
 
 
증(贈)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행(行) 가정대부(嘉靖大夫) 한성부윤(漢城府尹) 이사관(李士寬)
 
 
 
 
 
 
 
 
 
 
 
남평문씨(南平文氏) 순평군(順平君) 문달한(文達漢) 딸(女)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叅判) 이함장(李諴長)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세자사(世子師)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문간공(文簡公) 신재(信齋) 한상경(韓尙敬)
 
 
 
 
 
 
 
청주한씨(清州韓氏) 한상경(韓尙敬) 딸(女)
 
 
 
 
 
 
 
 
 
 
 
해주오씨(海州吳氏) 판도판서(判圖判書) 오준량(吳俊良)[41] 딸(女)
 
 
 
 
 
 
 
순성좌리공신 가선대부 전산군 증시 양간공(純誠佐理功臣 嘉善大夫 全山君 贈諡 良簡公) 이수남(李壽男)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문도공(文度公) 청허당(清虛堂) 이거이(李居易)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 이백신(李伯臣)
 
 
 
 
 
 
 
 
 
 
 
경주최씨(慶州崔氏) 광록대부(光祿大夫)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42] 딸(女)
 
 
 
 
 
 
 
청주이씨(清州李氏) 이백신(李伯臣) 딸(女)
 
 
 
 
 
 
 
 
 
 
 
 
 
 
통정대부(通政大夫)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단구재(丹邱齋) 김후(金後)[43]
 
 
 
 
 
 
 
상주김씨(尙州金氏) 김후(金後) 딸(女)
 
 
 
 
 
 
 
 
 
 
 
안동장씨(安東張氏) 전서(典書) 장강(張綱) 딸(女)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증자헌대부 공조판서 전성군(贈資憲大夫工曹判書全城君) 행(行) 통정대부 양주목사(通政大夫楊州牧使) 이한원(李翰元)
 
 
 
 
 
 
 
 
 
 
 
 
 
 
 
 
 
 
 
 
중직대부(中直大夫) 내섬시윤(內贍寺尹) 박원후(朴原厚)
 
 
 
 
 
 
 
통덕랑(通德郞) 행(行) 청하현감(清河縣監) 박지(朴持)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원필(李元弼) 딸(女)
 
 
 
 
 
 
 
봉렬대부(奉列大夫) 행(行) 교하현감(交河縣監) 박수림(朴秀林)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안중로(安中老)
 
 
 
 
 
 
 
죽산안씨(竹山安氏) 안중로(安中老) 딸(女)
 
 
 
 
 
 
 
 
 
 
 
남양홍씨(南陽洪氏) 전리총랑(典理摠郎) 홍연(洪涓) 딸(女)
 
 
 
 
 
 
 
고령박씨(高靈朴氏) 박수림(朴秀林) 딸(女)
 
 
 
 
 
 
 
 
 
 
 
 
 
 
 
 
 
봉선대부(奉善大夫) 감문위 호군(監門衛護軍) 한휴(韓休)
 
 
 
 
 
 
 
중훈대부(中訓大夫)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한계복(韓季復)
 
 
 
 
 
 
 
 
 
 
 
안동권씨(安東權氏) 익대공신(翊戴功臣)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양효공(良孝公) 정재(靜齋) 권호(權鎬) 딸(女)
 
 
 
 
 
 
 
청주한씨(清州韓氏) 한계복(韓季復) 딸(女)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사사 겸 사헌부대사헌 우문관대제학(密直司事兼司憲府大司憲右文館大提學) 훤정(萱庭) 염정수(廉廷秀)
 
 
 
 
 
 
 
서원염씨(瑞原廉氏) 염정수(廉廷秀) 딸(女)
 
 
 
 
 
 
 
 
 
 
 
배천조씨(白川趙氏)[44]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복흥군(復興君)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조득주(趙得珠) 딸(女)
 
 
 
 
 
 


이한원(李翰元)의 계보(系譜)[편집]

이한원(李翰元)의 계보도(系譜圖)

이도(李棹)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始祖), 고려(高麗) 삼한(三韓) 개국(開國) 익찬 이등 공신(翊贊二等功臣), 삼중 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
이강(李康)
정용위 대장군(精勇衛大將軍)
이수영(李秀英)
병부 상서(兵部尙書)
이문경(李文景)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
이윤관(李允寬)
형부 시랑(刑部侍郞)
이신(李伸)이순(李順)
보승 별장(保勝別將)
이천(李仟)
응양군 대장군
(鷹揚軍大將軍)
이자원(李子蒝)
직문 한서(直文翰署)
증(贈) 대사성(大司成)
이혼(李混)
첨의 정승(僉議政丞)
이자화(李子華)
선부 전서(選部典書)
이언영(李彦榮)
삼사 좌윤(三司左尹)
이승영(李承榮)
감찰 규정(監察糾正)
이득영(李得榮)
전법 총랑(典法摠郞)
이언재(李彦材)
내부 령(內部令)
女婿 백문좌(白文佐)
전법 좌랑(典法佐郞)
女婿 김계초(金繼貂)
강릉인(江陵人)
정의대부(正議大夫)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
女婿 김우류(金右鏐)
일선인(一善人)
봉익대부 우간의 우문관 직제학 지제교(奉翊大夫 右諫議 右文館 直提學 知製敎)
女婿 박정(朴精)
밀직(密直)
이구직(李丘直)
교주도 안렴사(交州道按廉使),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조선 개국 원종 공신(開國原從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 공주목사(公州牧使)
의징대선사
(義澄大禪師)[45]

