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 변호사로 교육받았으며, 1530년경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회심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도에 대한 광범위한 폭력사태로 긴장이 고조된 후, 스위스의 바젤로 피난하여 1536년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같은 해에 제네바의 프랑스인 기욤 파렐에 의해 등용되어 제네바로 이동한 뒤, 도착한 한 주 내내 설교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그들의 주장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 둘은 모두 추방되었다. 이후 마르틴 부서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로 나아가 그곳에서 프랑스 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제네바에서 벌어지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지하였고, 결국 1541년에 다시 초대받아 제네바의 교회를 이끌었다.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키는데 가담한 사실은 현대까지 논란의 여지를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