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문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4년 1월) |
고정문 高定問 | |
출생일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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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성별 | 남성 |
지휘 | 고구려군 |
주요 참전 | 고구려 부흥운동 |
고정문(高定問, ?~?)은 고구려 부흥운동가이다.
생애[편집]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다른 지역에서 구국운동을 하던 고연무, 검모잠 등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장수였으며, 부여성 전쟁에서 이미 당나라에 항복했던 고구려 유민 이타인과 부장이었던 당나라의 양현기에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묘지명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편집]
1997년 당나라 양현기의 묘가 (陽玄基墓志)가 낙양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묘지에서 양현기의 직책이 동책주도독부장사라고 하였고,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總章元年,授鹿陵府長上折沖,仍檢校東柵州都督府長史。誅反首領高定問等,封定陽郡公,食邑二千戶。”
- 총장 원년(668년)에 검교동책주도독부장사에 오른 양현기는 반수령(反首領) 고정문을 베어 식읍 2천호와 정양군공에 올랐다.
또한 중국 소재 고구려 관련 금석문 자료집에 나온 고구려 유민으로 당에 투항했던 이타인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卽而薑維構禍, 復擾成都, 穟穴挺妖, 俄翻穢境. 又奉詔進討扶餘, 重翦渠魁。”
668년에는 고구려 유민 이타인이 이미 즉 당나라에 투항하여 책주도독에 오른 후이며, 이타인은 부여성에서 그때까지 투항하지 않고 항쟁하는 고구려 유민들과 전쟁을 하였고, 그 우두머리(渠魁)를 죽였다고 나와있다. 시기적으로 이미 이타인이 3차 고구려-당 전쟁 때 이적에게 항복하여 당나라에 가서 우융위장군(右戎位將軍) 이 되고 난 후의 기록이며, 양현기는 책성도독 이타인과 같이 책성 부근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타인이 당나라 상원2년(6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어서 이 전쟁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 675년 사이의 고구려 각지에서 아직 항복하지 않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하던 시기로 간주된다.
따라서 양현기, 이타인의 묘지명의 기록들을 볼 때 고정문(高定問)은 역사서에 나와 있는 대로 고연무, 검모잠 등과 같은 고구려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장수였으며, 부여성에서 전쟁을 하여 고구려 유민으로 당에 항복한 이타인과 당나라 양현기에 패하여 죽었다고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