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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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원주 패널의 석고 모형 (Cichorius 108). 패배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머리(왼쪽 배경)가 로마 병사의 방패에 전시되고 있다 (서기 106년). 데케발루스의 머리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공식적인 승리에 대한 중요한 증거물로서 로마에 보내졌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 (Tiberius Claudius Maximus, 서기 117년 이후 사망)는 제정 로마군의 기병으로, 서기 85–117년 기간 도미티아누스트라야누스 황제들 휘하의 로마 군단보조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트라야누스에게 다키아 전쟁 말 (서기 106년)에 로마 기병대에 포위되자 자결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머리를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자료[편집]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 기념비

막시무스의 생애 관한 유일한 자료는 그리스 필리피에서 발견되었고, 그가 살아있을 때 그를 위해 세워진 막시무스 기념비에 새겨진, 란네 에피그라피크의 721번 (1985년) 금석문이다:[1]

Ti(berius) Claudius / Maximus vet(eranus) / [s(e)] v(ivo) f(aciendum) c(uravit) militavit / eque(s) in leg(ione) VII C(laudia) P(ia) F(ideli) fac/ tus qu(a)estor equit(um) / singularis legati le/ gionis eiusdem vexil/ larius equitum item / bello Dacico ob virtu/ te(m) donis donatus ab Im/ p(eratore) Domitiano factus dupli(carius) / a divo Troiano(!) in ala secu(n)d(a) / Pannoniorum a quo et fa©/ tus explorator in bello Da/ cico et ob virtute(m) bis donis / donatus bello Dacico et / Parthico et ab eode(m) factus / decurio in ala eade(m) quod / cepisset Decebalu(m) et caput / eius pertulisset ei Ranissto/ ro missus voluntarius ho/ nesta missione a Terent[io Scau]/ riano consulare [exerci]/ tus provinciae nov[ae Mes]/[opotamiae....

해석:

고참병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이 기념비를 마련하였다. 그는 성실과 충직의 클라우디아 제7군단에서 기병으로 복무했고, quaestor equitum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에는 동일한 군단의 군단장 호위대(singularis legati legionis)를 맡았고, 군단 기병대의 거기수를 수행했으며, 다키아 전쟁에서 유맹함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께 상을 수여받았으며, 다키아 전쟁 중 트라야누스 황제께서 (그를)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의 두플리카리우스와 엑스플로라토르로 임명하셨고, (그는)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에서 용맹함으로 두 차례 상을 수여받았으며, 트라야누스께 같은 알라의 데쿠리오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데케발루스를 사로잡아 그의 머리를 라니스스토룸에 있는 그 (트라야누스)께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노바 속주 군의 군단장 테렌티우스 스카우리아누스에게 볼룬타리우스(voluntarius)로서 명예로운 전역을 하였다.

출신[편집]

그의 묘석 위치가 그의 고향 도시 (퇴역한 고참병들이 자주 그랬듯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2] 막시무스는 기원전 42년에 그리스 북부 필리피에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 (기원전 30년-서기 14년)에 많이 확장된, 로마군의 퇴역병들의 식민지인 콜로니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 필리펜시스(Colonia Iulia Augusta Philippensis)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름 및 로마 군단에서 일찍이 복무하는 것[3]에서 확인되었듯이,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이었는데, 로마 군단 내 복무는 시민권을 필요로 했다 (이 당시에, 로마 제국의 거주민들 중 10-20%만이 시민권을 지녔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필리피에 정착시킨 이탈리아 고참병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그는 아마 서기 65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이다.[4]

초기 군 경력[편집]

막시무스는 서기 85년보다 늦지 않게 에 입대했다.[5] 그는 최소 서기 66년부터 비미나키움 (모이시아)에 배치된, 클라우디아 제7군단의 기병대 (총 인원 120명)의 기병(eques) 역을 수행했다.[6] 그는 기병대에서 세 가지 고위 직위를 맡았다고 주장했으나, 이 직위들 모두가 공식적인 군계급인지 아니면 막시무스가 수행했던 단순한 역할인지는 확실치 않다.

