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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선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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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7년 전 (메이님) - 주제: 2016년 6월 14일의 편집 요청

아래글 조도선씨의 주장에 대한 보성선씨 문중 종원중 개인의 의견입니다.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고려말 호남안렴사; 지금의 전라남북도 도지사)로 보성선씨 족보를 처음으로 만들려고 했던 1681년부터 보성선씨의 시조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1681년 신유초고(보성선씨 최초로 족보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서문만 남아 있는 중요한 기록)에도 우리 모든 선씨의 시조는 안렴공(선윤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조도선씨(조성,도촌을 세거지로 하는 선씨), 도촌파의 주장인 1681년 부터 시조를 

선용신으로 하였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한 결과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선씨 모두의 시조는 안렴공(선윤지"이라는 글은 후손인 당시 보성선씨 문중의 
문장(門長)이신 선복주님이 신유초고(1681년)에 칠언시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조도선씨들은 이 기록에 대해 자신들의 기록에 없으니 거짓이라고 얘기하겠지요. 

2. 조도선씨(도촌파)족보 정축보(1757년)에 선윤지(보성선씨의 시조)가 자신들의 시조 선용신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보성선씨 몰래 조도선씨 족보에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기록한 거짓기록입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 보성선씨 최초족보는 1749년(기사년)에 최초로 선씨 족보를 만들었으며, 그 족보에는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고려시대 안렴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성선씨 최초족보 기사보 (1749년)를 제작할 무렵 조도선씨는 선용신이 시조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주장은 선원지와 선윤지의 역년이 서로 달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당시 보성선씨와 세계 (世係)를 확인해 보아도 도저히 보성선씨와 세계를 연계할 수 없어 선용신을 시조로 주장하는 조도 선씨를 제외하고 보성선씨만의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보성선씨 최초족보인 기사보(1749년)보다 8년 늦은 1757년(정축년)에 조도선씨들은 자신들만의 족보를 만들면서 보성선씨와 합의되지도 않았고, 검증되지도 않은 내용인 선윤지가 선용신의 손자라고 보성선씨 몰래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족보에 기록하였습니다.(당초 정축보 인쇄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수기(손으로 기록)로 선윤지를 기록 : 정축보를 보면 확인이 가능함)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가 선용신의 손자라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성선씨는 조도선씨의 족보에 기록된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를 삭제하라고 지속 요청도 하고, 보성선씨의 시조를 가리는 여러번의 송사도 있었습니다.

1768년(무자년)에 문송영제라고 하는 양 문중의 시조를 가리는 송사에 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당시 보성군 군수의 의견을 들어 전라 순찰사가 판결하기를 조도선씨 선원지(선용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고, 선원지의 지자가 항렬이 같다고 하여 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없다고 하였고, 조도선씨 집안에서 선씨의 종통을 차지하고자 하는 음모라고 하였으며, 선윤지를 시조로 하는 보성선씨에 조도선씨의 주장대로 하루 아침에 아버지와 조(선용신), 형(선원지)을 기록하는 것은 모든 선가에 대망발이라 판결하여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임을 확실히 판결하습니다.

이 판결결과는 보성선씨 족보 을사보(1785년)에 '문송영제' 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조도선씨들은 자신들의 기록에 없으니 믿을 수 없는 거짓판결이라 하겠지요.

