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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 역사[편집]

과학적 사고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던 시기 의학이라는 학문을 대표하는 분야는 내과학이었다. 내과는 엉뚱하고 현실에 동떨어진 철학적 사고에 좌우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외과적 처치, 특히 응급한 목적으로 시행하여야만 하는 시술에 있어서는 그런 하구에 찬 이론이 간섭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응급이 아닌 선택적 시술 분야의 외과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은 해부학, 마취, 세균학 등 외과와 관련된 다른 의학 분야의 지식들이었다. [1]

원시의료에서도 전쟁이나 사고로 외과적 처치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나 사체의 해부, 제왕절개, 사지절단술 등은 오직 종교적, 주술적 이유로 시행되었으므로 해부학적 지식이나 실질적인 외과치료기술의 축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1]

고대 이집트인들은 종교적 이유에서 청결을 강조하였고 많은 미라를 만들었으나 종합적인 인체해부학 지식은 매우 빈약하였다. 궁정에서 일하던 의사들은 상류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함무라비 법전은 '농양을 째고 눈이 나으면 은 10셰켈을 받고 환자가 노예일 경우는 그 주인으로부터 2셰켈을 받는다. 그러나 환자를 죽게 하거나 눈이 멀게 되면 의사의 두 손을 자른다'는 눈 주위에 생긴 농양 치료에 관한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역사상 최초의 의료과실에 관한 배상 및 처벌에 관한 규정이다. 인도에서는 다른 고대문명에 비해 외과가 특히 발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의학의 외과 처치에 쓰였던 기술에는 절개, 절제, 소파, 탐침, 침구, 추출, 분비촉진 또는 배농, 봉합 등이 있었으며 스페큘럼, 부지, 후크 등의 다양한 수술기구와 붕대가 사용되었다.[1]

히포크라테스는 자연은 스스로 낫는 힘이 있으므로 치료는 주로 식이요법을 사용하도록 권장하였고, 축농증의 절개술이나 천두술 등과 같은 외과적 수술은 최후의 보조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 의학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갔다. 이 시기의 의학자로는 헤로필로스, 에라시스트로타스 등이 있다. 로마의 의학서를 대표하는 켈수스의 백과전적 의학 책은 알렉산드리아 의사들의 지식을 수집하여 편집한 것이었다. 염증의 네 가지 고전적 징후(rubor, dolor, color, tumor)도 여기에서 기술하고 있다. 갈레노스는 여러 의학파들의 의견을 통합한 해부학자이며 생리학자였는데 의학을 과학으로 만든 최초의 의사였다고 할 수 있다.[1]

중세에는 교회권력에 의해 갈레노스의 의학이론이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져 르네상스 시대까지 의학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1163년 '교회는 유혈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투르 종교회의 결정에 따라 의사가 외과를 다룰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외과는 이발사, 목욕탕 주인, 망나니 등의 무자격자들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방혈법과 같은 치료 방법이 널리 퍼졌다. [1]

르네상스 의학의 중심이 된 것은 해부학이었다. 실제 임상 의료의 면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만한 외과 의사는 파레였다. 그는 1545년 처음으로 총상 치료에 관한 책을 썼다. 이같은 파레의 업적에 의해 중세의 외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1]

19세기에는 부검(autopsy)이 많이 행해졌고 임상적 관찰이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임상의학의 시대라고 부른다. 통증의 문제와 창상감염의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는데 마취법과 방부법의 발견이 그것이다. 상처부위를 소독하는 방부법을 개발한 리스터와 외상에 합병되는 6종류의 세균을 동정, 배양하여 그 병리 소견을 발표한 코흐의 업적에 의해 갈레노스의 생리적 화농설이 부정되었다.[1]

  1. 대한외과학회 (2017). 《외과학》. 군자출판사(주). ISBN 979-11-5955-200-7.  제1장 외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