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론나루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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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론나루와 왕국
පොළොන්නරුව රාජධානිය

1055년~1232년
 

1153년 이전의   폴론나루와 왕국   닥키나데사 번왕국   루후나 번왕국
1153년 이전의
  폴론나루와 왕국
수도비자야라자푸라
정치
정치체제싱할라 군주제
라자
1055년 ~ 1110년
1153년 ~ 1186년
1187년 ~ 1196년
1215년 ~ 1232년

비자야바후 1세(초대)
파라크라마바후 1세
니샨카 말라
칼링가 마가(말대)
지리
위치스리랑카
인문
공통어싱할라어
산스크리트어[1]
크메르어
민족싱할라인
종교
국교상좌부 불교
기타 종교힌두교[2]
기타
현재 국가스리랑카의 기 스리랑카
인도의 기 인도
미얀마의 기 미얀마

폴론나루와 왕국(싱할라어: පොළොන්නරුව රාජධානිය)은 1055년 스리랑카섬폴론나루와를 수도로 삼아 건국된 싱할라계 왕국으로, 1070년부터 1232년까지 스리랑카섬과 다른 지역들을 지배하던 나라였다.[note 1] 파라크라마바후 대왕의 치세 동안 폴론나루와 왕국은 해외로 확장하기 시작하였다.[3]

폴론나루와 왕국은 판디아 내전에 간섭하여 남인도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 전쟁 동안 판디아 나두는 폴론나루와와 판디아 왕조의 비라 판디안의 군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촐라 제국의 번속국인 톤디와 파시도 폴론나루와와 비라 판디안 군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4] 라메슈와람은 1182년까지 싱할라인과 비라 판디안 동맹의 통치하에 있었다.[5] 이 지방에서는 카하파나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남인도를 점령하는 동안 건설 작업이 수행되었다.

파라크라마바후와 같은 왕들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주로 폴론나루와 왕의 판디아와 칼링가 혈통 간의 파벌 다툼에 휩싸이면서 영토 및 정치적 불안정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이로 인해 왕실 군부는 자신이 선호하는 세력을 지지할 기회를 얻었고 아야스만타나 로키사라와 같은 장군들이 왕좌를 장악하고 꼭두각시 통치자를 임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릴라바티 여왕의 파란만장한 통치는 여러 장군을 거치며 세 번이나 집권한 대표적인 예시이다.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북쪽의 판디아와 촐라의 반복적인 개입과 침략이 이루어지면서 왕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212년, 판디아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경쟁자인 파라크라마 판디안이 수도를 점령했다. 불과 3년 후, 오디샤 동강가 왕조의 혈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칼링가 마가가 2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왕국을 침공하여 전임 통치자를 사로잡았다. 마하밤사에 묘사된 대로 폴론나루와는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으며, 이 지역의 광범위한 황폐화는 남쪽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촉발하여 1500년에 걸친 라자라타 유역의 문명을 종식시켰다.

마가가 수도를 점령한 후, 이전 왕국의 여러 군벌과 귀족을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결집했고, 이들은 여러 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북쪽의 적과 맞서 싸웠다. 결국 담바데니야 요새의 통치자 비자야바후 3세가 등장하여 라이벌 군주들의 세력과 마가의 영향력을 제압하고 1232년 담바데니야 왕국을 세우며 스리랑카 역사에서 과도기의 시작을 알렸다.

역사[편집]

스리랑카섬을 1,400년 이상 지배한 아누라다푸라 왕국은 1017년에 촐라 황제 라자라자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에게 함락되었고, 마지막 왕인 마힌다 5세는 포로가 되어 타밀나두로 압송된 후 1029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촐라는 스리랑카섬의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폴론나루와로 옮겼고 거의 53년 동안 통치했다. 폴론나루와는 촐라에 의해 자나나타푸람으로 명명되었다. 비자야바후 1세는 결국 촐라를 패주시키고 싱할라 왕정을 다시 수립했다.[6] 폴론나루와는 마하벨리 강을 건너 아누라다푸라로 향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항상 그 섬의 중요한 정착지로 여겨져 왔다.

