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아피아 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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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 전쟁, 폰티네 습지의 성벽, 스파르타쿠스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삼니움 전쟁 등 각각 문서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여기다가 임시로 복사해두겠습니다.--잔글러 (토론) 2014년 7월 17일 (목) 14:33 (KST)답변

삼니움 전쟁[편집]

로마는 그들과 같이 에트루리아 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캄파니아 지방을 노리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로마는 캄파니아 내에 있는 도시인 카푸아와 동맹을 맺을 목적으로 삼니움 족들을 부추겼는데, 이 때문에 삼니움 전쟁이 일어났다. 라티움 지방에 살던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이미 오래전에 로마에 의해 정복되어 정치적으로 편입되었었다.

대부분의 삼니움 족들은 카푸아 북부의 산지에 남아 있었는데, 이 산지는 그리스 치하의 도시인 네아폴리스의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전 343년, 로마와 카푸아는 동맹을 결성했다. 로마 입장으로서는 카푸아 정복의 길이 더욱 가까워 진 것이었다. 삼니움 족들은 군사를 내보내 다시 공격했다.


폰티네 습지의 성벽[편집]

다리 위 습지에 위치한 카푸아와 로마 사이의 폰티네 늪지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했고, 구불구불한 해안로는 티베르 강과 네아폴리스 사이에서 손상되었다. 라티나 가도는 그 고대와 간신히 더 접근할 수 있는 라치알리 언덕레피니 언덕의 산기슭의 언덕 길을 따라 났는데, 이전의 늪 너머로 보이는 탑이다.

제 1차 삼니움 전쟁(343–341 BC)에서, 더욱이 라틴 동맹의 반란은 그들의 자원을 빼내었다. 그들은 미수에 그친 연합을 포기했고 삼니움인들을 진정시켰다.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의 처형[편집]

기원전 73년, 카푸아에서 노예 출신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주동자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은 대부분의 이탈리아 인구가 노예 신분이었던 로마에 대한 저항이었다.

2년 넘게 지속되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로마인들은 기원전 71년 포로가 된 노예 6천 명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여,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이르는 200km에 달하는 도로변에 그것을 늘어놓았다.

외부 링크 수정됨 (2020년 7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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