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최재모
(崔在模)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Choi Jae-Mo
출생일 1946년 7월 10일(1946-07-10)
출생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김제군
사망일 2009년 5월 24일(2009-05-24)(62세)
사망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174cm
포지션 감독 (과거 수비수)
청소년 구단 기록



1972-1973
만경고등학교
군산영명고등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67-1968
1969
1970-1972
1973-1977
쌍용양회 축구단
양지 축구단
육군 축구단
포항제철 축구단
국가대표팀 기록
1968
1969-1974
대한민국 U-20
대한민국

043 00(2)
지도자 기록
1978-1980
1981-1984
1985-1992
1990
군산제일중학교 (코치)
군산제일고등학교 (코치)
전주대학교
한국대학축구연맹 (이사)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최재모(崔在模, 1946년 7월 10일 ~ 2009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풀백이였다. 선수 시절 정확한 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슛으로 여러 차례 득점을 만들기도 했으며,[1] 과감하고 투지 넘치는 수비력을 선보였다.[2][3] 또한 날렵한 스피드를 활용한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보이며 리베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4][5] 감독으로서는 빠른 템포를 중시하는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6]

선수 경력[편집]

클럽[편집]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출신으로[7] 만경고등학교 재학 도중 채금석의 지도를 받고자 군산영명고등학교로 옮긴 뒤 한양공업고등학교를 거쳤으며,[8][9][10] 1967년 쌍용양회 축구단에 입단하였다. 이후 그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동국대학교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11] 1969년 양지 축구단에 입대하였다. 그 뒤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9 참가 명단에 포함되어 본선에 참여해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으며,[12][13] 같은 해 '실업 올스타'의 일원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14]

이후 1970년 양지가 해체되자 육군 축구단에 편입되었으며, 그 해 상업은행 축구단과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어 최재모가 B팀인 백호팀에 포함되자 선수 출전 자격 문제가 발생해 대한축구협회와 육군간의 대립으로 인해 경기가 무기한 연기되었다.[15] 그리고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71 참가 명단에 선발되어 본선에 참여해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으며,[16][17] 같은 해 '군 올스타'의 일원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18] 또한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는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19] 1972년 육군에서 제대한 뒤 신탁은행 축구단에 입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잠시 활약하였다.[20][21][22]

그 뒤 1973년 5월 3일 포항제철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23] 그 해 제철소 준공 기념으로 열린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24][25] 그리고 1974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기업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조했으며,[26][27]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당시 해군 축구단과의 최종전에서 김연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28] 또한 1977년 육군 축구단과의 '한일실업정기전' 선발 대회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에 대회 우승 및 대표 선발을 안겼으며,[29]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는 철도청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유건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한 데 이어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박영채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으로 팀의 대회 준우승에 공헌하였다.[30][31] 이러한 활약으로 대회 종료 이후 공로상을 수상했으며,[32] 같은 해 다른 노장 선수들과 함께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33]

국가대표팀[편집]

196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34] 홍콩과의 경기에서 김병찬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4-1 대승을 이끈 뒤 태국과의 경기에서 조재덕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에 3-1 승리를 안겼다.[35][36] 또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이갑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4-0 승리에 일조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37] 대표팀은 버마와의 4강전에서 1-1로 무승부를 이룬 뒤 추첨 결과 탈락이 확정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8] 그리고 1969년에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평가전에서 '대학선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며,[39][40] 얼마 뒤 펼쳐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평가전에도 참여하였다.[41] 또한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들어간 이후 10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42][43]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최재모는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44] 직후 치러진 CR 플라멩구와의 평가전에도 선발되어 좋은 모습을 보였다.[45][46] 하지만 얼마 뒤 B팀으로 편입되어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에 출전했으며,[47] 후에 다시 A팀으로 합류한 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해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표팀의 사상 첫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단독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48][49] 그 해 이원화 원칙이 다시 폐지되어 국가대표팀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최재모는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으며,[50]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 1970년 아시안 게임에 연달아 참가하며 국가대표팀의 2개 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51][52][53] 이러한 활약으로 1970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54]

그 뒤 1971년 국가대표팀의 중남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었고,[55] 그 해 열린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하였다.[56][57] 또한 직후 펼쳐진 베트남 공화국과의 CISM 주최 '극동지역 친선 축구대회' 경기에 나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으며, 얼마 뒤 있었던 비토리아 FC와의 평가전에도 츨전했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58] 이후 뒤이어 치러진 이란과의 친선경기에서 정규풍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2-0 승리에 기여했으며,[59] 같은 해 열린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60] 그리고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패널티킥으로 추가골을 득점하며 대표팀의 6-0 대승에 일조했으나,[61] 수비진을 구축한 다른 선수들과 더불어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62] 그 뒤 킹스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대표팀의 우승에 공헌했으며,[63][64] 국가대표팀 및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1971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재차 선정되었다.[65]