출가(出家)하여
불교(佛敎)에
귀의(歸依)하고
고승(高僧)[46]
되었다
이사직(李師直)
직문하(直門下)[47]
대호군(大護軍)
女婿 박이(朴頤)
죽산인(竹山人)
전서(典書)
女婿 박여(朴璵)
함양인(咸陽人)
지신사(知申事)
이정간(李貞幹)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자헌 대부(資憲大夫) 중추원 사(中樞院使), 시호(諡號)는 효정(孝靖)
이진간(李珍幹)
서령(署令)
이양간(李良幹)
지고주사(知高州事)
자산 군사(慈山郡事)
지배천군사(知白川郡事)
봉정 대부(奉正大夫)
내섬 소윤(內贍少尹)
이문간(李文幹)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
[48]
女婿 권엄(權嚴)
안동인(安東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女婿 곽순(郭恂)
청주인(清州人)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
제학(提學)
女婿 이맹균(李孟畇)
한산인(韓山人)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이사흠(李士欽)
과의 장군(果毅將軍)
충좌위(忠佐衛)
대호군(大護軍)
이사관(李士寬)
강원도 도관찰사
(江原道都觀察使))
경기도 도관찰사
(京畿道都觀察使))
가정 대부
한성부 윤
(嘉靖大夫漢城府尹)

李士寬子
禮長智長諴長孝長恕長
五人皆文科[49]
第二子義長武科
이사신(李士信)
첨지중추원사
(僉知中樞院事)
이사민(李士敏)
철원 부사(鐵原府使)
이사혜(李士惠)
봉렬 대부(奉列大夫)
지영암군사(知靈巖郡事)
女婿 허성(許誠)
하양인(河陽人)
이조 판서(吏曹判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女婿 김계성(金季誠)
경주인(慶州人)
산원(散員),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女婿 허비(許扉)
양천인(陽川人)
양양 부사(襄陽府使)
이인장(李仁長)
녹사(錄事)
이의장(李義長)[50]
무과 급제(武科及第)
충청도 병마우후
(忠清道兵馬虞候)
하동 현감
(河東縣監)
이예장(李禮長)[51]
문과 급제(文科及第)
정난 공신(靖難功臣)
좌익 공신(佐翼功臣)
전성군(全城君)
병조 참의(兵曹叅議)
시호(諡號)는 평간(平簡)
이지장(李智長)[52]
문과 급제(文科及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증(贈) 좌찬성(左贊成)
이함장(李諴長)[53]
문과 급제(文科及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예조 참판(禮曹叅判)
이효장(李孝長)[54]
문과 급제(文科及第),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서장(李恕長)[55]
문과 급제(文科及第), 적개 공신(敵愾功臣) 전성군(全城君), 경상도 관찰사,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호조 참판(戶曹叅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시호(諡號)는 양간(襄簡)
女婿 송의(宋衣)
진천인(鎭川人)
좌랑(佐郞)
한성 소윤(漢城小尹)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行) 대호군(大護軍)
첨지(僉知)
女婿 김승중(金承重)
영광인(靈光人)
통덕랑(通德郞)
장성 현감(長城縣監)
현감(縣監)
이수치(李壽稚)
통정 대부(通政大夫) 여주 목사(驪州牧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수남(李壽男)
문과 급제(文科及第)
좌리공신(佐理功臣)
전산군(全山君)
가선대부
(嘉善大夫)
황해도 관찰사
(黃海道觀察使)
시호(諡號)는 양간(良簡)
이수아(李壽兒)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용인 현령(龍仁縣令)
좌랑(佐郞)
이수해(李壽孩)
안주 판관(安州判官)
이수영(李壽嬰)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
女婿 박인렬(朴仁烈)
[56]
밀양인(密陽人)
현령(縣令)
女婿 나처경(羅處經)
수성인(壽城人)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한생(李翰生)
생원(生員)
이한원(李翰元)
정국 공신(靖國功臣)
전성군(全城君)
통정 대부(通政大夫)
양주 목사(楊州牧使)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조선왕조실록 1471년(성종 2) 6월 3일 갑진조 기사에 양간공(良簡公) 이수남(李壽男)의 졸기(卒記)가 전해진다.
  2. 좌리원종공신녹권(佐理原從功臣錄券)에 의하면 교하현감(交河縣監) 박수림(朴秀林)은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 3등(三等) 723명 중 611위로 녹훈되었다.
  3.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권사(卷四) 행장(行狀) 편에 선조고봉렬대부 행교하현감박공부군행장(先祖考奉列大夫 行交河縣監朴公府君行狀狀)이 실려 있다. 교하현감(交河縣監) 박수림(朴秀林)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산 6-1(京畿道 龍仁市 陽智面 植金里 山 6-1)번지에 있다.
  4.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의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산 44(忠清北道 槐山郡 佛頂面 外嶺里 山 44) 번지에 있다.
  5. 도열공(度烈公) 홍경주(洪景舟)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17-3(京畿道 南楊州市 眞乾邑 松陵里 山 17-3) 번지에 있다.
  6. 청파(靑坡) 이육(李陸)의 묘소(墓所)는 원래 경기도 광주 남면 가차율리(京畿道 廣州 南面 加次栗里)에 있었으나 경기도 성남시 분당(盆唐) 신도시 조성으로 경기도 광주시 목동 산113번지에 둘러 싸여 있는 경기도 광주시 목동 242-3번지로 이장(移葬)하였다.
    1499년(연산군 5년)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는 당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있던 용재(慵齋) 성현(成俔)이 짓고 공조 좌랑(工曹佐郞) 신은윤(辛殷尹)이 전액(篆額)과 글씨를 썼다.
    묘소 아래 경기도 광주시 목동 241-4번지에 광모재(廣慕齋)가 있다. 광모재는 이육(李陸)의 조부(祖父)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철성 부원군(鐵城府院君) 용헌(容軒) 이원(李原)을 모시는 재실(齋室)이다. 이곳에서 같이 제사를 지낸다.
  7.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식금리 산 6-1(京畿道 龍仁市 陽智面 植金里 山 6-1)번지에 있다.
  8. 송석충(宋碩忠:1454∼1524)의 눌옹선생유사(訥翁先生遺事)의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에 박담손(朴聃孫)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進士朴聃孫 乙亥 㶊叟 本高靈 父奉列大夫行交河縣監 秀林
    진사박담손 을해 이수 본고령 부봉렬대부행교하현감 수림

    이를 통해 박담손(朴聃孫)이 진사시(進士試)에 오르고, 1455년 을해년에 태어났으며 자(字)가 이수(㶊叟)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눌옹선생유사의 정지교부계의 기록에 의하면 1480년(성종 11) 경자년 6월 초6일에 나이가 서로 비슷한 김굉필(金宏弼:1454년생), 최부(崔溥:1454년생), 박담손(朴聃孫:1455년생), 송석충(宋碩忠:1454년생), 신희연(申希演:1455년생) 등이 한성(漢城) 호현방(好賢坊:지금의 서울 중구 회현동) 김굉필의 집에 모여 “우리들은 나이가 서로 비슷하고 도(道)가 서로 같고 정(情)과 뜻(志)이 서로 맞는다.”며 계(契)를 맺었는데 이 계회(契會)의 명칭이 바로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이다.
  9. 보물 제1464호 『홍치14년신유2월일생원진사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進士榜)』이라고 하는 사마방목(司馬榜目)과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 40권, 연산 7년 2월 24일 병오 기사)에 의거(依據)한다.