아누라다푸라를 복구한 지 3년 후 비자야바후는 가능한 침략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더 방어적인 위치인 폴론나루와로 옮겼다.[7][8] 폴론나루와에서의 승리 이후, 비자야바후는 더 많은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이것은 그가 루후나에서 비자야바후로 즉위한 지 18년 후인 1072년 또는 1073년에 17년 동안 지속된 군사 작전 후에 치러진 대관식을 연기하게 만들었다.[9] 폴론나루와는 비자야라자푸라로 이름이 바뀌었고 수도로 선택되었다. 대관식은 나라의 이전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이 목적을 위해 지어진 궁전에서 열렸다. 비자야바후는 카나우지의 자가티팔라의 딸인 릴라바티와 결혼하여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그는 나중에 칼링가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칼링가 출신의 공주 틸로카순다리와 결혼했다.[10]

비자야바후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권 분쟁이 발생했고, 절대 후계자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왕위 계승권 주장자들 간의 전쟁 끝에 겨우 선출되었다.

먼저 그는 가자바후의 군대 수장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라자라타를 점령하기 위해 다키나데사 군대를 보냈지만 가자바후와 동맹을 맺은 마나바라하와 맞닥뜨렸다. 좌절에도 불구하고 파라크라마바후는 라자라타를 점령했다. 군대가 약해진 가자바후는 마나바라나와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가자바후는 나중에 라자라타를 닥키나데사의 파라크라마바후에게 넘겼다고 선언했다. 마나바라나 역시 그에게 패배했다.[11]

칼링가-아리아 분쟁이 끝난 후,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로하나, 말라야, 라자라타의 세 개 국가를 통일했고, 섬 전체를 닥키나데사라고 선포하면서, 폴론나루와 왕국을 형성했다. 그의 치세는 왕국의 확장기로, 그의 반대자들에 대한 급습과 대규모 침략을 이끌었다. 그는 나라투의 아들 나라파티슈에 의한 공주 납치와 같은 적대적인 행동들 때문에 라만나(현재 버마 하부)의 왕들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이 침략에서, 그는 버마의 도시 바세인을 점령했다.[11]

파라크라마바후 대왕 사후, 비자야바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닛산카 말라를 불러 그 나라를 방문하고 왕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비자야바후 2세는 침략자 마힌다 6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니산카 말라는 마힌다 6세를 암살하고 자신이 비자야 싱하의 올바른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살해를 정당화했다.

칼링가 로케슈바라가 죽은 후, 그의 아들 비라 바후 1세가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군사 지휘관인 타부루 세나비라트에 의해 살해당했다.[12] 비크라마바후 1세가 즉위한 후, 그는 칼링가 로케슈바라의 조카인 초다강가에 의해 암살당했다.[13] 군대는 다시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켜 초다강가를 체포했다. 군대가 더 우세해져서 왕정을 축출했고, 그 결과 아니캉가 왕은 촐라의 지지를 호소했다. 군대가 파견되었고, 아니캉가가 왕위에 올랐다.[14] 폴론나루와의 다르마소카는 폴론나루와 왕군의 지휘관과 함께 학살되었다.

다시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고, 릴라바티가 왕위에 올랐다. 군사 지휘관인 로키사라는 그녀를 쫓아냈다. 그는 로키사라의 군대와 경쟁 관계에 있던 왕립군에 의해 살해당했다.[15]

판디안 왕국의 파라크라마 판디안 2세가 폴론나루와를 침략해서 릴라바티를 폐위시켰다. 파라크라마 판디안 2세가 1212년부터 1215년 사이에 통치하며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 여파로 자프나 왕국을 세운 침략자 칼링가 마가에 의해 쫓겨났다.

칼링가 마가[a]는 1236년에 비자야바후 3세의 침략을 받아 폴론나루와에서 쫓겨날 때까지 21년 동안 통치했으며, 그를 쫒아낸 비자야바후 3세는 수도를 담바데니야로 옮겨 담바데니야 왕국을 세웠다.

농업[편집]

파라크라마 사무드라

파라크라마바후 1세 시대를 기점으로 관개에 대한 관심이 컸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는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16]

비로 인해 떨어지는 물방울이 인류에게 유용하지 않은 채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게 하라

이를 위해 거대한 저수조들이 만들어졌다. 그의 주목할 만한 작품들 중 일부로 파라크라마 사무드라와 기리탈레 수조가 있다. 이 작품들은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존재했던 것을 능가했다. 이전에 지어진 댐들은 이 시기에 대부분 개조되었다.[17][18]

인구[편집]

폴론나루와 왕국은 싱할라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싱할라어가 공용어로 쓰였다. 캄보디아에서 온 정착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크메르인은 캄보자바살라라는 지역에 정착하였다.[19] 크메르 문자마하밤사의 크메르 문자판과 같은 팔리어 문자를 작성하는 데 사용되었다.[b]