이후 1972년에는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며,[66] 베트남 공화국과의 개막전에서 김정호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67] 그리고 그 해 다시 최재모는 다시 B팀으로 편입되어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에 참가했으며,[68] 버마와의 4강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의 준우승에 일조하였다.[69] 또한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출전할 B팀 명단에 선발되었으나, 일정 변경으로 A팀이 대회에 참여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70][71]

그 뒤 1974년 아시안 게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를 대비해 소집된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72] 자체 평가전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최종 명단에 합류해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73][74] 이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는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박이천의 추가골 2골을 어시스트해 대표팀의 4-0 승리를 견인했으며, 인도네시아와의 결승전에서 박이천의 추가골에 관여하는 등의 활약으로 대표팀의 7-1 대승에 일조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75] 또한 이라크와의 아시안 게임 준결승 라운드 1차전에 출전해 박병철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1-1로 무승부를 이루었으며,[76] 말레이시아와의 준결승 라운드 3차전에서는 이회택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으나 대표팀은 2-3으로 패해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다.[77] 그 뒤 그 해 열린 제3회 한일 정기전에 출전했으며,[78] 얼마 뒤 개최된 킹스컵에도 참가하였다.[79] 또한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페널티킥 동점골을 성공시켜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었으며,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는 등 팀의 2연속 우승에 기여하였다.[80][81] 이러한 활약으로 1974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다시 선정되었다.[82]

이후 1975년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 출전할 상비군 후보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83] 그 뒤에는 최재모가 국가대표팀 선발을 고사하며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84]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이후 1978년 군산제일중학교 축구부가 창단하자 원년 코치로 합류했으며,[85] 1979년 팀의 전국중고교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86] 하지만 안양중학교와의 결승전에서 부정 선수를 출전시켰다는 혐의를 받았으며,[87] 결국 한국중고교축구연맹으로부터 1년 지도자 정지의 중징계를 선고받았고 군산제일중학교의 우승이 박탈되었다.[88] 그리고 1981년 군산제일고등학교 축구부의 창단 코치로 취임해 군산시 내의 중학교, 고등학교의 단계별 유소년 연계 육성 시스템을 도모했으며,[89] 그 해 팀에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안겼다.[90] 이후 1985년 전주대학교 축구부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했으며,[91][92] 1986년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팀을 12강 준결리그로 이끌었다.[93] 그 뒤 1990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으며,[94] 같은 해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평화기원축구대회'에 참가하는 '대학 상비군'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95]

이후 1994년부터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의 전주풍남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했으며,[96] 1997년 열린 '전국 축구교실 초청 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97] 또한 2000년 개최된 '2002 월드컵 개최도시 초청 어린이 축구대회'와 2003년 펼쳐진 '국민생활체육 전국 한마당 축전'에서 우승을 맛보았으며,[98][99]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전라북도 전주시 지역의 축구 붐을 조성하기 위해 온고을 여성 축구단이 창단되자 선수들에게 축구 이론 강습 및 실기 수업을 지도하기도 했다.[100] 그리고 전주시축구협회의 부회장을 지내며 1996년 '전주 시민의 장' 행사에서 체육장을 수상했으며,[101] 2001년 전주시체육회의 이사와 2003년 전라북도체육회의 이사로 선출되었다.[102][103] 이외에 '전라북도 시·군·구 유소년 축구대회'의 주최에 기여했으며,[104] 전라북도 내의 14개 시·군에 '유소년 축구교실'을 개설하며 '전라북도 유소년 축구교실'의 회장을 맡았다.[105]

사망[편집]

2007년 8월 위암 판정을 받은 뒤 그 해 12월 위 절제 수술을 받았으나 다른 장기에 암세포가 전이되었으며, 이후 병원에서 지속적인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2009년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106] 유해는 전라북도 전주시 공원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107] 사후 안구온누리안은행에 기증해 환자 2명에게 각막이 이식되었다.[108]

기타[편집]

대한민국 내의 축구인 중에서 을 잘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09]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진행된 40대 올스타전에 나섰으며,[110] 1989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열린 40대 올스타전에도 참가해 득점을 기록하였다.[111]

