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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강희제/보존문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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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3년 전 (Naturehead님) - 주제: 출처의 웹사이트 확인

초기 생애 중 강희제의 부, 순치제와 그 부인들에 대한 부분

안녕하십니까? 청나라 황제들에 궁금한 점이 참 많았는데 좋은 글 읽어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서 작성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1. 그런데 "초기 생애" 단락을 읽다 보면 순치제와 그 부인들에 대한 부분에서 너무 많은 이름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순치제의 부인들과 그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 너무 길게 나와 있어서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내용을 강희제에 초점을 맞추고 요약해서 기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 마찬가지로 첫 요약 부분을 보다 간략하고 쉽게 기술하였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첫 문장인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자살 직후 명나라가 멸망한 뒤 청 군대의 입관(入關)[1]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에서 "명나라 황제 숭정제의 자살 직후"라는 부분은 빼는 것이 요약의 성격에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에 명나라가 멸망한 뒤 청 군대의 입관(入關)[1]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더나아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청 군대의 자금성 점령 [1]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3. 초기 생애의 첫 문단은 다음과 같이, "...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辰時, 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戌時, 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는데도 불평불만이 없었다고 한다."라고 강희제의 어린 시절에 대한 평가글이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에 근거를 명확하게 기술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구나 본문에서도 "...공부하는데도 불평불만이 없었다고 한다."라는 재인용을 했기 때문에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독자적인 견해로 비추어지거나 다소 근거 없는 미화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근거는 한둘이 아닌 여러 근거를 제시해야 위키백과 내에서 공식적인 평가로 다른 위키인들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위와 같이 표제어 강희제 글은 전반적으로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알찬 글이지만, 글의 표현이나 근거 부분에서 보완할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쿨쿨 (토론) 2011년 1월 28일 (금) 17:52 (KST)답변

변을 드리자면 1번은 강희제가 황제가 될수록 해준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그 자신이 휘말린 적은 없지만 당시 순치제의 후궁에 대한 추숭작업은 꽤나 논란거리였고 이것때문에 상심하여 순치제가 죽습니다. 실록이 어린 황제의 관점에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수 없다고 봅니다. 2번의 숭정제 부분은 바로 없애지요. 3번도 역시 실록에 나온 내용이긴 합니다만 약간 미화적인 내용이 담겨져있네요. 문제거리는 몇부분은 지우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1:32 (KST)답변

단락 구성

많은 내용이 담긴 알찬 글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풍부한 글을 좀더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면 합니다. 단락 구성에 대해 의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삼번의 난도 역사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표제어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 오배의 난은 이미 별도의 표제어가 있기 때문에 삼번의 난과 함께 내용을 간략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3. 대만 수복의 상당수는 정성공에 상세하게 기술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명 '강희제의 대만 수복'은 '정성공'과 그의 후예들의 몰락이니까요. 따라서 정성공에 대한 부분은 여기서 설명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4. 러시아와의 갈등은 네르친스크조약의 배경과 경과, 결과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룰테니 간략하게 서술하고 네르친스크 조약을 단락 제목 밑에 링크로 걸어 두어도 될 것 같은데요.
  5. 전반적으로 전쟁과 관련된 부분에 너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강희제의 공적인 삶에서 전쟁이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내정을 잘 한 훌륭한 황제라는 평가도 있으니까요.
  6. 본문를 읽고 나면, 강희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강희제 기간의 청나라가 어떠했는지 알게 되네요. 특히 청의 궁정 상황에 대해서요. 삼번의 난에서는 베트남의 역사가 나오네요. 간략하게 작성해도 될 것 같은데요. 1673년(강희 12년)에 베트남의 두 명가인 찐(鄭) 가문과 응우옌(阮) 가문 사이의 101년간의 오랜 분쟁을 중재하였다. 이렇게요. 원문인 "베트남에서도 두 명가인 찐(鄭) 가문과 응우옌(阮) 가문이 1572년 분란이 시작된 것이 1627년 찐-응우옌 전쟁으로 악화되어 46년 동안 쉬지 않고 싸워 베트남의 사정이 매우 피폐하였는데, 삼번의 난이 일어난 해인 1673년(강희 12년)에 강희제는 이 두 가문을 잘 중재하여 101년간이나 계속된 두 가문의 불화를 씻어주었다."의 의미는 다 담은 것 같은데요. 강희제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많이 알게 되어 좋긴 해요. 그렇지만 표제어가 강희제이니 강희제에 좀더 초점을 두고 편집되었으면 합니다. 역사적 인물을 설명할 때 생애를 몇 단계로 나누어서 기술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오배의 난이나 삼번의 난으로 단락 제목을 삼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시간 순서를 거스르는 서술이 없었으면 합니다. 영문이긴 하지만 영국의 왕 중에서 일화가 많은 영국의 헨리 8세를 참조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문서가 커서 직접 수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서 훼손한다는 오해를 들을 것 같아서요. ^^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5:32 (KST)답변
시간 순서에 모두 맞습니다. 삼번의 난은 이미 표제어가 따로 있구요. 오배의 난은 궁중 사건이라 별다른 내용이 없구요. 요즘 제가 많이 안들어오는 관계로 정성공 문서에까지 옮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네르친스크 조약 링크는 이미 본문에 걸려있구요 전쟁과 내정을 둘다 설명하였습니다. 어차피 강희제의 처음 반생은 전쟁, 후기의 반생은 내정과 후계자 다툼이니까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6:06 (KST)답변

적절한 단락 제목 사용 필요

문서 편집으로 한번 문제 제기를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아서 일단 글을 남깁니다.

  1. 대만수복:대만은 명나라-네덜란드-남명(연평국)-청나라 이렇게 되는데 어떻게 수복이 되나요? 강희제 개요에서 쓰신 것처럼 '대만 복속'이 더 나은 것 같은데요.
  2. 천수연과 성군의 붕어:강희제는 훌륭한 황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키백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여요. '천수연과 붕어' 정도가 나을 것 같고, '천수연과 죽음'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3. 안정의 내정: 강희제의 업적만 다룬 자료만을 참고해서인지 조금 '용비어천가' 같은 느낌이네요. 문법적으로는 '내정 안정' 더 적합할 것 같구요. 중립적인 시각이라면 '내정'이 더 좋겠네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5:57 (KST)답변
단락 내용이 오히려 황제의 입장에서는 상관없다고 보여집니다. 안정의 내정이나 성군의 붕어나 그리고 죄송하지만 실록이 어차피 '용비어천가' 아닌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6:04 (KST)답변
위키백과가 황제의 입장에서 쓰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중립적인 입장에서 써야 하지 않나요? 대한민국 문서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일본 문서는 일본의 입장에서 미국 문서는 미국 입장에서 이렇게 쓰면 그것이 중립적인 건가요?
안정의 내정이란 표현이 이상하지 않다니 의아합니다. 문법 상 아주 이상해 보이는데요. 이런 표현 다른 곧에서 보신 적 있나요? 제 생각엔 없을 것 같은데요. 최소한 '내정 안정'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실록만 사용하진 않으셨지 않나요? 올려 놓으신 참고문헌들. 그것들의 어떤 부분이 어디에 사용했는 지 알려 주시면 됩니다. 이건 위키백과:확인 가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침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6:21 (KST)답변
내정 안정으로 바꾸긴 하겠습니다. 그리고 3년전에 선정된 알찬 글입니다. 그것을 언제 다시 조사해서 몇페이지마다 조사해서 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나치게 지침을 따르라고 하시는데 그점도 고려를 하시기 바랍니다. 또 당시의 사료중에서 그 황제 재위때 쓰여진 실록말고 더더욱 정확한 자료가 있나요? 야사집을 참고할 순 없구요. 그래서 밑에다가 비판이란 단락도 만들었는데도 지적을 하시는군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6:23 (KST)답변