    『홍치14년신유2월일생원진사방(弘治十四年辛酉二月日生員進士榜)』

    ○ 副司果 李翰元 休文 本全義 居
    父黃海道觀察使 壽男

  10. 1634년(인조 12) 간행된 전의이씨성보(全義李氏姓譜)를 전의이씨(全義李氏) 숭정보(崇禎譜)라 부르는데, 이곳에서도 경력을 지낸 기록이 남아 있다.

    이한원(李翰元)
    經歷 參靖國功臣 官至通政牧使追封全城君

  11. 박원종(朴元宗)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31(京畿道 南楊州市 瓦阜邑 陶谷里 山 31) 번지에 있다.
  12. 성희안(成希顔)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65-2(京畿道 楊州市 長興面 日迎里 山 65-2) 번지에 있다.
  13. 류순정(柳順汀)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 43-31(서울特別市 九老區 梧柳洞 山 43-31) 번지에 있다.
  14.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10월 19일 갑자 기사)에 따르면, 1506년 10월 19일에 중종(中宗) 임금이 개국 정사 좌명 정난 좌익 적개 익대 좌리 정국 공신(開國定社佐命靖難佐翼敵愾翊戴佐理靖國功臣)과 그 자손 등을 삼가 거느리고 신무문(神武門)을 나서 단소(壇所)에 나아가 회맹제(會盟祭)를 지냈다. 이때의 공신회맹제 기록이 정국 공신(靖國功臣) 신은윤(辛殷尹) 후손 집안에서 현재까지도 온전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정국공신 회맹문(靖國功臣會盟文) 또는 구공신회맹문(九功臣會盟文)이라 부른다. 또한 이것을 영인한 것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九功臣會盟文(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 古2513-372)이다. 구공신회맹문에서 1506년 10월 19일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회양 도호부사(行淮陽都護府使) 회양진관(淮陽鎭管)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로 있던 이한원(李翰元)과 그 아들 창신 교위(彰信校尉) 행 충좌위 부사맹(行忠佐衛副司猛) 이용강(李用剛), 병절 교위(秉節校尉) 이용유(李用柔) 그리고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있던 사촌 동생인 이희옹(李希雍)이 공신회맹에 참석한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분의정국공신통정대부행회양도호부사회양진관병마동첨절제사 신 이한원
    奮義靖國功臣通政大夫行淮陽都護府使淮陽鎭管兵馬同僉節制使 臣 李翰元

    정국공신적장창신교위행충좌위부사맹 신 이용강
    靖國功臣嫡長彰信校尉行忠佐衛副司猛 臣 李用剛

    정국공신자병절교위 신 이용유
    靖國功臣子秉節校尉 臣 李用柔

    분의정국공신통덕랑호조정랑 신 이희옹
    奮義靖國功臣通德郞戶曹正郞 臣 李希雍

  15. 1565년(명종 20) 간행된 문화류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로 불리는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권삼(卷三) 競면에 첨지(僉知)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한원 이하(以下)의 계보(系譜)는 권팔(卷八) 勉면에 기록되어 있다.
  16. 유식(柳軾)은 본관(本貫)이 전주(全州)이며 장령(掌令), 영흥 부사(永興府使) 등을 지낸 유빈(柳濱)의 증손이며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 유계동(柳季潼)의 4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 화중(和仲), 호(號)는 서계(西溪)이다. 1486년(성종 17) 병오(丙午)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고, 강릉 판관(江陵判官)으로 재임중이던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인천 부사(仁川府使) 등을 지냈다. 유식(柳軾)의 증조부 유빈(柳濱)이 유경손(柳敬孫), 유의손(柳義孫), 유신손(柳信孫), 유말손(柳末孫)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유말손(柳末孫)이 유식의 조부가 된다. 유말손(柳末孫)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유계번(柳季藩), 유계장(柳季漳), 유계동(柳季潼) 세 아들을 두었는데 유말손의 세째 아들이 유계동(柳季潼)이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吏曹叅判)과 예조 참판(禮曹叅判)을 지낸 유의손(柳義孫)이 자손(子孫)이 없으므로 유식의 아버지 유계동이 유의손(柳義孫)의 후사(後嗣)로 계자(系子)가 되어 나아갔다. 유식(柳軾)의 본래 생가(生家)쪽 조부 유말손(柳末孫)의 부인(夫人)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낸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사신(李士信)의 딸이며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손녀이다. 따라서 유식(柳軾)의 진외고조(陳外高祖)가 이정간(李貞幹)이 되며, 이한원(李翰元)의 고조(高祖)가 이정간(李貞幹)이라 내외 친척(內外親戚) 관계가 된다.