1990년 전라북도 연고의 축구 관계자들과 함께 회장과 함께 채금석를 기리기 위한 '금석배 축구대회'를 추진했으며, 1992년부터 대한체육회대한축구협회의 승인을 받아 대회가 매년마다 개최되고 있다.[112]

2002년 전라북도 전주시 우아동 호동골 쓰레기매립장 부지에 축구 경기장을 건설해달라는 민원을 요청하기도 했다.[113]

2004년 새천년민주당 전주완산지구당 개편 당시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114]

2004년에 1968년 당시 이라크에서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한민국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위해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이라크 U-23 대표팀 '평화의 볼'로 명명된 국제축구연맹 공인구 및 2002년 FIFA 월드컵 기념구 등 100여개의 축구공을 전달하였다.[115][116]

2005년 전주시네마에서 전주시의 기관장들과 함께 전주국제영화제 특별 세션 부문에 포함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피묻은 약패를 시청하였다.[117]

2007년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국가정보원을 방문해 2007년 FIFA U-17 월드컵 참가 목적으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U-17 국가대표팀과의 만남에 대한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118]

선수 및 지도자 기록[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지도자[편집]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편집]

# 일시 장소 상대 국가 득점 결과 경기 형식
1 1971년 9월 29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필리핀 필리핀 4-0 6-0 1972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2 1974년 12월 15일 태국 태국, 방콕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2-2 2-2 킹스컵

수상 경력[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감독[편집]

개인[편집]

각주[편집]