출처 요구

강희제 문서는 본문의 문장에 출처를 밝히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편집 필요}}로 출처 밝히기를 요구했었습니다. 다시 요구하는 바입니다. 참고문헌으로 사용한 것들의 어떤 페이지를 어느 본문에 사용했는 지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위키백과:확인가능 지침을 존중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밝힐 수 없다면 이 문서는 검증 불가능한 문서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6:30 (KST)답변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느 문서에서 출처가 확인이 안된다고 하시는지요? 제가 열거한 책들은 그냥 있는 장식인가요? 참고 문헌이라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참고한 책으로 책 전체를 참고했다는 뜻이지 어느 페이지만 골라서 참고한 것이 아닙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6:32 (KST)답변
다른 문서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세포이를 참고해 보세요. 주석에서 페이지별로 밝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참고문헌을 남기는 것은 본문에 쓰인 글이 어디서 왔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 삼자가 그것을 보고 검증할 수 있으니까요. 검증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어디를 참조했는 지 밝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위에서 바늘 찾는 일을 해야 하니까요.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선의는 인정합니다만 출처는 밝혀 주셔야 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6:41 (KST)답변
결국엔 본문에 쓰인 글이 참고문헌에서 왔는데 그것이 같은 겁니다. 그리고 위키백과 편집 지침이나 선정 기준에서 출처는 페이지마다 세세하게 기록되어야 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정확하게 참조한 것이 맞는데 제가 열거한 책들이 장식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도 더이상 뭐라 드릴 말이 없네요. 출처는 출처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6:44 (KST)답변
그렇다면 최소한 본문의 각 내용에 11개의 참고자료 중 어느 것을 사용했는 지는 밝혀 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6:49 (KST)답변
밑에 주석도 같이 있지 않습니까? 실록을 제외하고는 추가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6일 (수) 06:51 (KST)답변
실록을 제외하고는 출처를 밝혀 주신다닌 기다려 보겠습니다. 주석은 설명만 있던데요. 예를 들면, '강희'의 주석은 '표기에 따라서 康煕, 또는 康熈라 쓰기도 한다.' 이것이 출처인가요?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요. 주석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신 건데요. 세포이 다시 참고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06:56 (KST)답변
윤성현님의 "위키백과 편집 지침이나 선정 기준에는 출처는 페이지마다 세세하게 기록되어야 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주장에 대해 위키백과:출처 밝히기#예시를 참고하실 것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위키백과 지침입니다. 참조할 부분을 페이지까지 작성하는 것은 글이 객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주장할 때 상식적인 차원 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글이 독자적인 연구인지 그렇지 않은 지를 검증할 수 없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6일 (수) 16:15 (KST)답변
페이지는 지침이 아닙니다. 결국엔 여전히 제가 써놓은 참고문헌을 장식으로만 생각한다는 뜻인데 참고문헌은 책 전체를 본 것이라서 특정 페이지만 골라서 참고문헌 단락에다 넣기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03:52 (KST)답변
쿨쿨님이 윤성현님의 참고문헌을 장식으로만 생각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리고 윤성현님은 논문 안 써 보셨나요? 논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위의 "출처 밝히기"를 읽어보니, 쿨쿨님의 지적이 타당해 보입니다.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04:06 (KST)답변
위의 토론에서 한번도 제 입으로 윤성현님이 선택하신 참고자료를 '장식품'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가지고 계신 참고자료를 폄훼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단지 참고하신 자료를 검증할 수 있을만한 수준에서, 즉 위키백과의 지침에 맞게 활용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알찬 글이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풍부한 내용이 보다 빛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불편한 일이지만 타이핑을 치고 있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04:13 (KST)답변
안봤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만드신 후보 문서에도 참고 문헌과 주석 모두 페이지를 붙이지 않으셨던데 그렇다면 제 의견이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08:11 (KST)답변
제가 작성한 문서에는 참고 문헌은 말 그대로 참고 문헌이고, 발췌한 부분은 일일이 다 주석을 명기해 놓았습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제대로 읽지도 않고 반대표 던졌다는 것이 님의 말에서 여실히 드러나는군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2:18 (KST)답변


실록의 페이지를 찾으라는 말은 어렵습니다. 위키문헌이란 곳에 있는데 그곳에서 열람이 가능해서 번역을 한것인데 그것이 잘못되었나요? 차라리 주석에다가 페이지 번호를 넣겠습니다만 참고 자료는 말씀드렸듯 책 전체를 넣기때문에 특정한 페이지만 골라서 넣을 수가 없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08:11 (KST)답변
도대체 페이지를 붙인다고 달라지는 점이 뭐가 있습니까? 책설명과 ISBN, 책제목까지 다 넣었는데 굳이 페이지를 붙인다고 달라지는 점은 없다고 봅니다. 참고문헌에다가는 일체의 페이지 번호를 넣지 않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08:16 (KST)답변

그리고 문서 정리 틀은 문서가 지저분할 때 쓰는 글이지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고 쓰는 틀이 아닙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08:26 (KST)답변

말씀드렸듯 참고문헌의 많은 부분을 인용해서 썼기에 각 페이지마다의 출처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 이건 3년 전에 선정된 알찬 글입니다. 다시 도서관에 가서 저보고 일일이 조사하라 하시는데 그것이 다 기억나기 어렵기에 전부 출처를 증명하라는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1] Reference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의 어떤 부분도 페이지를 넣지 않았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08:36 (KST)답변

의견 윤성현님은 이런저런 구차한 핑계 대지 마시고 위키백과:출처 밝히기#예시부터 읽어 보세요. 오래 활동하며 알찬글 선정위원이 된 분이라면, 최소한 합당한 지적을 수용하고 고칠 건 고쳐야죠.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2:25 (KST)답변

죄송합니다. 3년전에 선정된 글을 다시 도서관에서 빌려가며 페이지 찾아가면서 고치긴 무리입니다. 이미 저번에 표제어같은 것도 수용하여 고쳤습니다만 이러한 참고 문헌을 책 전체를 쓴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특정한 어느부분만 쓸 수 없으니까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12 (KST)답변

출처를 요구합니다

다음과 같은 부분들에 대한 출처를 요구합니다 :

  • 흔히 순치제가 이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하나, 그때엔 이미 천연두가 진정되었고 조정에서 급작스럽게 붕어 사실을 발표하여 순치제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다. 이로 인해 불심이 깊어던 순치제가 스스로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는 설이 있다.
  • 보정대신들은 과거 환관들이 여러 번 나라를 망치는 데 주범이었다는 것과 당시 환관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라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까 봐 신속히 십삼아문을 폐지하였다.
  • 당시 오배의 전횡으로 많은 백성들이 조정과 관아에 탄원하였으나, 오배의 권력이 워낙 막강하였기에 들어주지 못하고, 심지어는 오배의 하수인들이 탄원한 백성들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하여 백성들의 눈총을 받았다.
  • 당시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던 장군들은 거의 한족이었는데 이들은 삼번에 대해 동족감을 느꼈으며, 군부에서 오배 다음으로 실세였으며 막강한 군세를 지닌 오삼계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하여 스스로 삼번 연합군에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 당시 서양 사회에서 보내는 선물을 동양의 강희제는 이것을 조공으로 오해하고 러시아가 자신의 신하국이 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였다.
  • 현세적인 유교를 숭상한 강희제는 내세를 따지는 기독교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 선교사들은 부유한 궁정에서 설교하는 대신, 청나라의 한족 서민들에게 포교하려 하였으나 현세적인 한족과 만주족 등은 포교에 잘 응하지 않았다.
  • 선교사들은 같은 서양인인 러시아인들에게 청나라의 정보와 중국의 지도 등을 건네주는 간첩 역할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천황가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된다는 상식적인 부분에 대해 (본인도 인정하면서) 트집을 잡는 윤성현님께 위의 출처들을 밝혀주실 걸 요청합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24 (KST)답변

이미 말씀드렸듯 참고문헌에 쓰여진 것을 바탕으로 또다시 같은 출처를 쓴다는 것이 의아하군요. 참고문헌에 쓰여진 출처를 주석에다 쓰기도 하나요? 아닌줄로 압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25 (KST)답변
최소한 어느 참고문헌인지, 그리고 (실록은 너무 방대해서 이해하지만) 단행본의 경우 몇 쪽에서 몇쪽에서 발췌 혹은 인용했는지 등, 기초적인 것들 모르시나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28 (KST)답변
몇쪽에서 몇쪽은 주석용입니다. 참고문헌에까지 쓰는 것은 아니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29 (KST)답변
궤변도 정도껏 하세요. 저 윗부분들을 주석처리해 놓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 부분들을 어느 참고문헌에서 발췌했는지라도 밝히라는 거지요. 그게 아니면 독자연구라고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30 (KST)답변
윗부분의 문장들을 주석처리했으니 결국엔 출처가 확인된 겁니다. 주석에도 갖은 출처가 있는데 그것 중에서 출처 아닌 출처가 있던가요? 그리고 참고문헌과 주석 문단은 다릅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32 (KST)답변