무역과 화폐[편집]

대부분의 무역은 왕국의 주요 항구인 칼피티야, 할라바타(칠라우), 콜롬보에서 이루어졌다.[20]

대부분 구리로 만들어진 이 동전들은 그들의 통치자를 본떠서 만들어졌다. 금화 또한 왕국 내에 존재했고 사용되었지만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치세 말기에 대부분 사라졌다. 이것은 부담으로 인한 경제 위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폴론나루와의 동전은 촐라 제국의 라자라자 1세의 동전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촐라 제국이나 판디야 왕국에서는 이것들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남인도에서 발견된 세투 동전들도 폴론나루와 왕국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중국과의 교역은 활발했으며, 폴론나루와 전역에서 송나라 동전들이 발견되었다.[21]

한편 남인도의 식민지에서는 카하파나 화폐가 사용되었다.

기술과 건축[편집]

고대 싱할라 문명은 기술적으로 진보했다. 폴론나루와의 관개 기술은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것들과 훨씬 비슷했지만 훨씬 더 발전했다. 제임스 에머슨 테넌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시설에 도달한다.[22]

파라크라마 사무드라와 같은 더 큰 댐에서 인공 바다에 이르는 신성한 건축물은 항상 첨단 기술을 필요로 했고 독특한 방식으로 지어졌다.[23]

바타다게[편집]

바타다게

아누라다푸라 시대부터 지어진 바타다게들은 폴론나루와 시대에 정점에 달했다. 폴론나루와 바타다게는 모든 바타다게 중에서 "궁극의 창조물"로 여겨진다. 바타다게는 작은 스투파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24] 이 구조물에는 정교한 석조 조각으로 장식된 두 개의 돌 기단이 있다. 하부 기단은 북쪽을 향한 하나의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고, 두 번째 기단은 네 개의 기본 지점을 향한 네 개의 출입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위쪽 기단에는 스투파가 있다. 네 개의 불상이 그 주위에 앉아 있으며 각 불상은 입구 중 하나를 마주보고 있다. 세 줄의 동심원 석주도 여기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나무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구조물은 석조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산다카다 파하나와 같은 폴론나루와 바타다게의 일부 조각은 이러한 건축적 특징의 가장 좋은 예로 여겨진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목조 지붕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이론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타다게[편집]

닛샨카 말라에 의해 지어진 란코트 비하라.

하타다게와 닛산카 라타 만다파야는 닛산카 말라(1187~1197)가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하타다게에는 석가모니가 사용한 불상과 밥그릇 등 여러 유물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라자벨리야, 푸자발리야, 갈포타 비문 등 여러 사료에는 60시간 만에 축조됐다는 기록도 있다. 싱할라어로 하타는 60개, 다게는 유적 성소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하타다게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60개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많은 건축물들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닛산카 말라의 주요 의도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작품들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조각상도 지었다.

군사[편집]

파라크라마바후는 왕국의 군대를 조직했다. 대부분 다른 불교 민족들로 구성된 보조 부대가 있었다.

육군[편집]

파라크라마바후의 폴론나루와 육군에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 제1차 라자라타 전투 이전인 1140년대에는 그 병력이 무려 10만 명에 달했을 수도 있다는 게 쿨라와마사의 주장이다. 그러나 판디아 전쟁 당시의 그 병력도 그렇게 많았을 수도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육군은 란카푸라 단다나타가 이끄는 주요 군대와 대부분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보조 부대로 나눌 수 있었다.

락카는 초기 파라크라마바후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 밖에도 파라크라마바후가 루후나인 분리주의자들의 군대와 락카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한 중요한 장군들이 있었다.[25]

보조 부대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싱할라의 군대를 보충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부대들은 크게 불교계 소수민족과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군[편집]

폴론나루와 해군은 1165년에 조직되었다. 해군은 버마의 침략 때 동원되었다.[26][27]

종교[편집]

폴론나루와 시대에는 여전히 불교가 주요 종교였다. 군주들은 시암, 버마, 캄보디아의 상좌부 불교 왕들과 종교적인 보석들과 다른 값비싼 물품들을 교환하는 것을 즐겼다. 불교 왕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촐라들에 의해 야기된 힌두교의 강한 영향이 있었다. 이는 폴론나루와 월석에서 소의 형태가 제거된 것과 폴론나루와에 시바 사원들이 있었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촐라 통치기 이후, 비자야바후 1세와 그의 후계자 파라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많은 비하라들이 보수되었다.