  1. ‘quaestor equitum’[7]: 아마 기병대의 재무관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8] 이 직위는 이 금석문에서만 등장하였다. 친위대 기병대에 ‘fisci curator’ (재정 관리관)이 존재하기는 했다.[9]
  2. ‘singularis legati legionis’[10](군단장 호위 기병대의 호위병): 추정상 군단 기병대의 4개 투르마 (30명으로 된 기병대 조직) 중 하나였을 것이다. 특정한 투르마가 이 역할 (그 기병대의 특별한 지위에 따라서)을 수행했는지, 혹은 투르마가 단순히 군단장을 돌아가며 호위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후자의 경우는 지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3. vexillarius’ (거기수).[11] 이 직위는 세 가지 중에 유일하게 확실한 군계급으로, 하급 장교직이었다. 봉급면에서, 군단 보병대의 서기수는 아마도 ‘sesquiplicarius’ ("1.5명분"), 즉 계급보다 50% 더 많은 봉급을 받을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12]

막시무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 81-96년)의 다키아 전쟁 (서기 86–88년)에 참전했다. 따라서 그는 제1차 타파이 전투 (86년) 및 제2차 타파에 전투 (88년)에 참전했을 수 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용맹함에 대한 공로를 치하받기도 했다.[13]

로마의 다키아 정복 (서기 101-106년)[편집]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 (101–2년과 105–6년)에 활동했다.[14] 막시무스가 트라야누스에 의하여 호위 및 연락에 한정된 역할을 맡던 군단 기병대에서, 보조군의 정예 교전용 기병대인 알라이로 진급한 것이 이 시기였을 것이다. 막시무스는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이 연대에서 초급 장교인 ‘두플리카리우스’ (duplicarius, ‘두 배 봉급을 받는 자’)로 알려졌다. 이 이동은 막시무스에세 대단한 봉급 상승을 일으켰을 것이다.[15]

다키아 정복의 막바지인, 서기 106년에, 자신의 부대와 같이 엑스플로라토르(explorator, 척후병) 역을 수행하던 막시무스는 패배한 다키아의 왕 데케발루스의 추격에 관여했었는데, 이 당시 데케발루스는 그에게 남겨진 다키아 귀족 호위병만이 남아있는 도망자였다(나머지 다키아 귀족들은 트라야누스에게 투항하였다). 막시무스와 그의 병사들은 데케발루스는 산악 지역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시무스가 그에게 도달하기 전에, 데케발루스는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을 했고, 이 사건은 트라야누스 원주에서 나타난다. 막시무스는 데케발루스의 머리를 베어 라니스스토룸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원정 기지에 있는 황제에게 바친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트라야누스는 막시무스의 공로를 치하하며 보병대의 켄투리오에 해당하는 데쿠리온 (투르마의 지휘관)으로 승진시켰다.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 (114-6년)[편집]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의 생포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시작을 보여주는, 트라야누스 원주의 패널의 석고 모형 (Cichorius 104). 로마의 알라이 기병대 (목에 커치프를 두르고 쇠사슬 갑옷을 입은 이들로, 막시무스의 부대인 판노니오룸 제2알라이로 추정)와 친위대 기병대 (패널 앞쪽에 외투막을 두른 이들)들이 데케발루스와 그의 남은 추종자들을 말을 타고 추적하고 있다 [이전의 패널(Cichorius 103)에서 많은 다키아의 필레라티 (pileati, 귀족)들이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항복한 것을 보여주었다]
산악 지역으로 달아나는, 데케발루스 왕의 호위대인 다키아 필레라티(pileati, 귀족)를 가로막는 로마 기병대 (상단 오른쪽 구석)를 나타내는, 트라야누스 원주의 패널의 석고 모형 (Cichorius 105). 가운데 앞쪽에 필레라티는 이어지는 패널에서 묘사된 데케발루스 왕과 유사한 생김새를 지녔으며, 달아나는 데케발루스를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쓰러진 다키아인 (정면 오른쪽)과 그의 손에서 떨어진 ‘팔스’(falx, 굽어진 다키아식의 검)을 주목
서기 106년에 궁지에 몰려 자결하는 데케발루스를 나타내는, 트라야누스 원주의 패널의 석고 모형 (Cichorius 106). 짓밟힌 다키아의 필레라티 (정면 왼쪽)와 데케발루스가 자신의 목에 대고 쥐고 있는 팔스(정면 아래쪽 가운데) 주목