  1. “국가대표 활약 축구원로 최재모”. 전북일보. 2008년 9월 23일. 
  2. “관록과 패기의 対決(대결)”. 경향신문. 1969년 8월 19일. 
  3. “英(영) 프로팀맞은 青龍(청룡) 4명의選手(선수) 교체·보강기동성·得點力(득점력) 재점검”. 경향신문. 1971년 7월 21일. 
  4. “아쉬운 스피드·개인기”. 중앙일보. 1969년 5월 28일. 
  5. “「슛」의 부조「패스」도 부정확 2차 전 통해 본 축구상비군 전력평가”. 중앙일보. 1974년 7월 19일. 
  6. “대통령金盃(김배)건 고교축구 큰 잔치 88올림픽 主役(주역)을 찾는다 (下(하)) 嶺(영)·湖南(호남)팀 戰力(전력)”. 경향신문. 1982년 6월 24일. 
  7. “암투병 축구 원로의 꿈 잇는 아이들”. 전북일보. 2009년 5월 22일. 
  8. “東北漢陽(동북한양) 蹴球(축구) 定期戦(정기전)”. 경향신문. 1965년 11월 10일. 
  9. “한양공-단국공을 영봉”. 중앙일보. 1966년 4월 5일. 
  10. "후진 양성에 여생 바친 채금석은 진정한 축구 영웅".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28일. 
  11. “雙龍(쌍용)·治安局(치안국)팀—2回戦(회전)진출”. 경향신문. 1977년 4월 8일. 
  12. “陽地(양지)팀 멤버決定(결정)”. 동아일보. 1968년 12월 30일. 
  13. “한국, 결승진출 아주축구”. 중앙일보. 1969년 1월 29일. 
  14. “蹴球(축구)첫올·스타戰(전)”. 동아일보. 1969년 8월 9일. 
  15. “大統領(대통령)컵蹴球(축구) 蹴協(축협),뒤죽박죽競技運營(경기운영)”. 동아일보. 1970년 6월 5일. 
  16. “아시아챔피언蹴球(축구) 朴利天(박이천)등3명補强(보강)”. 경향신문. 1971년 3월 5일. 
  17. “陸軍(육군)팀 結團式(결단식) 챔피온클럽蹴球出戰(축구출전)”. 동아일보. 1971년 3월 12일. 
  18. “축구 올스타戰(전) 軍選抜(군선발)팀에 覇権(패권)”. 경향신문. 1971년 10월 18일. 
  19. “육군, 해병 눌러 우승 대통령배 축구 폐막 연장전 끝에 2대0”. 중앙일보. 1971년 10월 27일. 
  20. “조용한 열전…축구선수 스카우트”. 중앙일보. 1971년 11월 25일. 
  21. “올 高(고)·延大(연대)의 스카웃全貌(전모)”. 동아일보. 1972년 2월 15일. 
  22. “활기 띠는 대학 스포츠”. 중앙일보. 1972년 3월 1일. 
  23. “浦項製鐵(포항제철)축구팀創團(창단)”. 동아일보. 1973년 5월 3일. 
  24. “팽팽한 接戰(접전)…2對(대)2로 비겨”. 동아일보. 1973년 7월 4일. 
  25. “韓日(한일)친선축구貧弱(빈약)한 플레이┈觀衆(관중)들실망”. 경향신문. 1973년 7월 6일. 
  26. “高大(고대),海軍(해군)꺾고 決勝(결승)토너 진출”. 경향신문. 1974년 3월 6일. 
  27. “前(전)「青龍(청룡)」팀底力(저력)나타나”. 경향신문. 1974년 3월 18일. 
  28. “陸軍(육군),1㸃差(점차)로 2位(위) 實業蹴球(실업축구)폐막”. 동아일보. 1975년 6월 26일. 
  29. “實業蹴球(실업축구) 浦鐵(포철),陸軍(육군)꺽고優勝(우승)”. 동아일보. 1977년 4월 27일. 
  30. “陸軍(육군),海軍(해군)꺾고 先頭(선두) 實業蹴球(실업축구) 浦鐵(포철)은 鐵道廳(철도청)대파 3대0”. 경향신문. 1977년 3월 10일. 
  31. “實業蹴球(실업축구) 浦鐵(포철),단독先頭(선두) 住銀(주은)과1대1비겨”. 경향신문. 1977년 7월 25일. 
  32. “實業蹴球(실업축구)폐막 朝銀(조은),海軍(해군)꺾어”. 동아일보. 1977년 11월 11일. 
  33. “실업축구 세대교체-국가대표 대학생 내년 대거 졸업”. 중앙일보. 1977년 11월 23일. 
  34. “韓國(한국)팀18名選拔(명선발)”. 동아일보. 1968년 2월 29일. 
  35. “아시아青少年蹴球(청소년축구) 韓國(한국)의일방적優勢(우세)”. 동아일보. 1968년 5월 3일. 
  36. “아시아青少年蹴球(청소년축구) 韓國(한국)3勝(승) 準決勝(준결승)에”. 동아일보. 1968년 5월 9일. 
  37. “韓国決勝(한국결승)리그進出(진출) 말聯(연)팀에快勝(쾌승)”. 매일경제. 1968년 5월 14일. 
  38. “制覇(제패)의幸運(행운) 아깝게깨져”. 동아일보. 1968년 5월 16일. 
  39. “韓國(한국)팀35명選拔(선발)”. 동아일보. 1969년 5월 14일. 
  40. “영국 미들·섹스축구팀 초청경기”. 중앙일보. 1969년 5월 14일. 