(계속 오른쪽으로 가길래 들여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까? 무작정 주석처리만 하면 출처가 확인된 겁니까?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34 (KST)답변

'소리'란 말은 주의하세요. 점차 말씀이 격해지시네요. 주석을 출처로 삼으라고 하시는데 굳이 원하신다면 저 주석 중 몇부분은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3년전에 선정된만큼 제가 현재 가지고 있는 책의 한도내에서만 정하겠습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37 (KST)답변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계속 하시네요. 모든 출처를 찾을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최소한 "알찬글"이라면요. 그렇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고 비쳐질 수 있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39 (KST)답변
분명 '소리'란 말은 주의하라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출처를 3년만에 다시 찾아 끼어붙이는게 가능한가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41 (KST)답변
'소리'란 말이 뭐 어때서요? 주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지를 회피하면서 별 이상한 트집 잡지 마세요. 그리고 알찬글 자격을 유지하려면 출처를 댈 수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본문에 명시해 놓지 않았다면 말이죠.--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43 (KST)답변
주석 옆에 보면은 출처가 있습니다. <ref>처리 된 부분은 다 거기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는 소리란 말은 토론할 때는 좋지않은 어투입니다. 상대방을 기분나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47 (KST)답변
주석 옆에 출처가 없는데요?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47 (KST)답변
본문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윤성현 · 기여 · F.A. 2011년 2월 17일 (목) 13:47 (KST)답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겁니까? 그리고 대만 복속에는 주석 자체가 전무하며, 다른 부분에도 상당히 많은 분량에 비해 주석은 겨우 1~2개 정도로 극히 적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49 (KST)답변

문서 전체적으로 주석은 나무랄때 없이 잘되있습니다. 그리고 Shine for all님꼐서 지적하신 대만 복속과 그외 주삭이 부족한 문단은 우선은 참고 자료를 참고하여 이해를 해주시기 바라며, 윤성현님을 비롯한 강희제 문서에 관심있는 분들께서 시간이 나면 보충 주석해주시면 되겠네요. 이런것 가지고 너무 토론이 과열되는거 같아 보기 안좋습니다.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3:57 (KST)답변
왜 보기 안 좋다는 겁니까? 토론이 필요하면 해야죠. 그리고 출처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본인이 그 출처를 대는게 어떻냐고 하는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02 (KST)답변
토론이 너무 과열되어 토론을 하는것 같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게되는것 같아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가 토론을 하지 말자고 한적은 없었죠.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05 (KST)답변

부족한 출처와 이상한 문법

윗분들이 이미 지적한 것도 있지만, 문장의 연결이나 문법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출처 부족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옹정제나 건륭제도 보고 왔는데,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더군요. 해명해 보세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3:53 (KST)답변

부족한 출처에 대한 문장은 Shine for all님께서 직접 편집에 참여하여 고쳐보는것은 어떨까요?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3:58 (KST)답변
전 이에 대해 연구해 본 적도 없는데 왜 제가 해야 하죠?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01 (KST)답변
이에 대해 연구해 본적이 없다면 적어도 님께서 주장하신 이상한 문법에 대한 부분이라도 수정해주실수는 있겠죠?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03 (KST)답변
"능력"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의지"가 없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04 (KST)답변
그렇다면, 이 문서에 대하여 편집에 대한 "의지"가 없는것으로 받아드리겠습니다. 이 토론공간은 강희제 문서의 편집의 방향을 논하는 문서토론공간인데 문서 편집에 대한 최소한의 의지도 없으면서, 토론에 임하는 것은 문서를 작성한 기여자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오탈자나 문장의 문법적 오류 등 사용자의 능력내에서 최소한의 편집의 "의지"를 가지고 토론에 임해주시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14 (KST)답변
어이가 없네요.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사람이 반드시 그 부분을 수정해야 합니까? 정말 무책임한 발언이네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16 (KST)답변
다른 사용자에게 하는 말에는 항상 예의 있는 말투를 사용해 주세요. 위키백과에서 편집자들은 이바지하려고 이곳에 옵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개진할 때에 기여에 감사한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주세요. 우리는 싸우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21 (KST)답변
싸울 생각도 없었으며,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22 (KST)답변
저 역시 어이가 없네요. 저 또한 Shine for all님의 토론 태도에 대하여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것 밖에 없습니다. 저한테 무책임한 발언을 한다고 하는게 더 무책임 한것 같군요.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23 (KST)답변
왜 무책임한지 근거를 대 보세요. 저는 이유를 댔잖아요.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그 부분의 수정을 오히려 떠맡기는 행위는 무책임하다고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26 (KST)답변
지금까지 Shine for all님께서 토론하신 내용을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24 (KST)답변
바라봤는데, 이상없는데요? 님이야말로 제3자 입장에서 반성해 보십시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26 (KST)답변
저는 [2][3]를 보면 샤인포올님께서 기여하신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좋은글 토론에서 윤성현님이 안좋은소리를 하자 강희제문서 토론문서에다가 의도적으로 윤성현님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태도가 보였습니다. 이게 저에게만 느껴졌을까요? 그리고 저와 토론하면서도 보여준 태도는 [4] 단지 토론을 중재하러온 저에게까지 " 어이가 없네요", "정말 무책임한 발언이네요."라고 하는것은 토론하는 상대방에게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것으로 생각됩니다. --kladess, talk 2011년 2월 17일 (목) 14:50 (KST)답변
음.... 제 짧은 견해로는 “문장의 연결이나 문법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에서 샤인포올님이 정확히 어떤 문장의 문법이 이상한지에 대해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지적해 주셔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 문서의 작성자 분께서는 님께서 주장하시는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본인이 모르고 썼을 경우도 있으니까요. 전적으로 수정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은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셔야 작성자 뿐만 아니라 다른 이용자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Kin3245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5:32 (KST)답변
물론, 검토자가 수정을 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단지, 문제점을 발견한 사용자가 직접 수정에 나서는 것이 문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발견자가 수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면, 해당 내용을 기여한 기여자에게 직접 문의를 구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BIGRULE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1:05 (KST)답변
무례하군요. 근거 없는 험담이나 추측은 삼가세요.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51 (KST)답변
위의 '좋은 글 후보'에서 윤성현씨가 반대표를 던지고 얼마 안 있어 Shine for all씨가 '강희제' 문서 및 그 토론문서에서 비판하는 것이 보이니, 그 둘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여길 만하다고 봅니다. --파란악마 (소개/토론/기여/정보/로그/메일) 2011년 2월 17일 (목) 15:07 (KST)답변
사실로만 따진다면 인과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5:08 (KST)답변
사실로만 따진다면 '자신의 문서가 좋은 글에 선정되는 것을 누군가에게 반대당한 어떤 사용자가, 몇 시간 뒤에 그 반대자가 작성한 문서에 나타나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군요. Shine for all씨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문서를 작성한 사실과, 앞의 문서의 마무리가 끝나고 2분 뒤에 Shine for all씨가 좋은글 후보 문서에 앞의 문서를 추천한 사실 사이에도 아무 인과관계가 없으리라고 저는 믿겠습니다. --파란악마 (소개/토론/기여/정보/로그/메일) 2011년 2월 17일 (목) 15:19 (KST)답변
의심을 당하는게 억울해서 좋은글후보에서 기각해버렸습니다.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5:44 (KST)답변
이제 와서 내린다 한들 저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지요. 그리고 편집 지침을 철저하게 따르고자 하는 분께서, 기록으로 남은 의견을 이런 식으로 삭제[5]하시는 것은 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백:토론 --파란악마 (소개/토론/기여/정보/로그/메일) 2011년 2월 17일 (목) 17:03 (KST)답변
위키백과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직접 오류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라서, 오류를 지적한 사람이 수정하라는 주장은 타당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쉼표가 좀 적어서 문장이 긴 편이라는 것을 빼면 딱히 문법적 오류는 없어 보입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곳이 이상한지 집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파란악마 (소개/토론/기여/정보/로그/메일) 2011년 2월 17일 (목) 14:35 (KST)답변

옹정제와 건륭제 문서는 강희제 문서보단 그나마 낫길래 강희제 문서에만 출처 부족 표시를 했습니다.--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01 (KST)답변