이후에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 (114–6년)에 참전했고 다시 한번 무용으로 황제에게 서훈을 수여받았다. 아마도 막시무스는 그가 이후 제대(missio)하고 나서 직접 표현했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미 ‘볼룬타리우스’ (voluntarius, 지원병)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의 복무 기간 (25년)이 같은 해 이전 (서기 110년경)에 끝나야 했기 때문이었다.[16]

제대[편집]

막시무스는 마침내 서기 116-7년에 트라야누스의 최고 지휘관 중 한 명이자 당시 신설된 메소포타미아 노바 속주의 병력의 지휘관이었던 데키무스 테렌티우스 스카우리아누스에게 영예로운 제대 (호네스타 미시오)를 부여받았다.

그는 서기 117년 이후에 사망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묘비를 고안했으며, 이 묘비는 그리스 필리피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드라마 지역의 박물관에서 소장). 이 묘비에는 그가 무용으로 수여받은 두 개의 토크를 나타낸 것을 담고 있고 그가 데케발루스를 붙잡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데케발루스의 죽음[편집]

막시무스를 유명하게 한, 데케발루스의 추적 및 자결에 관한 사건들에 관하여 두 가지 묘사가 존재한다.

(A) 막시무스 묘비의 박육조는 검과 더불어 방패와 창 두 개를 들고 말에 탄 막시무스가 다키아 귀족들의 전형적인 머리쓰개인 프리기아 모자 (따라서 다키아 귀족들의 로마 명칭은 필레아티, 모자를 쓴 자였다)를 쓰고 있는 데케발루스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데케발루스는 곡선모양의 다키아 검 (로마인들에게 낫을 뜻하는 ‘팔크스’라고 알려짐)을 쥔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형상은 트라키아 영웅의 정형화된 표현을 반영한 것을 형식화한 거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짐승이나 사람을 창으로 찌르는 기수를 표현하나, 이 경우엔, 막시무스는 검을 쥐고 데케발루스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인다).

(B) 또다른 것은, 좀 더 상세하고 덜 정형화된 (즉 좀 더 실제로 정확한) 데케발루스의 포획에 관한 묘사이며, 트라야누스 원주 패널 (Spiral 22, Panel B; Cichorius 106, above)에 있다. 이 묘사는 데케발루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일련을 보이는, 앞선 두 개의 패널과 함께 봐야한다.

  1. 첫 번째 패널에서, 로마 기병대는 데케발루스와 그의 정예 필레아티 호위 기병대를 전속력으로 추적한다 (예술적 요소로 인해, 각 기수들은 수백명은 아니라도 수 십명의 기병들을 나타낸다). 로마 기병 중에 세 명은 트라야누스 원주에서 묘사된 기병대의 전형적인 모습과 똑같은 외투를 두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은 로마에서 다키아까지 트라야누스와 동행한 친위대의 기병 무장 형태인 에퀴테스 싱굴라레스 아우구스티 즉, 황제의 개인 호위대였을 것이다. 기병들의 나머지는 외투를 쓰고 있지 않아, 이들의 쇠사슬 갑옷과 커치프들이 드러나는데, 이들은 막시무스의 부대인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이였을 거이다. 따라서 데케발루스 포획 작전이 정예 친위대와 알라이 기병들의 합동 작전으로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2. 두 번째 패널은 데케발루스의 기수들 (그리고 데케발루스로 보이는 인물)을 따라잡아 가로막는 로마 기병을 나타낸다. 로마 기병들의 무기들 (창과 검)은 오염으로 인한 부식으로 사라졌다. 사건들의 일련 (패널들에 맞추어 합쳐짐)은 데케발루스의 호위대가 궤멸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마 군마의 발굽 아래에서 짓밟힌 다키아인 참조 (앞쪽의 오른쪽)].
  3. 세 번째 패널에 의하면, 마지막 호위대가 쓰러진 후 (앞쪽의 왼쪽), 데케발루스는 바위투성이 지역으로 홀로 달아났으며, 그곳에서 그는 아마도 그 지역이 말을 타기에 너무나 가파르거나 거칠었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 직접 걸으며 말을 끌고 가는 로마 기병과 분명히 마주쳤다 (앞쪽 오른쪽). 이 기병은 막시무스가 척후대 지휘관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그를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슈피델에게 지지를 받은 다른 관점은 막시무스의 장례비에 모방되어 나타나듯이, 데케발루스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을 타고 있는 기병이 막시무스라고 한다.[17]