  41. “부루시아蹴球對戰(축구대전) 韓國代表(한국대표)14명選拔(선발)”. 동아일보. 1969년 6월 14일. 
  42. “우리팀 22명確定(확정)”. 동아일보. 1969년 9월 25일. 
  43. “執行委(집행위) 構成(구성)”. 동아일보. 1969년 10월 3일. 
  44. “蹴協(축협) 두常備(상비)팀構成(구성)”. 동아일보. 1970년 2월 14일. 
  45. “來韓(내한)브라질蹴球(축구)팀과 對戰(대전) 우리代表(대표)팀選拔(선발)”. 동아일보. 1970년 3월 14일. 
  46. “후라밍고 초청축구 闘志(투지)에눌린 個人技(개인기) 青龍(청룡),3차례 찬스놓쳐 0-0”. 경향신문. 1970년 3월 30일. 
  47. “자카르타蹴球出戰(축구출전) 韓國(한국) 代表團(대표단) 확정”. 동아일보. 1970년 5월 26일. 
  48. “蹴球大會(축구대회) 大韓蹴協(대한축협)서 決定(결정) 청룡팀 出戰(출전) 메르데카”. 동아일보. 1970년 7월 2일. 
  49. “12년만에 이룬 단독우승 豫想(예상)엎은 亜洲頂上(아주정상) "잘 싸웠다". 경향신문. 1970년 8월 17일. 
  50. “蹴協(축협) 청룡·백호팀 統合(통합)”. 동아일보. 1970년 9월 29일. 
  51. “킹즈컵,亞洲(아주)경기 出戰(출전) 青龍(청룡)팀 壯途(장도)에”. 경향신문. 1970년 11월 7일. 
  52. “킹즈컵 축구 결승전 詳報(상보) 후반35분朴洙德(박수덕) 슛성공”. 경향신문. 1970년 11월 21일. 
  53. “이렇게 싸워 이겼다 亞州大会(아주대회) 金(김)메달리스트들의 手記(수기) (5) 金正男(김정남) 축구팀主將(주장)”. 동아일보. 1970년 12월 26일. 
  54. “축구記者團(기자단) 올해『베스트11』선정 最優秀(최우수)선수에李會澤(이회택)”. 동아일보. 1970년 12월 30일. 
  55. “12일출발,中南美(중남미)8국 青竜(청용),전지훈련”. 경향신문. 1971년 1월 15일. 
  56. “아시아蹴球(축구) 韓國(한국)·버마,決勝(결승)대결”. 동아일보. 1971년 5월 12일. 
  57. “210分(분)의 攻防(공방) 得點(득점)없이 끝내 韓國(한국)·버머 공동優勝(우승)”. 경향신문. 1971년 5월 17일. 
  58. “청룡, 고별전도 패배”. 중앙일보. 1971년 8월 31일. 
  59. “축구評價戰(평가전) 青龍(청룡)팀,이란 물리쳐”. 경향신문. 1971년 9월 11일. 
  60. “老將許允正(노장허윤정)등 보강 메르데카 출전팀도선발”. 경향신문. 1971년 7월 1일. 
  61. “뮌헌 蹴球(축구)예선 한국,比(비)에6대0勝(승)”. 경향신문. 1971년 9월 30일. 
  62. “平準化(평준화)된 아시아 蹴球(축구)”. 경향신문. 1971년 10월 5일. 
  63. “킹스컵 蹴球(축구) 韓國(한국)팀 結團(결단)”. 동아일보. 1971년 11월 5일. 
  64. “「올림픽출전의 벽」넘지 못한 채 청룡팀 해체”. 중앙일보. 1971년 11월 22일. 
  65. “최우수상 金正男(김정남) 선수 71년 베스트11도 선정”. 경향신문. 1971년 12월 29일. 
  66. “국제군인축구 대회 陸軍(육군)·海兵(해병)팀서選拔(선발)”. 경향신문. 1972년 2월 22일. 
  67. “國際軍人(국제군인)축구,韓國(한국),後半(후반)에 三(삼)골”. 동아일보. 1972년 4월 4일. 
  68. “자카르타市(시) 紀念(기념)축구 韓國代表(한국대표)팀 구성”. 동아일보. 1972년 4월 26일. 
  69. “자카르타蹴球(축구) 韓國(한국),버마눌러決勝(결승)에”. 동아일보. 1972년 6월 19일. 
  70. “메盃(배)축구 選手團(선수단)”.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71. “테헤란「友情蹴球(우정축구)」무기延期(연기) 常備(상비)1軍(군) 메杯大會(배대회) 出戰(출전)”. 동아일보. 1972년 7월 6일. 
  72. “李會澤(이회택)포함·高在旭(고재욱)보류 축구常備軍(상비군) 후보 選抜(선발)”. 동아일보. 1974년 3월 21일. 
  73. “白軍(백군),紅軍(홍군)에 이겨 축구常備軍(상비군) 1次(차)평가전서 1대0”. 경향신문. 1974년 3월 25일. 
  74. “蹴球(축구)대표선수 17명確定(확정)”. 동아일보. 1974년 3월 28일. 
  75. “韓國(한국),첫 단독 優勝(우승)”. 경향신문. 1974년 5월 21일. 
  76. “韓國(한국)축구 對(대)이락戰(전) 後半不調(후반부조)로못지킨 先制點(선제점)”. 경향신문. 1974년 9월 10일. 
  77. “2대3 말聯(연)에도 굴복”. 경향신문. 1974년 9월 14일. 