백:출처 밝히기가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부실한 감이 있네요. 한국어판의 부족한 지침에 얽매여서 출처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건 약간 무리한 주장이 아닐까요? 한국어판의 지침은 아닙니다만, 영어판에서는 en:wikipedia:citing sources#General reference를 통하여 문서 전체에 대해 참고 문헌의 형태로 출처를 제시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확인이 필요한 문장 하나하나마다 해당하는 구절을 대응하여 출처를 제시하는 것이 확인 가능성에 있어서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참고 문헌을 제시한 것이 틀린 방향은 아니라는 겁니다. -- 더위먹은민츠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5:47 (KST)답변

백:출처 밝히기 자체를 트집잡는건 너무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식으로 문서를 편집한다면, 출처가 부족해도 이를 지적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참고문헌에 있으니 출처는 다 된거다! 이런 식으로.) --Shine for all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5:49 (KST)답변
출처 표시가 미흡해 보이면, 출전도 명시되어 있으니, 직접 찾아서 쪽수까지 표시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출처를 요구하는 경우는 보통, '출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제시된 출전에서 해당 내용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 쓰는 것일 터입니다. 제시된 출전의 한구석에서 해당 내용을 발견했으면 문서에 덧붙이면 되는 것이고, 거기서 찾을 수 없으면 그때야말로 '출처 요구'의 틀을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란악마 (소개/토론/기여/정보/로그/메일) 2011년 2월 17일 (목) 17:03 (KST)답변

혼자 댓글들

<?-- 이하 2011년 2월 17일 일어나서 다른 분들이 토론하고 있을 때 대화랑 무관하게 혼자 댓글 단 것들-->

Shine for all님의 글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되어 있는 지 모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만약 Shine님의 글에 주석이나 참고문헌 표시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면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발전시키면 됩니다. 위키 백과 문서가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습니다. 문서에 부족한 부분은 일러 주면서 발전하면 되니까요. 다른 분의 글에 문제가 있으니까 내 글도 괜찮다. 이것 적절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강희제글만 좋아지게 하시면 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34 (KST)답변

{{편집필요}}을 사용한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한 것입니다. 저도 그것이 조금 어색하고 지저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다양한 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단락의 내용이 짧은 것 같으니 늘려 달라는 {{Expand section|date=April 2010}}이나 글이 나열만 되어 있어서 산문으로 풀어서 해달라는 {{prose|date=April 2010}}입니다. 현재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런 다양한 편집의견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양해를 부탁 드리며 '이유'를 실을 수 있는 틀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가 아직 틀을 만들지 몰라서인데요. 틀 만드는 걸 알아 보아서 새롭게 틀을 만들 생각입니다. 토론 페이지보다 편집에 대한 지적인 <nowiki> {{ }}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틀의 마지막에 의견은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의 링크가 걸려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토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령 참고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한데 토론이 왜 필요합니까? 단지 이 문서의 내용이 부족한 부분이 이러하니 읽는 사람은 인지하고 글을 읽어 달라는 것과 장래의 기여자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실 분은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희제글이 윤성현님의 혼자만의 애장품이나 자식은 아니지 않습니까? 토론에 임하시는 태도가 그렇게 보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48 (KST)답변

반드시 윤성현님이 주석을 달아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일이라 하지 못하시겠다면 좋습니다. 그럼 현재 문서가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여러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상단의 틀은 유지해 주셔야죠. 제가 사용한 틀보다 간단한 {{출처필요}} 도 삭제하셨네요. 적절하지 않은 행동 같습니다. 그래야 읽는 사람이나 다음에 기여할 사람들이 알고 문서를 발전시킬테니까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4:48 (KST) 주석과 참고문헌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도서나 학술논문(특히 학술논문)과 위키백과에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학술논문에서는 참고문헌(References)에 도서의 경우에 페이지를 표기해야 합니다. 학술논물에서 인용할 때는 당연히 페이지가 포함됩니다. 주석(Notes 또는 Footnotes, Endnotes)에서는 페이지 정보가 포함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윤성현님이 많이 하신 것과 같이 어떤 용어를 명확하게 할 때는 주석에 페이지 없이 사용합니다. 이것은 논문이 독자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논문의 가치는 기존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얼마나 보태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단, 이때 자신의 견해임을 밝혀야 합니다. 반면에 어떤 내용을 참고자료에서 인용했을 때는 출처와 함께 필요하면 원문의 내용이나 자신의 해석을 적을 수 있습니다. 이때도 페이지 정보가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술연구에서는 참고문헌에 참고자료의 출력을 명확히 밝히기 때문에 주석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답변

그런데 일반적인 백과사전은 독자연구가 아닙니다. 정보의 취합과 편집입니다. 위키백과도 독자연구 금지 지침이 있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참고자료 단락에 페이지를 포함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당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주석에는 당연히 페이지 정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작성한 문서를 제 삼자가 확인가능(검증가능)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언어판 위키백과에선는 대부분 지켜지고 있습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잘 작성된 글에서는 잘 지켜지고 있죠. 현재 강희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5:08 (KST)답변

토론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윤성현님이 지나치게 방어적인 논리로만 말씀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출처에 문제가 있는데 자신이 너무 오래 전에 작성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윤성현님이 문서를 업데이트 해 달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서 상단에 {{출처필요}}을 달거나 본문 문장마다 틀을 다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위키백과 이용한 지 한 달 된 입장에서 느낀 점은 문서의 품질에 관한 지적이나 요구나 토의는 부족한 데 반해서, 위키백과의 메뉴를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윤성현님이 문서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을 수용하시면 되는 일입니다. 반드시 수정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6:17 (KST)답변

이상한 문법에 대한 수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안정의 내정'을 '내정 안정'이나 '내정'으로 바꾸는 것이 왜 어려웠을까요? 이건 윤성현님의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문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모습만 보이셔서 입니다. 토론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태도까지 말씀 드리는 상황까지 오게 되어서 아쉽습니다. 위에서 제가 나름대로 토론에서 감정적인 대처 없이 글을 작성해 왔다는 것은 Kladess님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독자연구에 대한 논란은 위에서도 있었습니다. 쿨쿨 (토론)

Kladess님의 의견은 '토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하되, 너무 과열된 분위기에서 진행하면 문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니, 양 측 모두 진정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토론의 목적은 '문서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찾는 것'이지, '누가 잘못을 했는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BIGRULE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0:53 (KST)답변
동감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2:03 (KST)답변

실록은 일차자료이기 때문에 인용태그인 <blockquote> </blockquote> (이게 맞나요?)를 이용해서 본문을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용하신 실록의 한글 번역본이 있으면 그것이 우선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일차자료는 최소화 하시고 이차자료를 이용해 주세요. 윤성현님은 중국어나 한자 자료를 해독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연구자로서 훌륭한 재능을 보유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긴 위키백과입니다. 연구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편집자로서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6:00 (KST)답변

Kladess님 강희제 문서를 좀더 살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문서에 주석은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의 대부분을 용어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입니다. 해석의 예로는 '주석 17(당시 오배의 전횡으로 많은 백성들이 조정과 관아에 탄원하였으나, 오배의 권력이 워낙 막강하였기에 들어주지 못하고, 심지어는 오배의 하수인들이 탄원한 백성들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죽이기까지 하여 백성들의 눈총을 받았다)이 있고 이 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문은 어느 문헌의 어디에서 왔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 주석이 많이 있지만 출처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Klaadess인 문서를 다시 한번 더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6:17 (KST)답변

검토자로서 타당한 문제점을 확인하고 업데이트 필요를 요청했다고 해서 수정까지 할 의무는 없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키백과 아닌가요? 지적한 내용을 해당 문장을 편집한 사람이 하는 것이 여러 모로 효율적이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원래 편집자가 할 의지가 없다면, 누군가는 다시 검토할 필요가 없게, 문서에서 문제점이 있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당 문서의 발전에 불필요한 반복적인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6:31 (KST)답변