아마 기병들은 데케발루스가 다키아 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트라야누스의 다가오는 로마에서 개선식의 중심이 되도록, 가능하면 데케발루스를 산 채로 포획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18] (개선식의 전형적인 구성은 패배한 적의 지도자 개선식의 주인공 전차 앞에서 쇠사슬에 묶여 끌려다니는 것이었을 거이다. 개선식의 최고조는 황제가 붙잡힌 자의 운명을 결정할 때였는데, 일부 경우에선 붙잡힌 자의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으며 그 예시는 로마의 브리타니아 침공 당시에 격렬한 저항을 이끌었던 (서기 43-51년) 브리타니아의 왕 카락타쿠스에 대한 클라우디우스의 처형 취소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포로는 가로테로 처형되어, 시신은 게모니아이 계단으로 던져져 썩도록 내버려둔다). 이 경우에는, 데케발루스의 머리가 계단의 바닥에 놓였다.[19]

이 형사들의 모습의 결과로, 데케발루스가 로마인들에게 붙잡혔을 때 여젼히 살아있었다고 (비록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지만)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다. 막시무스 그 역시도 데케발루스를 '포획'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카시우스 디오]의 저서 로마사의 발췌에서 그가 이미 죽어있었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데케발루스는 그의 수도가 파괴되었고 그의 모든 영토가 점령당했으켜, 그 자신도 붙잡힐 위험에 처하자, 자결을 했다. 그의 머리는 로마로 보내졌다."[20]

각주[편집]

  1. EDH entry HD012322, EDCS entry (retrieved 2014-9-20)
  2. Speidel (1984) 174
  3. Speidel (1984) 174
  4. Speidel (1984) 174
  5. Speidel (1984) 174
  6. Speidel (1984) 174
  7. AE (1985) 721
  8. Speidel (1984) 175
  9. Speidel (1984) 179
  10. AE (1985) 721
  11. AE (1985) 721
  12. Speidel (1984) 181
  13. AE (1985) 721
  14. AE (1985) 721
  15. Speidel (1984) 180–1
  16. Speidel (1984) 185
  17. Speidel (1984) 184
  18. Speidel (1984) 184
  19. Speidel (1984) 185 n.99
  20. Cassius Dio Epitome LXVIII.15.3

출처 문헌[편집]

  • 보리스 란코브: Singulares Legati Legionis: A problem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Ti. Claudius Maximus inscription from Philippi, in Zeitschrift für Papyrologie und Epigraphik, Bd. 80, Bonn: Dr. Rudolf Habel GmbH, 1990, p. 165–175. (JSTOR)
  • J. B. Campbell: The Roman Army, 31 BC-AD 337: A Sourcebook. Routledge 1994, ISBN 978-0-415-07173-4, pp. 32–33 (has a full translation of the Philippi Monument and also a photograph of it.)
  • Michael Alexander Speidel: Roman army pay scales, in The Journal of Roman Studies, Vol. 82, Cambridge :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Roman Studies, 1992, p. 87–106.
  • Michael P. Speidel: The Captor of Decebalus. A New Inscription from Philippi, in Mr. Speidels' Roman Army Studies, Vol. 1, Amsterdam: J. C. Gieben, 1984, p. 173–187.
  • Yann Le Bohec: Die römische Armee. Franz Steiner Verlag 1993, ISBN 978-3-515-06300-5 (excerpt - 구글 도서)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