    전의이씨 시조 이도(李棹)..........→이구직(李丘直)→이정간(李貞幹)→이사관(李士寬)→이함장(李諴長)→이수남(李壽男)→이한원(李翰元)

    전의이씨 시조 이도(李棹)..........→이구직(李丘直)→이정간(李貞幹)→이사민(李士敏)→유말손(柳末孫)→유계동(柳季潼)→유식(柳軾)

    유식(柳軾)은 아들 여덟 명을 두었는데 장남 유윤덕(柳潤德)이 1509년(중종 4) 기사(己巳) 별시(別試) 병과(丙科) 13위(18/18)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유식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산 5(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道乃洞 山 5) 번지(番地)에 있다.
    전주유씨(全州柳氏) 유식(柳軾)의 계보
    【전주유씨】유습(柳濕)→유극서(柳克恕)→유빈(柳濱)→유경손(柳敬孫)/유의손(柳義孫)/유신손(柳信孫)/유말손(柳末孫)→유계번(柳季藩)/유계장(柳季漳)/유계동(柳季潼)유식(柳軾)
  17. 이희옹(李希雍:1472∼1541)은 예조참판(禮曹叅判) 이함장(李諴長)의 손자이며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 이수영(李壽嬰)의 아들로 이한원(李翰元)의 사촌 동생(四寸弟)이다. 1504년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겸(兼) 오위 도총부 도총관(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 정사룡(鄭士龍)이 “有明朝鮮國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李公墓誌銘幷序(유명조선국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리공묘지명병서)”라고 하는 묘지석(墓誌石)을 지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 묘지석의 글이 지어진 시기는 정사룡이 한성부 판윤으로 있던 1543년(중종 38, 계묘)으로 추정된다.
  18. 정국원종공신녹권(靖國原從功臣錄券)에 의하면 권금성(權金成)은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1등(一等) 418명 중 235위로 녹훈되었다.
  19. 권금성(權金成)은 지강진현사(知康津縣事)와 지양산군사(知梁山郡事) 등을 지낸 권촌(權忖)의 손자이며 수의부위(修義副尉) 행(行) 사용(司勇) 권계우(權繼祐)의 아들이다. 처부(妻父)는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문성공(文成公)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이다. 사용(司勇) 등을 지냈으며 1506년 충순위(忠順衛)로서 정국 원종 공신(靖國原從功臣) 1등(一等)에 오르고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이르렀다.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금성(權金成)의 계보 - 복야공파 19세
    【시조】권행(權幸)→권인행(權仁幸)→권책(權冊)→권균한(權均漢)→권자팽(權子彭)→권선개(權先蓋)→권염(權廉)→권이여(權利輿)→권중시(權仲時)→권수홍(權守洪:복야공)→권자여(權子輿)→권책(權책)→권한공(權漢功)→권중달(權仲達)→권사종(權嗣宗)→권집덕(權執德)→권촌(權忖)→권계우(權繼祐)→권금성(權金成)

    ◆◆ 권금성(權金成)의 관직 ◆◆

    ■ 양성이씨(陽城李氏) 이승소(李承召)의 문집(文集) 『삼탄집(三灘集)』의 「河東府院君鄭文成公墓誌銘」에는 행(行) 사용(司勇)
    "河東府院君鄭文成公墓誌銘 .......... 公先配趙氏。同知敦寧侯之女。先卒無子。後配李氏。檢校判漢城府事携之女。封貞敬夫人。生五男二女。男長曰光祖。行大護軍。先公二十二年沒。次曰顯祖。輸忠保社定難翊載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儀賓府儀賓。河城府院君。登第。次曰崇祖。純誠佐理功臣河南君。次曰敬祖。行護軍。中生員試。次曰尙祖。行副護軍。女長適行司勇權金成。次適行軍器寺判官金由岳。.........."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 신도비(神道碑)에는 사용(司勇)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定難翊戴
    유명조선국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정난익대
    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
    領議政河東府院君兼 領經筵書雲館事諡文成鄭
    령의정하동부원군겸 령경연서운관사시문성정
    公之墓
    공지묘
    貞 敬 夫 人 慶 州 李 氏 之 墓
    정 경 부 인 경 주 리 씨 지 묘
    ..........公先娶趙氏敦寧候之女後娶李氏判漢城携之女封貞敬夫人生五男二女長曰光祖大護軍先公歿曰顯祖尙 世祖女懿淑公主輸忠補 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綏祿大夫河城府院君篤學登科曰崇祖純誠佐理功臣河南君曰敬祖曰尙祖皆護軍女長適司勇權金成次適判官金由岳.........."

    ■ 여산송씨(礪山宋氏) 송인(宋寅:1517∼1584)의 문집인 『이암유고(이庵遺稿)』에 기록된 「熙嬪洪氏墓誌銘」에는 건공장군(建功將軍)
    "熙嬪洪氏。系出南陽。其上世有諱殷悅。佐麗祖策翊戴勳。官至太師。厥後。世爲大官。訖于麗代。高祖諱陟。中軍司正。贈承政院都承旨。曾祖諱淀。原州判官。贈吏曹叅判。祖諱任守。知中樞府事。贈議政府左贊成。考諱景舟。秉忠奮義協策翊運靖國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南陽君。諡度烈。妣貞敬夫人權氏。安東望族。建功將軍諱金成之女。領議政河東府院君鄭文成公麟趾之外孫女也。"

    ■ 1600년대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이 저술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사용(司勇)

    ■ 정인지의 처부 경주이씨(慶州李氏) 이휴(李携)가 기록된 경주이씨 족보에는 호군(護軍)

    ■ 정국 원종 공신(靖國原從功臣) 녹권(錄券)에는 충순위(忠順衛)로 기록됨.