민츠님, 저와 통하는 부분이 있네요. 그렇지 않아도 토론 어딘가에는 규칙에 얽매이지 마세요를 언급하고 싶었거든요. 위키백과 편집에 뛰어 든 지 한 달 남짓 된 제가 이해한 위키백과의 제 2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여러 정책과 지침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위키백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제시된 권장 사항들이죠. 꼭 지치키 않아도 됩니다. 특히, 문서가 발전해 가는 단계에서는 모두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좋은 품질을 문서들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참고문헌은 필수적으로 제시해야 되고, 특정 문단의 내용이 어디서 왔는지도 제시해야 합니다. 제가 느낀 제 1 원칙은 위키백과의 품질을 높이는 데 기여합시다입니다. 이러기 위해서 저작권 문제가 없는 자료에 근거해서 자신의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배제하고 제 삼자가 삼자가 검증 가능하게 작성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요" 규칙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은 여러 다양한 규칙들이 있지만 규칙이 제 1 원칙을 위배될 때 지키지 말라는 것이겠죠. 만약 제가 말씀 드린 제 1 원칙이 제 2 원칙이 된다면 그것은 혼란만 있는 위키백과가 될 테니까요. 이런 차원에서 지금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출처 요구에 대한 논쟁을 살펴 봐 주셨으면 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6:57 (KST)답변

위키백과 편집자이기 이전에 강희제 글을 읽고 참 많은 내용이 있구나 이런 것도 있었네 했던 것이 너무 철없이 느껴집니다. 좀더 살펴 보았으면 중립적인 시각의 글도 아니면 출처에 근거한 글도 아닌데, 위키백과의 알찬 글이니 많은 사람들이 검증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었던 것이 말입니다. 편집자가 되어서 이것 저것 해 보니 부족한 부분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윤성현님이든 다른 어느 분들이든 강희제에 담겨져 있는 많은 글들이 발전하길 희망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6:59 (KST)답변

<?-- 요기까지 혼자 댓글. 중간에 BIGRULE님 댓글 하나 포함 -->

의견 문서에는 이미 많은 출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문서 전체에 {{출처 필요}}를 사용하지 마시고 출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출처}}를 사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명백히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출처를 요청하는 것이 아닌 문서 전체에 대해 출처를 요구하는 것은 자칫 토론의 과열만을 불러올 뿐 실제 협업이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를 느끼는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체적인 논의가 너무 두리뭉실해서 어떤 부분이 문제라는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네요. Jjw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7:46 (KST)답변

여기서도 뵙네요. ^^ 아마도 글이 길고 몇 분께서 감정적이 담긴 것을 남겨 주셔서 그러시는 것 같네요. 그래서 저는 의견을 정리할 별도의 단락이 댓글 논쟁 뒤에 있어야 생각합니다. 현 버전의 문서에 개선되어야 부분을 알려 드린 것은 접니다. 논란의 핵심은 토론:강희제#출처 요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현재 참고문헌에 나와 있는 것들이 본문 중에 구체적으로 어디에, 또 참고문헌의 어느 부분을 참고했는 지 밝히기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 중국어 또는 한자로 된 일차자료인 청사고를 참고해서 문서의 대부분이 작성되어 있는데, 일차자료를 사용한 것이라면 인용문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차자료를 편집자(이 문제에서는 윤성현님)가 독자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이것은 곧 독자연구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윤성현님께서 3년 전의 일이라 부족한 참고자료 출처를 밝히기 어렵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출처필요}}을 상단에 두어야 하는데, 동의하지 않으시고 틀이 반복적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문제 제기가 있는데요. 토론:강희제#초기 생애 중 강희제의 부, 순치제와 그 부인들에 대한 부분, 토론:강희제#단락 구성, 토론:강희제#적절한 단락 제목 사용 필요이 있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8:40 (KST)답변
각 문장 뒤에 {{출처}}를 남길 수도 있겠지만, 모든 문장이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알려도 될 것 같습니다. 일일이 달기도 수고스럽구요. 그런데, Jjw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해가 됩니다. 현재 {{출처필요}}은 참고자료가 없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전체에서 참고자료와 본문이 유리되어 있다는 것으르 알릴 틀이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즉 현재 위키백과에서 제공하고 있는 틀이 사용자의 필요를 충분히 못 채워주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쓰고 있다고 봅니다. {{편집필요}}을 이용해서 '이유'를 밝히는 경우에 생깁니다. SFA님의 선의는 인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방법을 문제 삼기보다는 문서의 내용과 논쟁에 서 기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8:40 (KST)답변
선의로서 본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어떤 부분이 왜 문제가 되는 지를 말씀하지 않으시면 수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지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출처 필요}}와 {{출처}}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해당 틀 페이지의 안내를 참고해 주세요. 지난 번 {{정리 필요}}에 대해서도 말씀 나누었던 것과 같이 해당 상황에 알맞지 않은 틀을 사용하면 오히려 번잡한 토론만 일어납니다. 애초에 해당 문장에 {{출처}}를 사용하였다면 이렇게 긴 토론 없이 정리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요. Jjw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8:48 (KST)답변
Jjw님께서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본 문서에 관한 토론이 다양한 주제로 진행되고 길게 진행되어서 충분히 파악하고 계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고의는 아니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출처}}를 토론 초기에 사용하여 본문에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틀을 제거되었습니다. 토론 방식이나 글에 대한 방식보다는 실질적인 토론 논란에 대한 의견을 기대합니다. 예를 들면, 출처 밝히기, 독자연구 가능성, 어색한 문법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2:08 (KST)답변
제가 느끼는 기본적인 문제점은 어떠한 부분이 왜 어떻게 부족하다는 지적이 아니라 문서 전체를 뭉뜽그려 판단하려는 토론 태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사람에 대한 조롱과 도에 넘치는 감정의 표현들을 보면서 깊은 실망감을 느낍니다. 특히 사용자:Shine for all님의 태도는 선의로 보아주기에는 그 도가 지나치다 할 것입니다. 이 토론의 제일 위에 있는 해당 사용자의 의견으로는 아무리 토론이 길다고 하여도 문서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치자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위키백과는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고 문서를 작성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일단 문서의 보충을 시도해 봅니다. 이미 다른 문서에 대해서도 이러 저러한 이유로 재편집과 보충을 약속해 둔 상태이긴 하지만 이 토론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문서를 보충하는 것이 최우선이란 생각이 드네요. Jjw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2:47 (KST)답변
제가 감정적으로 토론 글을 남긴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요. 가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댓글을 달았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사용자:윤성현님이나 사용자:Shine for all 모두 격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런데 이 점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사용자:Shine for all님의 첫 글도 매우 정중했습니다. 사용자:Shine for all님의 사용자 페이지를 방문해 보시면 웃으실 수 있으실 거에요. 누구 편을 들긴 참 조심스럽니다. 이 격렬한 토론이 있기 전에 저와 윤성현님과의 토론을 살펴 주세요.
제가 참 토론하기 어려웠습니다. 근거 없는 일방적인 주장과 일방적인 행동만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이 사용자:Shine for all님을 격하게 만드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윤성현님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위키백과에 필요한 분입니다. 많은 내용을 채워 주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왕이면 출처도 밝혀서 품질 높은 글을 많이 채워 주시는 분이 되어 주시면 좋겠어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3:09 (KST)답변

위의 세 가지 토론 주제를 보시면 문서 전체를 뭉뜽그려 판단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또 전체를 합하여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모든 문장에 출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별 문장마다 출처 요구도 했구요. 특정 문단의 제목의 수정도 요구했구요. 결코 막연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3:09 (KST)답변

(앞으로 당김) 말씀하신 바는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지금의 토론 문단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내용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문서에서 출처가 요청된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든 확인하여 보충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라도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위키백과가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것은 문서의 주기여자 뿐만아니라 누구든 필요하다면 수정하고 보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기여자가 고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문서가 주기여자 소유의 것은 아니니 그런 점은 마음쓰실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문서를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선의가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쿨쿨님께서도 직접 보충하고 싶으신 부분이 있다면 함께 찾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23:21 (KST)답변

en:Wikipedia:V#When a reliable source is required를 참고해 주세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8일 (금) 01:56 (KST)답변

알찬 글 해제 토론

위키백과:알찬 글 후보/해제 토론/강희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Alto (토론) 2011년 2월 17일 (목) 19:17 (KST)답변

강희제 문서 개선

출처가 확연하게 밝혀지지 않은 문서의 편집의 과정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문단 입니다. 추후 편집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에 대해서는 문서의 역사와 본 단락을 참고해서 의견을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 드린 봐와 같이, (1) 기독교와의 전례 문제와 금지 정책 부분은 새 참고자료로 변경했습니다. (2) 추가 읽을 거리 단락과 내용도 추가했습니다 (3) 문서 본문에 대한 코멘트는 필요 없거나 요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출처 확인 필요 문장입니다 꼭 차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18:39 (KST)답변

