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묵
최선묵(崔善默, 1928년 7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생애[편집]
인천 강화군의 석모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징병되어 참전하였고 누이는 일본인 선박 자본가의 집에 가정부로 팔려가는 등 몹시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다.[1]
1950년 한국 전쟁 중 강화도를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1,500평의 토지를 분배 받자 조선인민군에 자원입대하여 월북하였다.[2]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하였다가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체포되어 대전교도소 수감 중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여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최선묵은 이때 교도소 재소자로 구성된 전향공작반에게 심한 구타를 동반한 고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사망한 동료도 있었다고 주장했다.[3] 총 복역 기간은 약 38년으로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서도 긴 편에 속한다.
출감한 뒤 대전에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탕제원을 운영하며 생활[4] 하던 중,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가족과 다시 만나 평양에서 거주하였고 서예작품전을 열며 서예가로 활동하였다.[5]
2005년에는 《로동신문》에 〈선군화원에 꽃들은 만발한다〉라는 수기를 발표하여 김정일의 선군 정치와 여성 정책에 지지를 표명했다. 최선묵의 삶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밭갈이 노래》가 창작되기도 했다.[6]
각주[편집]
- ↑ “선군화원에 꽃들은 만발한다”. 로동신문. 2005년 3월 16일.
- ↑ 이미숙 (2000년 9월 2일). “북송장기수 63명 ‘이력서’”. 문화일보. 2008년 8월 22일에 확인함.
- ↑ 조성곤,황상철 (1999년 12월 2일). “"고문의 주인공, 바로 너!" - 전향공작의 기술자들을 고발한다”. 《한겨레21》 (제285호). 2000년 2월 2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22일에 확인함.
- ↑ 특별취재반 (2000년 6월 15일). “비전향장기수 표정”. 문화일보. 2008년 8월 22일에 확인함.
- ↑ “북송 비전향장기수, 어떻게 지내나”. 한겨레 (연합뉴스 인용). 2004년 2월 15일. 2005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8월 22일에 확인함.
- ↑ 김치관 (2007년 12월 18일). ““언제 통일되느냐, 이게 문제다” - <현지 대담> 송환 비전향장기수 우용각, 최선묵, 최하종 선생”. 통일뉴스. 2008년 8월 2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