  20. “조방종”. 
  21. 조방종(趙邦宗)은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의 현손(玄孫)이자 돈녕부 봉사(敦寧府奉事) 조영견(趙永堅)의 3남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손위 형은 조방주(趙邦柱), 조방량(趙邦樑)이다. 부인(夫人)은 전의이씨(全義李氏) 정국공신(靖國功臣) 전성군(全城君) 이한원(李翰元)의 딸이다. 1544년(중종 39) 갑진(甲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15위(18/23)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1555년(명종 10)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재임중에 졸하였다. 부인(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사이에 아들 두 명과 딸 하나를 두었으나 아들 둘은 그 자손이 끊어져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딸은 기대항(奇大恒)에게 출가하였다. 기대항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정견(貞堅)이다. 조방종(趙邦宗)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금곡(京畿道 楊州郡 金村面 金谷 :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초곡(初谷) 북쪽 언덕(北岡)에 있었다. 양주조씨세보에 이르기를, 묘비(墓碑)는 없으나 돌로 만들어진 혼유석(魂游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옹중[翁仲: 무덤 사이에 세워 놓은 석인(石人)을 가리킴] 등이 있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石制工美)고 하였고, 제사(祭祀)를 외손(外孫)이 봉사(奉祀)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이 기가산(奇哥山:행주기씨 기대항의 후손들이 외손봉사하며 관리하는 산)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조방종(趙邦宗)의 아버지 돈녕부 봉사(敦寧府奉事) 조영견(趙永堅)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금곡(京畿道 楊州郡 金村面 金谷 :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초곡(初谷)에 조성하였으나 홍릉(洪陵)이 들어오면서 1900년(고종 경자년)에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사촌리(京畿道 廣州郡 大旺面 沙村里 : 현재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사송동과 분당구 일원)로 이장하였고, 1976년(병진년) 또 다시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원성리 산 34(世宗特別自治市 全義面 元省里 山 34) 대뿌리 라는 곳으로 옮겼다.
  22. 기대항(奇大恒)은 조산대부(朝散大夫)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낸 기준(奇遵)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07/33)로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고 숭정 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견(貞堅)이다.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은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을 말한다. 정견공(貞堅公) 기대항(奇大恒)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470-4(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星沙洞 470-4) 번지에 있다. 기대항의 증조부 기축(奇軸)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450-6 번지에 소재한다.
    행주기씨(幸州奇氏) 기대항(奇大恒) 계보
    기순우(奇純祐)→기수전(奇守全)→기필선(奇弼善)→기겸(奇謙)→기절(奇節)→기효순(奇孝順)→기현(奇顯)→기중평(奇仲平)→기면(奇勉)→기건(奇虔)→기축(奇軸)→기찬(奇禶)→기준(奇遵)→기대항(奇大恒)
  23. 예빈시 참봉(禮賓寺叅奉) 남궁 후(南宮厚)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86-2(서울特別市 道峰區 道峰洞 山 86-2) 번지에 있다.
  24. 윤심(尹深)의 묘소는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京畿道 南楊州市 瓦阜邑 德沼里)와 도곡리(陶谷里)에 걸쳐 있는 금대산(金臺山)에 있었으나 1996년 3월에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관당리 산 37-1(忠清南道 保寧市 熊川邑 冠堂里 山 37-1)번지로 이장하였다.
  25. 영의정(領議政) 기자헌(奇自獻)의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내리 산 47(京畿道 安城市 大德面 內里 山 47)번지에 있다.
  26. “남궁지”. 
  27. “윤형”. 
  28.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 충정공(忠靖公) 윤형(尹泂)의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전북리 258-2(京畿道 驪州市 金沙面 箭北里) 번지(番地)에 소재하고, 묘소(墓所)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산 4(京畿道 楊平郡 江上面 洗月里 山 4) 번지(番地)에 있다. 산세가 깊은 곳에 묘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294-6번지 부근에 차량을 주차하고 올라간다.
    윤형(尹泂)의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김포(京畿道 金浦)에 있었으나 1600년대에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京畿道 南楊州市 瓦阜邑)에 있는 금대산(金臺山)으로 이장하였다가 또 다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산 4번지로 옮긴 것이다.
    윤형(尹泂)의 신도비(神道碑)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년(선조 28) ∼ 1682년(숙종 8)]이 찬(撰)하였고, 약헌(約軒) 송징은[宋徵殷: 1652년(효종 3) ∼ 1720년(숙종 46)]이 시장[諡狀:시호에 대한 행장(行狀)]을 찬(撰)하였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언별집(記言別集) 권지17(卷之十七)에 무성부원군윤공신도비명(茂城府院君尹公神道碑銘)으로, 시장(諡狀)은 송징은(宋徵殷)의 약헌집(約軒集) 권지14(卷之十四)에 판중추부사증영의정윤공시장(判中樞府事贈領議政尹公諡狀)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물 및 신도비가 있었으나 금대산(金臺山)으로 이장시에 옮기지 못하고 고종 갑진년인 1904년에 다시 묘갈을 세웠다.
  29. 묘소가 있던 지역은 다음과 같이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경기도 금천현 사성리(京畿道 衿川縣 巳省里)→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산33(京畿道 始興郡 西面 鐵山里 山33) 번지(番地)→경기도 광명시 철산동(京畿道 光明市 鐵山洞)
    사성(巳省)이라는 지명은 현재까지 경기도 광명시 사성로(京畿道 光明市 巳省路)라고 하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30. 이한원(李翰元) 묘갈(墓碣) 비문(碑文)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졸년(卒年)을 알 수는 없으나 1548년 묘갈(墓碣)이 건립(建立)된 때 졸하였다고 본다면 이장하던 해인 1975년까지는 427년이 지난 뒤고, 조선왕조실록에 따라 살아 있던 때부터인 1518년을 마지막으로 졸하였다고 한다면 1518년부터 1975년까지는 457년이 경과한 것이다. 따라서 4백 수십년(數十年)이 지난 것임을 알 수 있다.
  31. “이한원”. 
  32.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 임강현 우륵리(京畿道 長湍 臨江縣 禹勒里)의 신좌을향(辛坐乙向) 언덕에 있으나 남북분단으로 찾아갈 수 없다.
  33. 전성부원군(全城府院君) 이사관(李士寬)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산 36-5(京畿道 坡州市 廣灘面 馬場里) 번지에 있다.
  34. 예조참판 이함장(李諴長)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산 10-3(서울特別市 九老區 宮洞 山 10-3) 번지에 있다.
  35. 양간공(良簡公) 이수남(李壽男)의 묘소는 금천 사성리(衿川巳省里: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었으나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京畿道 議政府市 自逸洞) 축석(祝石) 고개로 옮겼다가 또 다시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江原道 洪川郡 瑞石面 豊岩里 81) 번지(番地) 전성군(全城君) 이한원(李翰元)의 묘 바로 위쪽으로 이장하였다.
  36.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이용강(李用剛)의 묘소는 금천 사성리(衿川巳省里: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었으나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江原道 洪川郡 瑞石面 豊岩里 81) 번지(番地)로 이장하였다. 전성군(全城君) 이한원(李翰元)의 묘 바로 아래쪽에 있다.
  37. 어모장군 행 충좌위 부호군(禦侮將軍行忠佐衛副護軍) 이충(李忠)의 묘소는 금천 사성리(衿川巳省里: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었으나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81(江原道 洪川郡 瑞石面 豊岩里 81) 번지(番地)로 이장하였다. 이용강(李用剛)의 묘 바로 아래쪽에 있다.
  38. “최홍한”. 
  39. 이용강(李用剛)은 이충(李忠), 이서(李恕), 이각(李慤)의 세아들과 최홍한(崔弘僴)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최홍한(崔弘僴)은 전주최씨(全州崔氏)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열공(文烈公) 최순작(崔純爵) 계통의 족보(族譜)를 처음으로 간행한 인물이기도하다. 최순작(崔純爵) 계통은 영의정(領議政) 최명길(崔鳴吉), 최명길의 손자인 영의정(領議政) 최석정(崔錫鼎) 등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최명길(崔鳴吉)은 최홍한의 14촌 손자이다.

