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규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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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조선시대의 생육신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한문 소설로 고려 공민왕 때 개성에 살던 이생(李生)이 주인공이다. 한글의 자유를 주장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강조한 작품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간의 사랑을 다룬 명혼소설(冥婚小說)이라는 점에서 《금오신화》 중에 김시습의 다른 작품인 만복사저포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金集, 1574 ~ 1656)의 수택본 한문소설집에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더불어 필사된 것이 있다.[1]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생규장전은 만남과 이별이 세 차례 지속된다. 먼저, 제1 차 만남이별에서는 그 만남이 등장인물의 기질에 따라 비대칭성을 이루 며 진행되었다. 소심한 남자와 대범한 여자, 열정에 그친 남자와 거기에 더하여 결심/헌신으로 나아가는 여자가 만나, 서로의 간극을 좁히는 데는 실패하고 마는 대목이다. 두 번째 만남과 이별에서는 개인의 기질을 넘어 그들의 생장 환경에 따라 만들어진 성격이 문제가 되는데, 특히 가문과 가문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富貴榮華를 누려온 최랑 집안과 한미 한 이생 집안이 지향점을 달리하면서 긴장이 조성되었다. 마침내 전란을 만나 국가간의 문제로 확대되면서 파국을 맞는데, 이생이 절의를 위해 목 숨을 버림으로써 종적을 감춘 이생과의 어긋남이 더욱 극심해졌다. 끝으로, 세 번째 만남과 이별은 앞의 두 차례 만남과 이별에서 보여준 등장인물의 행보가 뒤바뀌는 양상이다. 혼령으로 다시 나타난 최랑이 이별을 고 하자 이생이 막고 나서는 형국이 되어 그간의 비대칭성을 깨고 대칭적인 사랑을 일구어낸다. 이생규장전에서의  ‘만남이별’ 은 다양한 층위에서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지면서 맨 아래층 부터 위층으로 차곡차곡 포개나감으로써 독특한 서사 구조물이 완성되어 나갔다. 또, 소설에서 한 사건이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면서 서로 맞설 때 긴장이 이루어지는데, 중층성과 어우러져 소설적 응집력과 완결성이 커졌다. 이를 통해 볼 때, 이생규장전은 최랑의 입장에서나 이생의 입장에서 사랑의 성취라는 공동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생규장전은 전기소설이고, 전란 모티프가 삽입되어있다. 우리나라 전기소설, 특히 애정을 주제로 한 전기소설에는 대부분 전란 모티브가 삽입되어 있다. 김시습의「만복사저포기」와「이생규장전」 등이 이에 해당한다.「만복사저포기」와「이생규장전」에는 고려 말에 있었던 왜적과 홍건적의 침입이 전란 모티브로 삽입되어 있다. 사실 전란이 단순히 시대적 · 사회적 배경으로서만 작용하고 있다면, 우리가 이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 가운데 상당수의 작품에서 전란이 주인공들의 삶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로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전기소설에 나타난 전란 모티브의 성격을 『금오신화』의 서사방식으로서 검토하였다.

줄거리[편집]

고려 때 개성에 살던 이생(李生)이라는 열 여덟 살의 수재(秀才)가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선죽리(善竹里)에 사는 대귀족의 딸인 최처녀를 보게 되었다. 최처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설렌 이생은 시를 적은 종이를 최처녀가 사는 집 담 안에 던졌고 최처녀 또한 이에 화답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생은 최진사의 집을 찾아 정략결혼을 맺기로 약속을 했다. 며칠간 최처녀와 시간을 보낸 이생은 그 이후에도 매일같이 최처녀의 집을 드나들었지만 아버지가 이를 알고 크게 꾸짖으며 다른 곳으로 쫓아버렸다.

최처녀는 이생이 개성을 떠난 지 여러 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해 몸져 누웠고 최처녀의 부모는 딸이 이생과 주고받은 시를 보고서야 병의 원인을 짐작했다. 최처녀의 부모는 이생의 집에 중매를 보내 자식들을 맺어주자고 청하고 이생의 부모도 이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혼례를 치렀다.

이생은 높은 벼슬에 올라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신축년에 홍건적의 난으로 양가 가족이 모두 흩어지고 그 와중에 최처녀도 도적에게 잡혀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최처녀는 차라리 겁탈당할 바에는 자신을 죽이라 말했고 화가 난 도적은 최처녀를 살해하였다. 난리가 끝난 후 이생은 본가에 찾아갔다. 그러나 집은 불타고 없었다. 최처녀의 집에도 가봤으나 최처녀는 보이지 않았고 절망에 빠진 이생은 슬퍼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죽었던 아내가 환생하여 이생을 다시 찾아왔다. 이생은 그녀와 함께 죽은 부모의 유해를 수습했다. 인간사와는 연을 끊고 최처녀와 이생은 금슬좋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최처녀는 이생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생과 최처녀는 서로가 인연이 남아 있었고 죄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신이 한을 풀 수 있도록 잠시 같이 있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슬퍼하는 이생을 남겨두고 최처녀는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생 또한 아내를 장사지낸 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절개를 칭찬하였다.[1]

응용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

  • 금오신화
  •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각주[편집]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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