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승만/보존문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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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0년 전 (123.111.182.1님) - 주제: 이박사와 서재필의 관계

오해와 견해

건국 60주년 기념이라는 이슈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 코너에서 이승만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나 에피소드 등을 제의합니다. 100범(토론) 2008년 7월 8일 (화) 20:12

친일파를 등용했다는 유언비어

일부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와 손잡았다는 출처불명의 유언비어에 대한 반박입니다. 참고하시길~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1:43 (KST)정우익(정우익)답변

전부 조갑제 닷컴에서 나온 것들 밖에 없군요. 주장을 펴실려면 다양한 출처를 대시기 바랍니다.%%스톰대박 %·% 2008년 7월 11일 (금) 13:10 (KST)답변
이승만을 비판하는 측에서 타당한 자료를 대지 못하는데 한개 이상의 반박자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이승만 정부가 등용했다는 친일파는 그럼 누굽니까? 한동안 블로그나 인터넷상에 이승만정권이 친일파청산을 안해서 나라가 이상하게 됐다는 투의 유언비어들이 돌았지만 아무도 이승만이 등용한 친일파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대지 못하더군요. 경찰관 모씨와 군인 몇몇 사람으로는 친일파를 요직에 앉혔다고 보는것은 어렵습니다. 적어도 일부 얼굴없는 정치세력들이 이승만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떳떡하게 증거를 대야 하는데 이게 뭡니까? 장관급 아니 차관급 이상의 직책에 들어있는 친일파들을 근거로 제시하고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고 친일파를 썼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경찰관 모씨와 군인 몇몇 사람으로는 친일파를 요직에 앉혔다고 보기에는 억지스럽고 무리입니다. 혼자 흥분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님에게 따지려 드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도 네이버나 다음에 가보면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았다는 증거불명의 내용들이 널려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한개 이상의 자료라도 댔지만 카더라 설만 유포하는 블로그나 인터넷상에 돌고있는 유언비어들이야말로 상당히 근거가 부족하고 빈약한 것이 아닐까요?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3:15 (KST)정우익(정우익)답변
게시판을 봤습니다만, 그곳에서 대놓은 사람들중에서 독립운동가가 아닌분들도 있습니다. 김동원 (1884년), 윤치영등 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친일 행적이 뚜렸합니다. 그렇게 초기 내각에 독립운동가 몇 있다고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지 않았다는 것은 네이버에 설치는 한나라알바들이 MBC관련 인물중 전라도 관련 인물 몇명 내놓고 MBC가 전라도거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스톰대박 %·% 2008년 7월 11일 (금) 13:29 (KST)답변
MBC는 원래 부산에서 시작했는데요. ^^a 부일장학회를 뺏어서 정수장학회를 만들었죠. 그때 부산MBC도 함께 뺏깁니다. 부일장학회와 부산MBC는 당시에는 모두 개인 소유였고, 현재 박씨 일가의 소유이며, 특히 MBC 본사 주식의 30%를 정수장학회가 갖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MBC는 문화방송 전체의 어머니 격인 회사입니다. --Knight2000 (토론) 2011년 10월 9일 (일) 10:07 (KST)답변
이보쇼. 듣자듣자 하니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여기서 알바가 왜나옵니까? 그리고 다른 정당은 뭐 알바 없는줄 아십니까? 그리고 네이버에 설치는 한나라알바들이라고 하셨는데 네이버에 한나라당 알바가 설친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있나요? 님과 같은 방법으로 아고라에 노빠나 좌파 알바가 다닌다고 말하면 기분 좋나요. 감정상하게 하는 발언은 상호간에 자제하시죠? 그리고 북한에서는 뭐 친일파를 반드시 청산해서 민족정기가 바로섰다는 투의 헛소문들도 많던데 과연 그럴까요?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3:34 (KST)정우익(정우익)답변
저는 당신이 알바라고 규정한 적이 없습니다.%%스톰대박 %·% 2008년 7월 11일 (금) 13:47 (KST)답변
제대로된 반박자료를 가지고 오십시오. 이러한 내용은 단지 자신의 원하는 '주장'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계열은 빠져버렸군요. republican (토론) 2008년 7월 12일 (토) 03:45 (KST)답변