    이용강(李用剛)의 아들인 어모장군 행 충좌위 부호군(禦侮將軍行忠佐衛副護軍) 이충(李忠)의 사위가 인동장씨(仁同張氏)로 영의정을 지낸 장순손(張順孫)의 증손인 장세보(張世輔)이다. 장세보의 사위가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기문(崔起門)인데 이가 바로 영의정(領議政) 최명길(崔鳴吉)의 5촌 당숙부(堂叔父)이다. 최기문(崔起門)은 무자(無子)하여 최명길의 숙부(叔父)인 최기원(崔起源)의 아들이자 최명길의 사촌(四寸)인 최헌길(崔獻吉)로 양자(養子)를 삼아 후사(後嗣)를 이었다.

    최홍한(崔弘僴)의 아들은 최견(崔堅), 최건(崔健)이며 사위는 청송심씨(清松沈氏) 서돈(西墩) 심대(沈岱)인데,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임진왜란때에 순절(殉節)하였다. 심대(沈岱)는 심대복(沈大復), 심대림(沈大臨), 심대신(沈大 ), 심대제(沈大濟), 가은(嘉隱) 심대부(沈大孚)의 다섯 아들과 최행(崔行:全州人,郡守)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최홍한(崔弘僴) 1528(중종 23, 무자) ∼ ? 조선의 문신(文臣).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관부(寬夫). 중훈대부 행 순창군수(中訓大夫 行 淳昌郡守) 최서린(崔瑞麟)의 아들이며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지낸 이용강(李用剛)의 사위이다. 서울(京) 출신이며 1552년(명종 07,임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1558년(명종 13,무오) 10월 무공랑(務功郞)으로서 식년시(式年試) 병과25(丙科25) 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방 급제(同榜及第)한 인물로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 저로(樗老) 이우직(李友直),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약포(藥圃) 정탁(鄭琢) 등이 있다. 1559년(명종 14) 2월 승문원(承文院)의 권지(權知)로 있었으며, 1560년(명종 15) 9월 선무랑(宣務郞) 행(行) 세자 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정7품)에 제수되었다. 1561년(명종 16) 윤달 5월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정6품)가 되었다. 일을 잘 처리하는 재주가 있어서 일찍이 수령(守令)이 되어 자못 성적(聲績)을 남겼다. 1566년(명종 21) 1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정5품)이 되고, 같은해 4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정5품)을 거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정5품)이 되었다. 1568년(선조 01) 6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정4품)이 되었으며, 1570년(선조 03) 5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정5품)로 있다가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573년(선조 06) 6월 승지(承旨:정3품)에서 교체되었다가 곧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 07) 1월 동지사(冬至使)로 갔다가 들어왔고, 3월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고, 같은해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나아갔다. 1576년(선조 09) 5월 도승지(都承旨:정3품)로 있었으며, 8월 특별히 가자(加資)되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종2품)로 부임하여 이듬해 1577년(선조 10) 9월까지 재임하였다. 참의(叅議), 우윤(右尹),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고, 전주 최씨(全州崔氏) 세보(世譜)를 최초로 편찬(編纂)하였다.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전라감사 선생안(全羅監司先生案), 미암집(眉巖集), 미암일기(眉巖日記), 미수기언(眉叟記言), 범허정집(泛虛亭集), 중봉집(重峰集), 조천일기(朝天日記), 약포유고(藥圃遺稿), 동상집(東湘集), 광주 유형문화재 제22호 기대승종손가소장문적(奇大升宗孫家所藏文籍)중 양선생문답첩(兩先生問答帖) - 무오식년과방목(戊午式年科榜目)

    ※최홍한(崔弘僴)의 이름 중에서 『한(僴)』이라는 글자는 흔히 人(사람인) + 閒(한가할한)이 합쳐진 글자로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으나, 人(사람인) + 間(사이간)이 올바르다. 국조방목(國朝榜目:국회도서관 영인본, 영남문화사 영인본)이나 조선왕조실록, 여러 문집, 1574년 간행된 전의이씨 족보(최홍한의 장인 이용강), 청송심씨 족보(최홍한의 사위 심대)에서는 굳세다(武貌); 너그럽다(寬大)라는 뜻을 지닌 僴[人(사람인) + 間(사이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태학사 영인본)에서는 僩[人(사람인) + 閒(한가할한)]이 합쳐진 글자로 사용하고 있다. 人(사람인) + 間)(사이간)은 人(사람인) + 閒(한가할한)과 같은 동자(同字)이다.

    ※동방(同榜) - 같은 때의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같이 오르거나 같이 적힌 것을 말한다. 또는 방목(榜目)에 함께 참여한 사람. 동년(同年).

    ※동방 급제(同榜及第) - 같은 해의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같이 참여한 사람.

    ※성적(聲績) - 명성(名聲)과 공적(功績).

    ※동지사(冬至使) -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에 보내는 사신으로 상사(上使)·부사(副使) 및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가 있음.

