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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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댓글: 203.249.126.10님 (17년 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 15일 칠천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 전멸 보다는 전면적인 패주가 옳습니다. 이순신을 재차 통제사에 앉힐 때 내린 장계나 조정의 회의에 관한 실록사료를 찾아보면 수군의 전면적인 패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사했다고 알려진 장수들이나 군관들이 멀쩡히 살아있음이 확인되었죠.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여러 가지 중요성과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우선 일본군이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의 양면작전을 펼쳐 조선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 이 부분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본 육군, 수군이 함께 공격을 했지만 그것은 바다에서였습니다. 가덕도에서 경야하려할 때 조선군이 공격을 받은 사실이 있지만 본래 부산 인근의 섬에는 일본육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지휘관인 원균이 수육양면작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음에도 이를 묵살 당한데다가 도원수 권율로부터 해군참모총장격인 원균 장군이 곤장을 맞는다. -> 부산포 인근과 섬을 육군 30만을 동원해서 점령한 후 수군을 출동시키겠다고 주장했습니다-_-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죠.

원균 장군은 육군과 수군이 연합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전황을 잘 모르는 조선 정부의 압력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수군 단독으로 출전했는데 전투 결과는 원균 장군의 예상과 같았다. -> 애초에 원균이 부산포를 공격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덕분에 통제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조선 정부의 명령은 부산포를 점령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력시위를 하라는 것이었죠. 참고로 정유년 초에 이순신은 부산포를 공격했습니다.

일단 위키백과에 올라와 있는 것을 수정해 봤습니다. 다른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203.249.126.10 2007년 1월 15일 (월) 14:45 (KST)답변

실제로 칠천도 가보았는데.. 한 포구에 300척이 모여있기엔 낮고 좁았습니다. 아마 여러 곳에 나누어져서 정박했을거라는 개인적인 추측입니다.(실제 정박한 것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니 개인적인 추측임을 다시 알려드립니다. ^^) 실제로 한산도도 그런식으로 정박했습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이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긴 합니다만.. 어쨌든 원균의 무책임한 지휘에 실망한 장수들이 도망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았겠죠. 아마 일본측의 선제에 우왕좌왕했고 김완이나 몇몇 장수들은 응전했지만 2~30%는 도망간게 아닐까 합니다. 부서진 채 자침된 함선을 빼고서라도 판옥선 40척 가량은 여기저기에 산재해서 도망가버린게 아닐까 합니다.

많은 장수들이 명량 해전 이후 다수 돌아오는 것도 이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우후 이정충이라는 사람도 명량 해전이후 먼 바다에 숨어있다가 돌아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보유한 함선의 척수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배설만이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간게 아닌듯합니다.

하지만 원균의 무책임함은 정말 기가 찹니다.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 그딴 지휘를 할 수 있는 건지.. 사서로 읽어도 형평성이 유지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2011년 8월 5일 (금) 20:36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