한민당이 한국 민주당 입니다. 한민당은 민주당이 됬는데 어디서 거짓을 말합니까, 이승만이 한민당 누구를 갖다 썼는지 그 출처좀 정확하게 대시지요. 한민당의 누구 말이요? 이승만은 여당이 없었네요. 이윤영 회고록이나 이범석 회고록 찾아보시요. 아님 올리버 저서 이승만 전기를 찾아보시던지.정우익2 (토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기반이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과의 연대인데, 각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republican (토론) 2008년 7월 16일 (수) 23:32 (KST)답변

한민당이 이승만의 정부수립에 참여하고 한자리를 바랬지만 이승만이 한민당 누구를 썼는지 말해보시요. 그때 버림받은 이후로 야당을 형성해서 민주당이 된것도 위키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하면 찾아볼수 있을텐데 어디서 진실을 외곡합니가?정우익2 (토론)

사실 정우익님께서 출처로 제시하신 조갑제 닷컴의 경우엔 개인 홈페이지입니다. 조갑제씨가 물론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긴 하나, 백:신뢰할 수 있는 출처#자비출판한 출처에 의거하면 이를 통해 이승만 문서를 손보기엔 좀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아들해 (토론) 2008년 7월 15일 (화) 11:08 (KST)답변

좌파들의 유언비어:친일파 문제

부주석 김영주 헌병대 보조원, 김일성(김성주) 주석 친동생
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이활,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전투시간 2000이상의 제국군 에이스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등 북한공군간부 20명은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 만군(만주군) 출신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친일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7284&C_CC=AZ

이사람들 만으로 북한 전체가 친일파라고는 하지는 않겠지만 사실이 이런데 어떻게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잘해서 민족정기가 살았다는 투의 유언비어들이 포털에 나돌아다니는 건지...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3:40 (KST)정우익(정우익)답변

조중동이나 뉴라이트들이 하는 주장만 읽지 말고 다양한 시각을 기르세요. 이번 칸 생성을 보니 살짝 색깔 공론에 말려든 분이신것 같은데, 그리고 여기는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해서 논의 하는 곳이 아닙니다. 주체는 이승만입니다.%%스톰대박 %·% 2008년 7월 11일 (금) 13:49 (KST)답변
색깔 공론?? 이승만에 대한 토론장인데 이승만과 관련있는 내용 아닙니까?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았다 친일파를 썼다는 등의 유언비어에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나오니 이게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워진 누명에 대한 부분이 아니면 뭔가요? 이승만 입장에선 억울할 겁니다. 그렇게 하면 북한의 김일성씨 한테도 김일성도 친일파 썼고 친일파들을 요직에 앉혔으니 친일정권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누가 그러던가요? 여기 김일성 항목에 조차도 그런 내용은 없네요. 친일파가 내각에 일부 들어가 있는건 이승만 정부나 김일성씨 정권이나 똑같은데 어디서 이승만에게만 계속 돌을 던지니까 그게 너무 불공평 한거죠. 이승만에 대한 변호지 어디 내가 누구를 가리켜서 너 좌파다 등 이런 식으로 색깔 공세를 했습니까?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3:55 (KST)정우익(정우익)답변

보시면 알겠지만 친일청산 여부를 논하는게 아니라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워진 누명, 즉 제가 대화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승만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을 잡았니 안잡았니 하는 유언비어들의 출처가 어디며 그런 주장을 누가 했는지, 어떤 연구와 결과를 대상으로 했는지도 모르면서 네티즌이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들 포털이나 블로그에다가 공공연히 대놓고 이승만에게만 일방적으로 돌을 던지는 것에 대한 항변이지 이게 어디 색깔 공론이거나 공세란 말입니까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3:56 (KST)정우익(정우익)답변