  40. 팔고조도(八高祖圖)는 작성자의 부계(父系)·모계(父系) 및 선대(先代) 등 4대(四代) 조상의 계통을 적은 일종의 가계도(家系圖)로서 그 가계도상 나타나는 고조부(高祖父)가 8명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를 기점으로 하여 위로 올라가는 것이 특징이다. 즉 나의 조상을 부, 조, 증조부, 고조부 등으로 부계(父系)쪽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母)와 그 모의 선계, 조모와 그 조모의 선계 등으로 방향을 찾아 올라간다.
    부계(父系) 중심의 족보와 달리, 팔고조도에는 모계(母系) 선대(先代) 내력이 상세하기 때문에 현재의 인물이 있기까지 본가(本家)와 외가(外家)의 구성원을 비교적 손쉽게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팔고조도에는 족보와 마찬가지로 조상의 관력(官歷)이 나타나 있기에 이를 통해 가문(家門)의 신분구성과 함께 어떤 가문과 혼인(婚姻) 관계가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팔고조도를 작성하는 데는 모든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명씩 두고 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도 각각 한 명씩의 부모를 두고 있다는 전제를 따른다. 이 전제 아래에서는 어느 한 사람의 조상 수는 세대수를 n으로 하였을 때, 2n이 된다. 이렇게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부모는 4명, 증조부모는 8명, 고조부모는 16명이다.
    그러므로 팔고조도에 표현되는 인물은 자신을 포함하여 총 31명이 된다.
  41.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낸 오준량(吳俊良)은 해주오씨(海州吳氏) 15세이고, 문온공파(文温公派)의 파조(派祖) 오형(吳詗)의 손자이며 오찬(吳瓉)의 세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오준량(吳俊良)의 손위 오준부(吳俊夫)는 상서(尙書)이며, 손아래 아우는 오준현(吳俊鉉)이다. 오준현(吳俊鉉)의 사위가 경주최씨(慶州崔氏) 광록대부(光祿大夫)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이다. 오준부(吳俊夫), 오준량(吳俊良), 오준현(吳俊鉉) 모두 절손(絶孫)되어 후손(後孫)이 없다.
  42. 이명(異名)은 최잉(崔陾)이다.
  43. 김후(金後)의 묘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산 39-3(慶尙南道 山淸郡 新等面 坪地里 山 39-3) 번지에 있다.
  44. 白川의 白이라는 글자는 ‘희다’라는 뜻으로 사용할 때는 【백】으로 읽고, ‘땅 이름(地名)’을 가리킬 때는 【배】로 읽는다.
  45. 의징대선사(義澄大禪師)는 고려 말기의 인물로 성(姓)은 이씨(李氏)이며 본관(本貫)은 전의(全義)이다. 고려 고종때의 응양군 대장군(鷹揚軍大將軍) 이천(李仟) 장군의 증손이자, 전법총랑(典法摠郎) 이득영(李得榮)의 아들이며 조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지낸 이구직[李丘直: 1339(고려 충숙왕 07)∼1394(태조 3)]의 형제(兄弟)이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며, 1565년(명종 20) 간행된 『문화류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고려 충숙왕 17) ∼?]의 문집(文集)인 운곡행록(耘谷行錄) 권지3(卷之三) 시(詩)편에 『봉기고달사이대선사 의징(奉寄高達寺李大禪師 義澄)』이라는 시가 전해진다.
    문화류씨 가정보에는 이구직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구직의 손위 형일 가능성이 있다.
  46. 학덕이나 덕행이 높은 승려
  47. 조선왕조실록 1392년(태조 1) 7월 28일 정미일 기사에 의하면 직문하(直門下)는 종3품이었다. 1401년(태종 1) 7월 13일 경자일에 관제가 개편되어 직문하(直門下)를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고쳤다가 1466년(세조 12) 1월 15일 무오일에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사간원(司諫院)의 사간(司諫)으로 고쳤다.
  48. 이문간(李文幹)은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하였고, 묘소는 서울시 구로구 궁동 산 10-4번지에 있다. 1486년에 건립된 군기부정이공묘비(軍器副正李公墓碑)는 비문의 내용이 간략하고 마멸되어, 군기부정이란 직급을 지닌 이공의 묘라는 것과, 1486년에 건립되었다는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 군기부정이란 고려·조선 시대에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의 관직으로 부정(副正)은 종 3품에 해당되는 직급이다. □□大夫에 대해 1484년 5월(성화20년 갑진 5월) 세워진 그의 아들 영해 부사(寧海府使) 이계손(李季孫)의 묘표(墓表)에서는 종4품 조산 대부(朝散大夫)로 기록되어 있으며 1754년 족보에는 조봉 대부(朝奉大夫)로 되어 있다. 현재 묘소에는 종3품 중훈 대부(中訓大夫)로 새 비석이 세워져 있다.

    원문)
    軍器副正 李公墓碑
    □□大夫 軍器副正 李文幹□
    恭人 安東金氏之墓
    成化二十二年二月 日立

    번역문)
    군기부정이공묘비(軍器副正李公墓碑)
    군기부정 이공묘비
    □□대부 군기부정 이문간□
    공인 안동김씨지묘
    성화 22년(1486년) 2월 일 세움.

