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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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에 대한 생각[편집]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만을 봤을 때 대중적으로는 고국원왕으로 알려진 국강상성태왕이 가장 이른 시기이나, 아시다시피 국강상성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을 만한 배경은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인 미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으로는 칭태왕 한 시기는 국강상성태왕~장수태왕 때 까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존하는 고구려 자체 기록만 봤을 때 입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 당할 때 소실 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구려 자체 기록에는 장수태왕 이후에도 꾸준히 칭태왕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아직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유물들이 나오면 더욱 좋겠지요.)

일부에서는 안원~양원왕 대에는 고구려의 왕권이 미약하여 태왕호를 일시 버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주변의 북조나 유목세계를 볼 때 군주의 권한이 약해졌다 하여 어느 날 갑자기 황제라거나 가한 칭호를 버리는 경우는 없던 걸로 봐서 고구려의 태왕칭호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고,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보다 높아졌을 평원왕~영양왕 때에도 태왕칭호가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영류왕대의 고구려는 국제적 위상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왕권은 강했으므로 태왕칭호가 유지되었을 것이며, 보장왕도 안원~양원왕과 마찬가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안장왕, 안원왕, 영류왕은 정상적으로 죽지 않았으므로 태왕이란 칭호를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이 3명의 군주들은 장지명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 특유의 시호를 제대로 받았으므로 태왕이라 불러도 무리 없습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군주들을 ~왕, ~성왕, ~명왕, ~대왕으로 칭함으로 왕 앞에 붙는 글자들은 단순히 왕을 띄우는 미칭으로 보이나, 모두루 묘지명에서 보여지듯 최소한 국강상태왕 이후 태왕 칭호가 처음 쓰였고 이후 장수태왕대의 금석문인 중원 고구려비나 서봉총에서는 태왕 칭호가 고정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수태왕대에 완전히 고유명사화 되었다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태왕 칭호는 어느 날 갑자기 뚝딱 고유명사화 된 것이 아닙니다. SHAW님의 글을 인용하자면 "광개토태왕비에는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왕을 그냥 왕(王)이라고 부른 것이 13번 이며 태왕(太王)이라고 부른 것은 3번,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부른 것이 4번입니다. 또한 太王의 준말로 王이라 썼다면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자국의 지배자를 王이라 불렀을 때 이미 그 안에는 타국의 지배자보다 높은 어떤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기에, 고구려에서 太王이 王의 상위 계서로 설정되었다는 스토리라인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王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또 太王을 만든 것이 아니라 종래에 王으로 불렀던-존재했다면- 국왕 이외의 다른 세력가를 격하시키거나 王자체의 격을 높여서-太王으로- 사용함으로서 기존 계서관과 새로운 상황을 합치시켰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광개토태왕비에는 태왕과 왕을 혼용(태왕=왕)하고 있고, 타국 군주 호칭을 격하(대표적인 예로 百殘主) 시키는 쪽으로 위상을 강화했다고는 하나, 4세기 말에 이르러 고구려 천하의 범위가 넓어지고 강화되고 국내, 외적으로 제후들을 봉할 건수가 늘어감에 따라 더 이상 왕=태왕으로 혼용하는 것을 불가했을 것으로 결국 장수태왕 대에서는 중원 고구려비와 서봉총출토은합호명 그리고 용성왕 풍군에서 보여지듯 태왕 칭호가 고유명사로 정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고자 묘지명, 덕흥리 고분, 그리고 신찬성씨록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고구려 군주 아래 왕, 후, 군 들 즉 여러 제후들이 보이는데, 4세기 말 부터 국제적 위상이 커진 고구려에서 王의 상위개념의 고정 된 칭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고구려 초기에는 왕이 왕을 봉하는 일도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문화가 미숙했던 시기로 한문화가 비교적 성숙했던 중, 후기에 이르면 사정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태왕칭호는 고구려 문명권에서의 최고 지도자 명칭으로 그 증거로는 고구려 문명권 안에 있었던 신라의 칭태왕을 들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법흥태왕 때 부터 칭태왕을 했다는 것으로 신라는 더 이상 고구려의 제후가 다스리는 속국이 아니라 신라 또한 고구려의 태왕과 대등한 태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지만, 고구려의 태왕 칭호는 유목국가의 카간칭호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 듯 그리고 모즉지 매금왕(법흥태왕)에서 보여지 듯이 신라 지증왕이 마립간에서 王을 칭했다고 왕이 한 번에 신라 군주의 고유명사가 된 것이 아닌 것 처럼 한 번에 고유 명사화 된 것이 아니라 국강상태왕~광개토태왕 까지는 왕에서 태왕으로 고구려의 군주칭호가 바뀌는 과정으로 혼용이 불가피하였으며 장수태왕대에 이르러서야 고유명사화 되었다는 것 입니다. --목캔디 (토론) 2009년 2월 16일 (월) 00:50 (KST)답변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아울러 위 내용이 한국사 관련 권위있는 학자 및 관련인들의 주장이라면, 해당 출처와 함께 글 내용에 넣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신뢰성이 떨어지는 개인 블로그나 비전문가의 의견 혹은 목캔디님의 생각일 뿐이라면, 백:독자연구 지침에 의해 위키백과에 실릴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16일 (월) 02:02 (KST)답변
아디다스님, 목캔디님은 저와 같은 역사 카페에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목캔디님이나 저나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서 제가 처음 태왕 글을 올렸을 때도 김용만 소장의 글을 인용해서 올렸는데 님은 카페의 글은 출처로서 적합치 않다 하셨었습니다. 그때의 주장과 지금의 말씀은 다르신거 같은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고구려인 (토론) 2009년 2월 16일 (월) 11:14 (KST)답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만? 애초에 태왕 관련 올라왔던 카페는 단순히 카페일 뿐입니다. 그점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백과사전에 올릴 권위 있는 학자들의 논문이나 책의 내용을 실어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2월 16일 (월) 22:18 (KST)답변

태왕이 고구려에서 고정적으로 쓰였다는 증거가 있나요?[편집]

일부 왕에 대해서만 쓴 건지, 모든 왕에 대해서 쓴 건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 않나요? --Yes0song (토론) 2011년 8월 3일 (수) 16:29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9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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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8년 9월 7일 (금) 01:20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