베트남에서의 중재는 수정하신 것처럼 '삼번의 난'과 직접 관련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삼번이 베트남 근처였기 때문에 연관이 있을 수도 있긴 해요. 제 추측은 전자입니다. 다만 일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한 인물의 생애를 몇 가지 사건으로 구분해 버리면, 지금과 같이 베트남에서의 중재라는 부분이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삼번의 난'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면 단락 제목을 연대별로 하고 단락의 주요 내용을 삼번의 난으로 채우고 베트남 중재나 다른 사실을 함께 기술할 수 있을테니까요. 제 의견입니다. 참고만 해 주세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19:36 (KST)답변
삼번의 난과 대만 복속, 러시아와의 갈등 단락의 사건 목록입니다. 작업하실 때 참고해 주세요.
현재 삼번의 난과 대만 복속 단락의 내용이 언뜻 많아 보이지만, 들여다 보면 삼번과 정성공과 후손에 대한 설명 부분이 꽤 많습니다. 두 단락의 내용을 줄이고 합쳐서 하나로 해도 될 것 같긴한데요. 앞의 오배의 난까지 하면, 단락을 시기 구분에서 (1) 북경 내에서의 위협 제거 (2) 중국 영토 내에서 황권 강화 (3) 대외 원정 이런 식인 것 같아서요. 그런데, 대만을 대외 원정으로 볼 지 아니면 중국 영토 내에서의 황권 확립으로 볼 지는 선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0:45 (KST)답변
해당 사건에 대한 간략한 주변 정보 없이 결과만을 기술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지금 정도의 정보는 전달되어야 합니다. 온라인 백과사전의 가장 큰 장점은 용량의 제한이 없다는 것 아닐까요? Jjw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0:50 (KST)답변

개요 부분의 강희제의 이름에 대한 부분에서 연호를 제외 한 것들은 별도 단락으로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생애 초기 전에 적절한 단락명과 함께요.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주해 2],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한국어 한자음으로 듣기 (도움말·정보), 중국어로 듣기 (도움말·정보) ),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이며 연호는 강희(康熙)[주해 3]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얼허 타이핀 한(Elhe Taifin Han)[주해 4][주해 5], 몽골어로는 엔크 암갈란 칸(Enkh Amgalan Khaan)[주해 6][주해 7]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첫 문단이 조금 깔끔해질 것 같은데요. 단락명은 '이름과 칭호'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요. 일 편집해 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0:24 (KST)답변

그냥 밑으로 한 칸 내렸습니다. 개요 부분을 또 문단을 구분하여 나누는 건 옥상옥의 느낌이 있네요. Jjw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0:27 (KST)답변
제가 모르는 용어라서 그러는 '옥상옥' 혹시 '집위에 집'이라는 말씀인가요? ^^

아래 내용에 기름기가 좀 많아 보이는데요. "독재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으나..." 등의 다수의 문장이 평가가 많이 포함되어 있네요. 요약 성격의 첫 단락이니까 사실 위주로 기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제거될 것들이 뒤의 단락 어디에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그 때 사용하구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1) 정치와 군사 (기존 글에서는 외정으로만 보고 있지만 오배의 난과 삼번의 난이 외정은 아니니까요) (2) 문화와 (과학? 여기는 없지만 대구를 맞추려면 이정도가 될 것 같은데요) (3)가족과 평가(서양 황제와 비교한 부분은 당연히 출처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물에 평가이니까요)

1661년(순치 18년) 부황 순치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라 1722년(강희 61년)까지 재위하여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중국의 역대 300여 명의 황제 가운데 가장 길다.[1]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제왕학 수업을 하면서 동시에 정치를 배워 그를 이겨내고 내란과 국가적 위기인 오배의 난과 삼번의 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다스리던 대만을 복속시켜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근대화의 발판을 서서히 마련하던 러시아와의 갈등도 있었으나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한다. 청나라에 대항하던 북방의 몽골 오이라트 준가르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자신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파하여 북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러한 정책과 그의 통솔력과 카리스마, 치밀한 군사 전략, 안목을 바탕으로 강력한 절대 황제권을 수립하였다.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로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여 이를 피했다.

강희제는 단호한 외정과는 달리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당대의 문화발전과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화목을 꾀하였다. 또한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러시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들과 더불어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아들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위의 인용문처럼 깔끔하게 위키백과 본문이 나오면 좋겠네요. 줄도 잘 맞구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1:15 (KST)답변

옥상옥은 집위에 또 집이란 뜻 맞습니다. 휘와 시호 이외에 아무런 정보가 없는 문단을 굳이 독립하여 만드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밑에 개요의 것은 본문에 이미 출처가 제시되어 있다면 굳이 개요에 또 출처를 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그대로 요약이니까요. 다만 본문에도 출처가 없는 부분이라면 출처를 정리하는 김에 같이 정리하는 것도 좋겠지요. 제 편집은 오늘 여기까지 입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책과 자료를 들여다 보았더니 많이 피곤해서요. Jjw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1:19 (KST)답변
말씀하신 부분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개요 단락에 이름에 대해서 너무 길게 들어가는 것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희제의 강희라는 연호 외으 이름, 특히 몽골식 이름 이런 것들은 조금 부수적인 정보인 것 같아서요. 분량으로는 별로인 것 같은데 분량은 다른 누군가가 늘려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구요. 쿨쿨 (토론)
전 조금 더 해 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제가 한 번 잘 봐주시길 바랍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1:29 (KST)답변

구분 1 (요약 단락)

출처정보 불분명

1661년(순치 18년) 부황 순치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라 1722년(강희 61년)까지 재위하여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중국의 역대 300여 명의 황제 가운데 가장 길다.

의 주석인, <ref>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4쪽</ref> 에서

참고문헌의 저자가 중국역사박물관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참고자료의 제목이 중국역사박물관이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출처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저자, 참고문헌 제목, 발간한 곳, 연도, 쪽수 등에서 앞의 저자와 제목 중 하나는 누락되어 보이네요. ~~

그 위 참고 문헌 한국어 편에 해당 문서가 기재되어 있으므로 간략히 표기한 것 뿐입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1:40 (KST)답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중국역사박물관 10'이 제목인거죠? 맞다면 무슨 시리즈물인가 보네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2:24 (KST)답변
  • "중국사학회(2005), 강영매 역, 중국역사박물관 10, 범우사, 2005년, ISBN 890804308X"에서 '(2005)'는 제거 했습니다. 뒤에도 있어서. 그런데 2005년 강영매가 번역하고 범우사가 출판한 것은 알겠는데요. '중국역사빅물관 10'은 제목 같구요. '중국사학회'는 뭐죠? 학회발간물도 아닐테고요. 이거 도서 같은데요. 어렵네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3:26 (KST)답변
《중국역사박물관 10》은 시리즈 책 제목이고, 중국사학회는 편저자입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20일 (일) 15:10 (KST)답변
그리고 "황위에 올라"와 "황제에 즉위하여"는 완벽하게 같은 뜻인데 오타라고 하긴 무리라고 봅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1:44 (KST)답변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오타는 아닙니다. 같은 낱말이죠. 단지 그 아래 줄에서 바꾼 '중국의 역대상' --) '중국 역대상'이 오타 수정입니다. 이것도 이상해서 나중에 '중국 역사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2:27 (KST)답변

여기까지 개요 단락의 첫 두 문단을 수정했습니다. 나머지 뒤의 두 문단은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23:08 (KST)답변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구분 2 (생애 초기)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辰時, 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戌時, 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다.