  49. 조선시대 들어서 최초로 다섯 아들이 문과에 등과(登科)하고, 아들 한 사람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과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遣閒雜錄),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다섯 아들 이상이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아들 다섯 두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예(榮譽)롭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8권, 1447년(세종 29) 10월 30일 무자 기사
    세조실록 17권, 1459년(세조 5) 7월 16일 을미 기사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제8권
    我國三子登科無限。而五子登科者尠少。故父母亡者贈爵。存者歲賜米二十碩。在前朝。洪禹壽洪富洪康洪德洪命而已。入我朝。李禮長智長諴長孝長恕長五昆弟。安重厚謹厚寬厚敦厚仁厚五昆弟。皆登科。
    우리 나라에서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았으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는 적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죽은 사람은 뒤에 증직(贈職)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해에 쌀 20석을 하사하였다. 전조(前朝)에 있어서는 홍우수(洪禹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 5형제와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遣閒雜錄)
    "國朝五子登科者無幾 其父母生者賜米 死者贈爵法也 李禮長智長諴長孝長恕長皆文科......"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제3권 충청도(忠淸道) 전의현〔全義縣〕
    李士寬。貞幹子。官至府尹。六子皆登科。義長,武擧;禮長,兵曹參議;智長、諴長,禮曹參判;孝長,觀察使;恕長,全城君。
    이사관(李士寬) 이정간의 아들이다. 관직이 부윤에 이르렀다. 여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의장(李義長)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예장(李禮長)은 병조 참의가 되었고, 다음은 이지장(李智長)이며 이함장(李諴長)은 예조 참판이 되었고, 이효장(李孝長)은 관찰사가 되었고, 이서장(李恕長)은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50. 충청 병마우후(忠清兵馬虞候)를 지낸 이의장(李義長)의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忠清北道 清州市 上黨區 山城洞)에 병마우후이공의장영세불망(兵馬虞候李公義長永世不忘) 이라고 바위에 새겨진 병마우후 이의장 마애 선정비(兵馬虞候李義長磨崖善政碑)가 그것이다.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늘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선정(善政)을 베푼 목민관을 위해 세운 것이다.
  51. 이예장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13(京畿道 城南市 盆唐區 大庄洞 山13) 번지에 있다.
  52. 이지장(李智長)은 자(字)는 자혜(子慧), 호(號)는 운수(耘叟)이며 1434년(세종 16) 갑인(甲寅) 알성시(謁聖試) 을과2등(乙科二等) 3위(06/25)로 문과 급제(文科及第)하였고, 1435년(을묘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었다.
    증(贈) 좌찬성(左贊成) 이지장(李智長)의 아들은 장경공(莊敬公) 이덕량(李德良)이다. 이덕량은 1457(세조 3) 무과에 급제하여 적개 공신(敵愾功臣) 전의군(全義君)에 녹훈되었고 충청도(忠淸道)·강원도(江原道)·경기(京畿)·영안도(永安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歷任)한 뒤 형조 판서(刑曹判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이덕량은 조선 세조의 비(妃) 정희 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의 언니의 사위였는데, 임금에게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아들이 없어 당질(堂姪:사촌 형제의 아들) 이연손(李連孫)을 사자(嗣子:한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았다. 이연손은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를 거쳐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行)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에 이르렀다. 본래 이덕량의 사촌 형제(四寸兄弟:堂兄弟, 從兄弟) 안주 판관(安州判官) 이수해(李壽孩)의 아들이 넷인데, 첨정(僉正) 이창업(李昌業), 사직(司直) 이창조(李昌祖), 진사(進士) 이창훈(李昌勳),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 이연손(李連孫)이다. 그 중에서 막내 이연손(李連孫)을 맞이하여 이덕량의 후사(後嗣)로 삼은 것이다.
    이지장(李智長)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산 61-81(京畿道 始興郡 果川面 莫溪里 山 61-81) 번지에 있었고, 이덕량(李德良)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광명리) 산 24-1의 간좌(艮坐) 상하분(上下墳)으로 갈석(碣石)이 있었다. 그러나 과천 서울대공원 건설로 인해 1979년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용성리 산20-12(忠淸南道 公州市 利仁面 龍城里 山20-12) 번지로 이장하였다. 그 아들 이덕량(李德良)과 이연손(李連孫)의 묘소는 이지장의 묘소 바로 아래쪽인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용성리 산20-9(忠淸南道 公州市 利仁面 龍城里 山20-9) 번지에 있다.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는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현내면과 과천군 군내면으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맑내(莫溪), 갱맹이(光明), 산골말, 능안말, 벌말을 병합해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가 되었다. 그 뒤 1986년 과천이 시로 승격하면서 막계동이 되었다. 갱맹은 막계2리의 옛 지명인 광명(光明)의 사투리로 과천읍내로부터 동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서울대공원 부근이며, 막계1리는 정부과천청사역 일대이다.
  53. 예조참판 이함장(李諴長)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산 10-3(서울特別市 九老區 宮洞 山 10-3) 번지에 있다.
  54. 이효장의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하구암리 산10-1(忠淸北道 忠州市 中央塔面 下九岩里)번지에 있다. 중앙탑면(中央塔面)은 2014년 2월 1일 가금면(可金面)에서 변경된 이름이다.
  55. 이서장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산 36-5(京畿道 坡州市 廣灘面 馬場里) 번지에 있다.
  56. 박인렬(朴仁烈)은 밀양박씨(密陽 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후손으로 권지 교서관 정자(權知校書館正字) 박절문(朴切問)의 증손자이고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장손(長孫)이며 창평 현령(昌平縣令)과 첨지(僉知)를 지낸 박전(朴栴)의 아들로 사직(司直), 현령(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조부 박중손은 공조(工曹)·이조(吏曹)·형조(刑曹)·예조(禮曹) 4조(曹)의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하고,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叅贊)에 이르렀으며 숭록 대부(崇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세조실록 39권, 1466년(세조 12) 5월 26일 병신일의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 졸기(卒記)에서는 박인렬(朴仁烈)의 아버지 이름이 박전(朴栴)으로 기록되어 있고, 1565년 간행된 문화류씨가정보에서도 박전(朴栴)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밀양박씨(密陽 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족보에서는 부친의 이름이 박남(朴枏)으로 되어 있다. 즉 향나무를 뜻하는 전(栴)자가 아닌 녹나무 이름(木名)을 뜻하는 박남(朴枏)으로 되어 있다. 남자(枏)와 남(柟)자는 같은 글자(同字)이다. 아버지 이름은 조선왕조실록과 문화류씨가정보에 따른다. 박인렬(朴仁烈)은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어 전주이씨(全州李氏) 종실(宗室) 안정부정(安定副正) 이균(李畇)에게 출가시켰으나 무후(无后)하였다. 안정부정(安定副正) 이균(李畇)은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인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증손이며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의 손자이고 신풍 도정(新豐都正) 이순(李循)의 아들이다.
    밀양박씨(密陽 朴氏) 박인렬(朴仁烈)의 계보
    【밀양박씨】박현(朴鉉:糾正公派 派祖)→박문유(朴文有)→박사경(朴思敬)→박침(朴忱)→박강생(朴剛生)→박절문(朴切問)→박중손(朴仲孫)→박전(朴栴)→박인렬(朴仁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