불교[편집]

폴론나루와 왕국에서 행해지는 불교의 주요 형태는 정통 불교 학파였으며, 버마의 종교 개혁 이후 그곳의 많은 승려들은 폴론나루와 승려들과 수행법을 일치시켰다.[28]

크메르 국왕 자야바르만 7세는 그의 아들 타말린다를 폴론나루와로 보내어 팔리어 불경 전통에 따라 불교 승려의 서품을 받고 상좌부 불교를 공부하게 했다. 그 후 타말린다는 앙코르로 돌아와 자신이 받은 상좌부 수련법에 따라 불교 전통을 전파했고, 수세기 동안 앙코르 곳곳에 존재했던 상좌부 불교의 오랜 존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갤러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판디아 내전(1169년 ~ 1177년) 시기 확보한 라메슈와람마두라이의 인근 마을
  1. Magha was defeated and his forces abandoned Polonnaruwa, Vijayabahu decided to not invade further into Jaffna which would have led to a weakening of his armies
  2. This version of the Mahamvamsa was written during the Polonnaruwa period, it includes the content from the Culawamsa.

참조주[편집]

  1. De Silva, 101쪽.
  2. De Silva, 58쪽.
  3. Wright 1999, 37쪽.
  4. Balasubrahmanyam 1971, 255쪽.
  5. Sri Lanka in Early Indian Inscriptions. p. 5
  6. Finegan 1989, 323쪽.
  7. Keuneman 1983, 39쪽.
  8. Fernando & Pieris 1973, 14;15;19쪽.
  9. Haraprasad Ray 2007, 172쪽.
  10. Corrington 1926, IV쪽.
  11. Obesekara, 136-8쪽.
  12. Obesekara, 38쪽.
  13. Wijesekera 1984, 176쪽.
  14. Rambukwelle 1993, 136, 163쪽.
  15. Corrington 1926, 67쪽.
  16. Manchanayake & Bandara 1999, 4쪽.
  17. Yapa 2010.
  18. Finegan 1989, 468쪽
  19. Robert, 224;225쪽.
  20. Paranavitana & Nicolas 1961, 204–205쪽.
  21. Barnes & Parkin 2015.
  22. Mendis 1996, 248쪽.
  23. Siriweera 2002, 174쪽.
  24. Siriweera 2002, 285쪽.
  25. Edirisuriya, C., 《Parakramabahu I》 
  26. Richard, S. 《Sri Lanka》. 228쪽. 
  27. The Maritime Frontier of Burma: Exploring Political, Cultural and Commercial Interaction in the Indian Ocean World, 1200-1800. p. 43
  28. Harvey 1925, 55쪽.

참고 문헌[편집]

  • Finegan, Jack. 《An Archaeological History of Religions of Indian Asia》. Paragon. ISBN 0913729434. 
  • Siriweera, I. (2002). 《History of Sri Lanka: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Sri Lanka. 
  • Manchanayake, Palitha; Bandara, M (1999). 《Water resources of Sri Lanka》. National Science Foundation. 
  • Barnes; Parkin (2015). 《Ships and the Development of Maritime Technology on the Indian Ocean》. India. 
  • Rambukwalle, R. 《Commentary on Sinhala Kingship》. 
  • Yapa (2010). 《Sri Lanka》. Imgram Publications. 
  • Robert, R. 《A history of Early Southeast Asia》. 
  • Obesekara. 《Heritage of Sri Lanka》. 
  • Corrington, H.W (1926). 《A Short History of Ceylon》. London: Macmillian publishers. 
  • Wijesekara, G. 《Heritage of Sri Lanka》. 
  • Fernando, M.; Pieris, M. (1973). 《History of Ceylon (Sri Lanka)》. 
  • Sein, M. 《Burma》. 
  • de Silva, K. 《A History of Sri Lanka》. 
  • Paranavitana, Senarat; Nicolas, C. (1961). 《A Concise History of Ceylon》. Colombo: Ceylon University Press. OCLC 465385. 
  • Briggs, P. (2018). 《Sri Lanka》. Bradt Travel Guides. 
  • Keuneman, Hubert (1983). 《Sri Lanka》. A.P.A Publications. 
  • Haraprasad (2007). 《Post-humious papers of prof. Ahdir Chaktravati》. RNB.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