참 답답한 일입니다. 1681년에 만들어진 신유초고의 서문(선윤지 후손 선응뢰 지음)과 선남두님의 칠언시는 조도선씨 족보에 실려 있고, 그와 같이 쓰여진 당시 보성선씨의 문장이신 선복주님의 칠언시에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임을 명확히 밝힌 증거가 있고, 1768년에 시조를 가려달라는 송사에서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임을 확실히 판결하였고, 보성선씨와 조도선씨는 서로의 상관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바, 각자 시조를 모시고 살아라라고 판결했는데, 지금 시점에 보성선씨의 시조를 선윤지에서 선용신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조도선씨에서 주장하는 선대(선용신, 선선유, 선좌, 선중길, 선중의, 그 아래 여러 대)에 대한 근거를 아무리 찾아 봐도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선용신에 대한 기록이 려사제강에 실려 있다고 해서 려사제강을 완독하였는 바, 려사제강에 선용신을 비롯한 조도선씨의 선대에 대해서 전혀 기록이 없었습니다. 조도선씨의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시 절충주부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거이, 선극례와 함께 선무원종공신으로 추봉된 선여경이 조도선씨의 인물중 역사 기록에 등장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부 선씨는 조도선씨의 시작은 임진왜란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중의의 호구첩(보성선씨는 거짓기록이라 판단) 하나만으로 600년 이상 보성선씨의 시조로 모셔온 선윤지를 전혀 실존 근거도 없는 선용신으로 바꾸라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1681년 최초 족보 수보시 부터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와 선용신(선원지)는 세계가 확인되지 않고, 역년이 위착되어 서로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금까지 왔는데, 조도선씨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리하고 결론이 날 수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최근 10여년 이상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조도선씨들의 주장을 할만큼 했으면 그만 할 때 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서로를 헐뜯고 상잔하는 것 이제 그만합시다. 그저 참고 있자니 역겹습니다.

조도선씨들의 주장은 호구첩, 계축가승(이 두 문서에 대해 보성선씨는 신뢰할 수 없는 문서로 판단), 자신들만의 족보로 주장하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보성선씨 문중에도 조도선씨 기록보다 먼저 기록된 족보가 있고 기록이 있고, 그 기록에 모두 보성선씨 시조가 선윤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어찌할까요? 보성선씨 선대의 기록인 신유초고(1681년), 기사보(1749년), 을사보(1785년) 기록은 믿지 말고, 조도선씨 선대의 기록인 정축보(1757년)와 병오보(1786년) 기록을 믿어야 할까요?

아래에 한중연에 기탁된 문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중연에 고문서를 기탁하면 갑자기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에서 선용신으로 바뀝니까? 한중연에서는 기증된 문서에 대하 고문서로의 가치는 인정했을지 모르지만 보성선씨 문중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한중연이 기증된 문서로 인해 보성선씨 시조가 선용신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중연의 역대인물을 찾아보면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라고 되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결론적으로 고문서 기탁은 기탁에 의의를 가져야지 보성선씨 시조문제와 연계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이유인데, 한중연을 그렇게 믿는다면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이다라는 한중연의 기록 또한 믿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기록내용> 인물 사전 : 선윤지(宣允祉)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120C724C9C0U9999X0 호 퇴휴당(退休堂) 호 용암(龍庵)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고려후기 본관 보성(寶城) 활동분야 관료 > 관리

[상세내용]


선윤지(宣允祉)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고려 말의 관리. 호는 퇴휴당(退休堂) 또는 용암(龍庵)이다.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시조이다.

고려말에 명(明)나라의 학사(學士)로서 홍무 15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였다.(주1) 귀화 『순조실록』 32권, 순조 31년(1831) 9월 1일 기사를 참고. 1382년(우왕 8)에 전라도 보성에 왜구가 침입하자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주2) 안렴사 『신증동국여지승람』 40권, 전라도 보성군편을 참고. 가 되어 왜구를 물리친 후 백성을 위로하고 안정시켰으며 유학 보급에 힘썼다. 이후 보성(寶城)에 은거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보성 오충사(五忠祠)에 배향되었는데, 1830년(순조 30)에 오충사에 사액이 내려졌다.


[주 1] 귀화 : 『순조실록』 32권, 순조 31년(1831) 9월 1일 기사를 참고.

[주 2] 안렴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40권, 전라도 보성군편을 참고.


[참고문헌]

『大東韻府群玉』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청선고』 『國朝寶鑑別編』 『山陽誌』 『皇朝人本朝忠臣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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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보성선씨 문중의 사람입니다.