  78. “韓日(한일)스포오츠交流(교류)다시시작”. 동아일보. 1974년 9월 25일. 
  79. “蹴協(축협) 韓國(한국),킹스컵蹴球(축구) 참가”. 동아일보. 1974년 11월 9일. 
  80. “킹스컵蹴球(축구) 韓國(한국),越南(월남)에 힘겹게 비겨”. 경향신문. 1974년 12월 16일. 
  81. “韓國(한국),勝負(승부)킥勝(승)으로 決勝(결승)올라 말聯(연)과 일대白兵戰(백병전)”. 동아일보. 1974년 12월 19일. 
  82. “최우수 卞鎬瑛(변호영)선정 大韓(대한)체육記者團(기자단)”. 동아일보. 1974년 12월 24일. 
  83. “박스컵 蹴球(축구) 후보선수 32명選抜(선발)”. 동아일보. 1975년 2월 12일. 
  84. “획기적 世代(세대)교체 蹴球(축구)대표 常備軍(상비군)”. 동아일보. 1975년 2월 28일. 
  85. “스포오츠 短信(단신)”. 동아일보. 1978년 1월 12일. 
  86. “이름 떨친 전북 축구 중고축구 이리고·군산제일 중 우승”. 중앙일보. 1979년 4월 23일. 
  87. “연맹서 부정선수묵인 말썽”. 동아일보. 1979년 4월 23일. 
  88. “중고축구,부정선수확인 군산제일중 우승취소”. 동아일보. 1979년 4월 28일. 
  89. “제일합섬 여자배구팀 군산제일고교 축구팀 체전우승으로 갑자기 부상…팀 정비 박차”. 중앙일보. 1981년 10월 17일. 
  90. "내년에 경남에서"…성화 꺼지고 아쉬운 작별 전남 2위… 충남 3위 차지”. 중앙일보. 1980년 11월 29일. 
  91. “스포츠短信(단신)”. 동아일보. 1985년 2월 21일. 
  92. “全州大(전주대)축구팀 창단 올봄 첫선”. 동아일보. 1985년 2월 27일. 
  93. “봄철 대학축구 全州(전주) 湖南大(호남대) 12强(강)합류”. 동아일보. 1986년 4월 8일. 
  94. “대학축구연맹 집행부 개편朴景浩(박경호)씨 새부회장에 선임”. 동아일보. 1990년 2월 6일. 
  95. “히로시마 평화기원축구 참가 대학상비군 선수단 25명확정”. 동아일보. 1990년 6월 9일. 
  96. “축구교실 열기 지방도 후끈”. 중앙일보. 1995년 8월 14일. 
  97. '이회택 제자팀'이 제일 셌다”. 경향신문. 1997년 5월 6일. 
  98. “전주시 유소년 축구 전국 제패”. 전북일보. 2000년 8월 22일. 
  99. “생활체육 한마당축전, 전북선수단 투기종목 두각”. 전북일보. 2003년 6월 17일. 
  100. “전주 `온고을 여성축구단' 창단”. 연합뉴스. 2002년 3월 18일. 
  101. “`全州시민의 章' 수상자 확정”. 연합뉴스. 1996년 6월 7일. 
  102. “전주시 체육회 이사선임 새로이..”. 전북일보. 2001년 4월 23일. 
  103. “도체육회 제9차 이사회, 사무처장 유임 이사 등 보선”. 전북일보. 2003년 1월 16일. 
  104. “전북 유소년축구대회 '성황'. 뉴시스. 2008년 7월 13일. 
  105. “전북 시군구 유소년축구교실 축구대회 개최”. 전북도민일보. 2004년 7월 19일. 
  106. “전 축구 국가대표 최재모씨 별세”. 연합뉴스. 2009년 5월 25일. 
  107. “최재모 전 축구 국가대표 별세”. 전북도민일보. 2009년 5월 24일. 
  108. “축구 국가대표 출신 최재모씨 사망 후 안구 기증”. 전북일보. 2009년 5월 25일. 
  109. “농구인들 술고래 많다 한자리서 소주 99병등「술 사건」수두룩”. 동아일보. 1991년 1월 11일. 
  110. “전국축구선수권 오픈경기 30~40代(대)올스타전 갖기로”. 동아일보. 1988년 11월 12일. 
  111. “올스타戰(전)서 李會澤(이회택)감독 1골”. 동아일보. 1989년 11월 29일. 
  112. “금석배 축구대회는…축구선수 이름 딴 첫 전국대회”. 전북일보. 2015년 1월 20일. 
  113. “전주시 '혐오시설 활용' 잇단 민원”. 동아일보. 2002년 9월 9일. 
  114. “민주당 완산지구당 당직개편 단행”. 전북도민일보. 2004년 1월 16일. 
  115. “옛 '태극전사', 이라크팀에 '평화의 볼' 전달”. 연합뉴스. 2004년 3월 29일. 
  116. “이라크축구팀 유니폼에 양국 국기 마크 부착”. 연합뉴스. 2004년 4월 2일. 
  117. “북한영화 ‘피묻은 약패’ 각계 각층 큰 관심”. 전북도민일보. 2005년 5월 1일. 
  118. “‘실미도 축구부대’ 양지를 아십니까”. 동아일보. 2007년 4월 11일.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