  • 현재 <주석 2>에 출처가 있습니다. <주석 2> 이후 문장들도 일화내지 야사 성격의 글입니다. 출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석 2>는 브 이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표제어 '강희제'를 읽은 내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백과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습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의 서지정보가 제대로 갖추어 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고자료에 브리태니커 사전도 올려야 겠네요. <주해 11>도 일화내지 야사입니다. 출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주해 11]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의 가문이 청나라 건국 때의 큰 공신 집안이자 명문가이어서 그녀가 다른 후궁에 비해서 위세가 대단하고 동가씨의 지위 역시 황귀비로 후궁 중 가장 높았으며,[2]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억지로 혼인한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궁녀 출신의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

  • 선황인 순치제의 슬픔과 죽음에 관한 단락입니다. 일화가 여러 개 섞여 있습니다. 단락의 마지막까지 출처가 밝혀 있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주석 3> 이후로도 출처가 또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순치제가 사랑하던 어린 황태자의 죽음에 슬퍼해서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해서 '행치'라는 법명을 받았으나, 여러 대신들의 요청으로 황궁으로 회궁하는 도중에 천연두로 사망하였다고 해도 될 것 같긴한데요.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적 비중이 있는 인물 치고는 생애 초기가 모두 에피소드로 성격에 드라마 같은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요. 보통 이런 내용들은 <주해>로 설명 처리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는 이것이 본문이니 스토리를 다 설명해야 할 것 같기도 하구요. <주해 12>는 천연두 사망설과 조정에서의 급사설, 출가설 등의 가설들이기 때문에 꼭 출처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거 없는 기술이 될테고 위키백과에서 이런 가설을 연구해서 한 것처럼 보이니까요. <주해 13>은 통과. <주석 3>은 중국어 뉴스사이트 같습니다. <주석 4>는 잘 되어 있네요. <주석 3.과 <주석 4>는 이전에 없었는데 새로 생겼나 보네요. 감사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0일 (일) 00:46 (KST)답변

하지만,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러나 본래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니고 또한 죽은 황자, 그것도 서출 출신의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고 그 어미는 황후에 봉하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자 순치제는 그에 대한 항의와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주해 12][3][4]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으나[3] 〈세조장황제실록〉에 따르면 순치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황위가 유고 상태가 되었다. 당시 황궁에서 배분이 가장 높던 황태후 효장태후는 아들인 순치제가 붕어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주해 13]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 그 중 미리 지어진 유조에 따라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하게 하였다.

  • "만약"이하 마지막까지도 일종의 일화이기 때문에 출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주석 5>는 중국어 원문인데요, 출처가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필요해 보입니다. <주석 6>은 중국 웹사이트인데 웹사이트명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인용한 논문이 있는 웹페이지로 바로 가지 않고 전체 메뉴로 가게 되어 있어서 참고하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쿨쿨 (토론) 2011년 2월 20일 (일) 00:46 (KST)답변

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순치제의 시신을 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니 현엽을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유조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 [5]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이다.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가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熙)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熙)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6]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1662년(강희 원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南明)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과 평서왕 오삼계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해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아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

구분 3 (오배의 난)

  • 어린 황제와 보정대신들간의 권력 다툼에 관한 일화네요. <주석 2>인 브리태니커를 참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일화이기 때문에 최소한 <주석 2>이하도 출처가 밝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주해 14>는 십삼아문의 폐지 이유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출처가 필요하겠네요. 누가 폐지 이유를 그렇게 보았는 지 말이죠. <주해 15>은 <주해 15>와 마찬가지 이유로 출처가 필요해 보입니다.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6]

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주해 14]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2]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주해 15]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아직 친정의 권한이 없는 강희제와 오배의 세력에 비하여 매우 미약한 대신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

  • 이번엔 경희제의 결혼과 오배를 이기는 과정에 관한 일화네요. 계속되는 일화, 마치 드라마 '강희왕조'인가 그걸 보는 것 같아요. 이제는 백과사전 강희제가 아니라 이야기 강희제 같아요. 황제의 일대기가 이런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이해해야 하는 지 갑자기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여하튼, 두 문단 모두 출처가 없는데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야기의 출처. 쿨쿨 (토론) 2011년 2월 20일 (일) 00:46 (KST)답변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 1667년(강희 6년) 7월 조상의 예법에 따라 14살이 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 중 편전인 건청궁에서 강희제와 언쟁을 벌이다 심지어는 강희제의 용상에까지 가서 강희제를 협박하였다. 강희제는 크게 놀라며 오배에게 군신의 예를 잊었느냐며 꾸짖었고 오배는 그 즉시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알고 용상에서 내려가 머리를 조아렸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강희제는 오배에게 덫을 놓아 정치적으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오배를 자금성으로 들라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9년(강희 8년) 5월에 오배는 효장태황태후의 5촌 조카 반포이선(般布爾善) 등과 함께 결국 자신의 사병들과 휘하 장수들의 군사를 이끌고 자금성에 침입하여 강희제를 죽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강희제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북경 내성을 지키는 구문제독 오육일(吳六一)의 내성·황성 방위군과 황궁 친위군으로 오배의 군사들을 포위하여 몰살시켰다. 오배는 군사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하고 단신으로 건청궁으로 들어가 강희제를 위협하였으나 강희제는 몽골 씨름으로 단련된 젊은 무사들을 불러내어 오배를 추적하여 체포하였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 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구분 4 (삼번의 난)

주로 <이야기 중국사 3>을 참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 출처는 모두 있습니다. 삼번에 대한 긴 설명이어서 줄였으면 하지만 어찌 해야 할 지 감이 안 서네요.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큰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삼번은 남명에 대비한 것으로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의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이 관할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7]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정남왕의 직위는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강희제 즉위 무렵에는 이미 남명이 멸망하고 반청 세력이 일소된 상황이었으나 삼번은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8] 삼번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려는 청 왕조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9] 특히, 오삼계는 삼번왕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았고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인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조정이 걷은 세금 가운데 백은 2천만냥이 오삼계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국가 총 수입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재정 약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10]

  • 출처는 모두 위와 같이 <이야기 중국사> 중심입니다. '오배의 난' 단락은 <이야기 중국사 3>을 직접 보셔도 무방해 보이네요. 이거 어디 가서 구할 수 있을까요?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 왕조는 은퇴는 허락하되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청왕조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청 왕조는 이들이 모반을 일이키려한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논의 하였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다. 강희 12년(1673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거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反靑復明)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왕족을 옹위하지는 못하였다. [11]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화중 이남은 물론이고 섬서 몽골 등 여러 지역의 반청세력이 가담하여 전란이 확대되었다. 삼번의 난은 9년 동안 계속 되었다.[9]

  • <주석 13>(<이야기 중국사 3>) 이후에 대해 출처가 있어야 할 것 같구요. <주해 16>과 <주해 17>의 설명은 좋은데, 그 안에 출처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아요.

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까지 진군하였다.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어서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주해 16][13]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춘다. 청나라 조정의 군사를 너무 만만히 봐서 거만해졌기 때문이다.

  • 문단의 출처 필요해 보이네요.

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오삼계를 물리쳤다는 자신을 역시 너무 과신하여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盛京)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圖海)·주배공(周培功)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으로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아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경정충은 곧 청군에게 끌려와 1681년(강희 20년)에 반역에 공모한 죄로 사형당한다.

  • <주석 17>의 중국어 원문에 대한 출처가 있으면 될 것 같네요.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다. [14] 이로 말미암아,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고,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 즉 오주(吳周)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昆明)에서 자살을 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킴으로써 9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다.[15] 이 반란 이후에 강희제는 번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친왕들과 군왕들에게 최소한의 사병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녹영이나 팔기군에 배속시켜 친왕들의 군 지휘권을 거의 뺏어 버렸다. 이 반란은 강희제의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다.[16]

당시 삼번의 난 때 조선은 큰 기근이 들었는데 강희제는 1671년(강희 10년) 조선에서 온 사은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도록 하라.

흔히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시 조선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크다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비웃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일단 여기까지 입니다. 하나씩 보니 재미있네요. 이야기 읽는 기분으로. 표제어 바꾸어도 될 것 같아요. 이야기 강희제 이야기가 많아서 글도 길어서 의견 남기기도 쉽지 않네요. 사실 위의 순치제의 죽음처럼 사실 내용은 한 문단이 한 두 줄이면 끝나는 것인데요. 그렇게 바꾸면 문서가 확 줄어들테고 고민입니다. 화려한 이야기체를 어떻게 압축할 지 말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0일 (일) 01:18 (KST)답변

군약신강(君弱臣强)에 대한 원 출처를 표기하고 전후 사정을 보충하였습니다. 인용문을 너무 길게 달아 말씀하시니 조금 번잡합니다. 또한 이미 출처를 밝힌 부분에 대해서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은 과도한 지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서에 대한 평가에서 "기름기", "화려한 이야기체" 같은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으므로 좀 더 객관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 체에 대한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강희제의 치세가 매우 길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는데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출처 부분은 제가 보아 부족하다 싶은 것을 계속하여 보충해 보겠습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20일 (일) 15:57 (KST)답변
감사합니다. 지적해 주신 "기름기"와 "화려한 이야기체"는 표현으로 부적절해 보입니다. 유의하겠습니다.