보성선씨는 본은 하나이면서 시조가 두분으로 나타납니다. 고려조 진사 선용신님을 시조로하는 도촌계열 고려말 귀화하였다는 선윤지님의 갈몰계열입니다.

도촌계열 문중의 세가 약해 잘 대처 못하여 권위있는곳에 자료를 비치못하여 백과사전. 포탈의 싸이버백과 등에 옳바른 선씨 설명이 될 수있는 조치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늦게 나타난다하여도 그것이 진실이고 역사가있으면 밝혀지고 공개되어야 한다 믿기에 무슨 사유로 삭제하시려는지 아직 까닭은 모르지만 먼저 토론을 신청하여 선씨 설명을 드리고자합니다.

두개의 선씨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촌계열(저는 도촌계열입니다)에서는 선씨가 중국에서 와서 백제 이전부터 복호촌(보성)에서
 세거하고 정착하여 토착성씨가 되고 고려조에 본을 세우고 문헌상 나타나는 선용신님을 시조로
 하고있으며 그분의 손자가 두분인데 큰아들이 도촌계열이며  작은아들 윤지님이 귀화하신분이
 아니며  이렇게 된사유는 이조 중엽에 갈몰계 일부 인사들이 가문을 업그래이드 시키기위해
 귀화 시조로 특립하고 별도의 족보를 만들었다는 것이며
 갈몰계열에서는 1382년 선윤지님이 귀화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조 중엽까지만해도 도촌계열 인구수가 너무적고 잔약하여 이런 잘못된 역사를 초래하였습니다.

더 길게 애기하면 뭐합니까

  도촌게열은 모든 문중의 기록들을 정부에 기탁하여 이미 고증받고 MF화 해두었습니다.
  우리입으로 주장해봐야 믿으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보관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757년도의 보성선씨 족보(도촌계열)
      시조가 선용신 그분의 손자로 선윤지님이 올라있습니다.
   2. 1829년도 족보
   3.  1864년도 족보
   4.  호구첩: 1421년도 조정(정부)에서 발급해준 호적등본
        -시조공의 이름이 시조공에서 부터 5대까지의 징표이며
         일종의 족보라 할 수있습니다.
  5.선무원종공신록권: 현재 10부 정도 남아있는 임난 공신기록이며
     선씨 28명이 나타나며 도촌계열 선씨들이 주류입니다.
  6.소지문서 3종: 선쌰의 분열 시말이 잘 담겨있는 정부에낸 민원서 진정서 등이며
     하나의 시조밑에 두 선씨를 회귀하려는 눈물어린 정부문서입니다.
  7.기타 소지3종: 선씨 선대들의 벼슬관련 징표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비록 인구수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역사의 맥을 지켜온 선씨임을 이 고문헌으로
     작성하였으며
    중국에서의 선씨 그리고 이동과정은 
        한서의 내용과
        중국의 권위있는 백도백과의 공신력있는 내용을 기술하였고
        백도백과의 내용들이 진정성이 있는지는  구글이 찾아낸 선씨 자료를
        모두 검토하였습니다.
   죄송하지만 어설픈 글들이 있는 저의 블로그로 안내합니다.
          [미디어: blog.daum.net/qianfu]
          
          고증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있으며
            선씨의 유래. 족보 등 참고해주세요
            중국의 선씨 유래는 중국선씨를 봐주세요
   형식이나 절차가 맞지않다면  qianfu@naver.com 으로 연락 주시고
   내용에 의심이 가면 친절히 답변하고자하오니 
   이해바랍니다.   총총히 씁니다.  수고하셔요

-- -- 이 의견을 2009년 6월 6일 (토) 06:14 (KST)에 작성한 사용자는 qianfu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ddol0225 님이 추가하였습니다.

2016년 6월 14일의 편집 요청[편집]

Widesun (토론) 2016년 6월 22일 (수) 20:41 (KST)답변

구체적인 요청 내용이 없음을 확인하고, 편집 요청 틀을 '처리'로 표시합니다. -- 메이 `토론 2016년 9월 10일 (토) 10:54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