이야기 중국사 3 출처 검토

<이야기 중국사 3>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검토한 것입니다. 현재 문서의 출처가 명확히 밝혀 진 것이 아니어서 일단 있는 것만으로 했습니다. 다른 출처에 대해서는 원본을 곧바로 확보하지 못해서 추후 하겠습니다. 현재, 출처 표시 없이 인용한 경우(그냥 가져오기, Jjw님이 싫어하시만 용어 정의상 표절)도 한 건. 출처 표시를 했으나 본문의 내용이 없거나 다른 경우(출처 잘못 표기 또는 독자연구에 해당) 여러 건. Jjw님이 문서 개선에 노력하시니까 추후 모습 잘 갖추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출처 표시가 미약하면 검증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한 번 더 경험한 것 같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2:33 (KST)답변

<주석 4>는 원문과 대조해 본 결과 해당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단지 천연두 이야기만 나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1일 (월) 22:43 (KST)답변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큰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삼번은 남명에 대비한 것으로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의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이 관할하였다.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7]

원문에는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큰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는 내용이 없습니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는 내용도 없습니다. 원문에는 "운남, 귀주 지방의 방위를 담당한 평서와에 오삼께, 광동 지방 방위를 담당한 평남왕에 상가희, 복건 지방의 방위를 담당한 정남왕에 경중명 등을 봉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1일 (월) 21:41 (KST)답변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의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 배열 동일,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내용은 없네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00:21 (KST)답변

<주석 8>의 원문에는 "강희제가 즉위했을 무렵은 반청 세력이 모두 평정되고 남명 정권도 이미 멸망한 후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삼번은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은 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00:21 (KST)답변

<주석 11>의 원문에는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 왕조는 은퇴는 허락하되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청왕조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는 내용이 없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00:21 (KST)답변

<주석12>의 원문에는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 대신에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은 태종 홍타시의 딸과 결혼하여 북경에 살고 있었는데 강희제는 오응웅을 처형함으써 삼번의 토벌에 대해서는 일체 협상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p302)고 되어 있습니다. 회유 사실은 없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00:21 (KST)답변

<주석 13>의 원문에는 관련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00:21 (KST)답변

해당 부분은 제가 보충하여 넣으면서 출처가 명확치 않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군요. '문장마다' 출처를 넣습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09:24 (KST)답변
다시 한 번 살펴 보았습니다. 상가희 관련 부분 은 명시되어 있군요. 확실하게 살피고 지적하시기 바랍니다.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2:57 (KST)답변
여러 개의 검토 내용 중 하나 정도는 너그러이 봐 주실 수도 있으실텐데요. 조금 엄격하게 제게 대해 주시네요. 더구나 <주석 11>은 p299~301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제게 제게 보여 주셨던 것은 p298입니다. 저는 Jjw님의 여러 건의 검토 중에 지금과 같은 하나 정도는 가볍게 실수하셨다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출처의 페이지가 잘못된 것이므로 바꾸어 주셔야 할것 같구요. 여전히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청왕조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에서 "이런한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은 원문에는 없는 편집자의 해석이 추가된 것 같습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3:56 (KST)답변
조금 더 살펴보고 말씀해 주시길 당부드리는 것입니다. 특히나 표절이 거론되는 상황에서야 더욱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문서를 보게될 수 밖에 없겠지요. 위에 말씀하신 것은 출처와 편집내용이 1:1로 표현의 형식에서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게까지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원하신다면 같은 내용을 갖는 다른 출처를 병기하지요. 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4:04 (KST)답변
위에서 하신 말씀은 출처를 잘못 밝힌 윤성현님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제가 출처를 넘어서 검토할 이유는 없는 것 같구요. Jjw님 또한 원문에서 보신 페이지와 출처가 잘못된 것에 대해서 잘못한 부분이 없으십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23 (KST)답변
1:1로 표현의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일단 제 말씀은 원문에 ABCDEFG가 있다면 A'C'F'G'는 가능하지만 여기에 Z'가 들어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편집자가 임으로 작성한 부분이 될테니까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23 (KST)답변
표절은 좀 센 단어이지만 의미가 출처 없이 인용입니다. 지금까지 출처 표기에 느슨한 것이었을 뿐 자료에 기초해서 문서 작업하면 언제나 표절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죠. 논문심사를 통해 문제점들이 많이 고쳐지지만 위키백과는 그런 과정이 없다는 현실은 이해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출처 확인이 지금이 아니라 알찬 글 후보 때 이루어졌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23 (KST)답변


말씀하신 출처에 대해서는 쪽수를 298-301쪽으로 수정하고 같은 부분을 추처로 하는 주석으로 병행하였습니다.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4:12 (KST)답변
삼번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하였다는 문장은 이미 위에 조영록 외, 국학자료원, 동양의 역사와 문화, 1998년, ISBN 8982062734, 204-205쪽 를 근거로하여 밝혀 두었기 때문에 다시 병기하지 않습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4:14 (KST)답변

많이 개선되는 모습이 놀랍네요. 아직 내정,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대신목록, 현대 평가 등 출처가 없는 부분을 매꿔야겠지만 아무튼 문서가 발전되는 방향이 되고있어 참 다행입니다. :) --NuvieK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4:24 (KST)답변

제가 주중에는 거의 시간이 나지 않아 문서를 손보는 양이 적습니다. 다른 문서를 손보겠다는 약속도 미루어두고 매달리고는 있습니다만. 조금 기다려 주셔요. 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4:28 (KST)답변


제가 논문을 참고해서 기독교의 전례 문제를 수정한 부분은 되돌려 졌네요. 받아 들이겠습니다. 현재 출처 위주로 하고 있으니까요. 추후 자료가 충분하면 전례문제에 관한 문서에 올리죠.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23 (KST)답변


출처의 웹사이트 확인

현재 출처에 한정해서 업데이트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네요. 이것이 마지막 기여가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출처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하거나 출처의 원문을 PDF파일이나 스캔으로 보지 않고 웹사이트에서 확인한 것이 다수 있어 보입니다. 출처에 대해서는 원편집자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일일히 하나씩 검토해서 알려 드리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하나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석 4>의 브리태니커 사전의 표제어 강희제는 온라인으로 본 것 같습니다. 현재 다음과 네이트 모두 브리태니커 사전을 자신들의 백과사전으로 서비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백과사전으로는 특이하게도 "N. Kauda 글, 李鍾麟 옮김"이라는 저자와 역자가 있습니다.(사전의 하단 참조) 따라서, 출처의 뒤에 웹사이트를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출처 중 도서라고 나와 있는 것도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한 경우라면, 웹사이트 주소와 학인 날짜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수정하면 Jjw님이 동의해 주시기 않거나, 특히 윤성현님이 되돌리기를 하시는 경우가 많아서 부득이 이렇게 말씀만 드립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23 (KST)답변

제 기여는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Jjw님 너무 감사합니다.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23 (KST)답변

어찌 되었든 여러모로 수고하셨습니다. 브리테니커를 출처로 한 부분은 아예 다른 출처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도서의 경우 전자도서를 참조하였다 하더라도 국제도서목록이 있고 페이지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웹싸이트를 표시하는 것은 특정 도서 판매 싸이트의 홍보가 될 수 있기에 좋지 않아보입니다. 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5:30 (KST)답변


의견 브리테니커는 어찌되었든 3차 자료기 때문에 되도록 2차 자료로 표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모두 교체하였습니다. 다른 문단들도 한 두 곳을 빼면 출처 정리는 모두 끝난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의 문서 편집에 완결이란 없기 때문에 지금의 출처보다 더 좋은 것이 있거나 더 좋은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중간에 감정이 상하였던 것이나 소모적인 논쟁이 있었던 것은 훌훌 털고 갔으면 하네요. Jjw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9:19 (KST)답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쿨쿨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19:44 (KST)답변
두 분 및 다른 기여자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자연머리 (토론) 2011년 2월 22일 (화) 23:08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