토론칸의 제목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위키백과는 감정에 따라서 문서의 내용을 수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스톰대박 %·% 2008년 7월 11일 (금) 14:01 (KST)답변
감정을 개입시키지는 않습니다.
단지 *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았는게 사실인가,
* 김일성은 친일파와 손잡지 않았나
*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모두 친일파를 사용했다면 이승만에게 던져지는 일방적인 공격과 매도는 불평등하고 부당한 대우가 아닌가
끝으로 * 누가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고 북한은 친일파를 완전히 청산해서 민족정기가 바로섰다는 유언비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냈느냐 그것을 규명하거나 그것을 규명할수 없다면 아무리 못해도 이승만에게 붙여진 억울한 누명은 씻어줘야죠.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4:04 (KST)정우익(정우익)답변
그런건 알바들이나 하는 물타기 일 뿐입니다. 김일성은 김일성 대로,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해당 토론 문서에 의견을 제시 하세요. 그리고 이승만 친일파 대거 등용한 것은 부정 할 수는 없는 사실이니, 포기하세요. 이름 대라면 금방 댈 수 있습니다.%%스톰대박 %·% 2008년 7월 13일 (일) 12:45 (KST)답변

아니 이봐요, 아닌것을 아니다라고 잘라서 말한게 그게 죕니까? 제가 누굴 생사람을 잡았나요 아니면 누명을 씨웠나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공세를 했나요 왜 일방적으로 준보호 해놓고 그냥 가시죠? 정우익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4:07 (KST)정우익(정우익)답변

준보호를 신청해 놓은 것일 뿐이지, 아직까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용자가 김구, 이승만문서를 임의로 같이 편집했는데, 그만두시길 바랍니다.%%스톰대박 %·% 2008년 7월 13일 (일) 12:43 (KST)답변

지금 명령하쇼?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말아라 하지? 글구 내가 출처도 없이 이런것도 아닌데 댁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합니까? 내가 증거 없이 글을 썼냐고. 참나 어이 없네. 글고 한가지 충고하나 해두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데로 돼야만 진리고 진실이고 애국은 아니란다. 함부로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쇼. 그리고 당신 생각과 다르다고 테클걸거나 관리자 요청을 쓰는건 예의에 어긋난 행위 아니오? 당신이 먼저 결례를 했으면서 어디서 명령이요? 정우익3 (토론) 2008년 7월 11일 (금) 14:04 (KST)정우익3(정우익3)답변

발언에 신중해 주시고, 감정적인 발언은 자제해 주십시오. --RedmosQ (토론) 2008년 7월 21일 (월) 12:11 (KST)답변

날짜의 음력/양력이 맞는지 확인 부탁 드립니다.

날짜의 음력/양력이 맞는지 확인 부탁 드립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9월 15일 (월) 09:10 (KST)답변

직제에 없는 대통령론

  •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칭호에 관한 문제

비록 초기 임시정부의 직제에는 대통령직제는 9월까지는 없었지만 집정관 총재라는 칭호 를 대통령 president 로 해석했다면 해석상의 오류이지 대통령을 사칭(단어 사용을 잘해야함)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100범(토론) 2008년 9월 25일 (목) 17:55

그것은 이승만이 미국 체류 시절 자신의 명함에 밝힌 사항입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명함에 "Prince" 또는 "President"로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교민 사회에서 이승만에 반감을 가진 이가 생겨난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9월 25일 (목) 19:03 (KST)답변
president 가 반드시 대통령 으로만 해석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영어사전에 보시면 president = 총재, 총장, 회장 등의 뜻으로도 해석이 됩니다. 무슨 마음을 먹고 president 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대통령 이라고만 해석되는 단어도 아닌 마당에 그것을 나 잘못 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네요. 과실이라면 모르겠지만...(이승만에게 욕심이나 명예욕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수 없는 사실) --100범(토론) 2008년 9월 25일 (목) 19:20
중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국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정관 총재에 대해 consul, 대통령에 대해서는 president를 썼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말도 옳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남에게 오해를 사기 딱 좋은 표현이었습니다. 칼릴 지브란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살해당하는 사람에게는 무언가 잘못이 있다고 했듯이 오해를 받는 사람은 뭔가 잘못이 있기 마련입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9월 25일 (목) 22:15 (KST)답변
옹호할 필요는 없지만 옹호하게 되는군요. 분명히 이승만에게 명예욕이나 권력지향적인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테고 허나 president가 부서의 장,(회장, 사장 등등) 이라는 의미인데 반드시 대통령의 의미로만 해석되는 단어라고 보기는....주제(이승만)와는 다른곳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사람이나 이유없이 죽는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군요. 근래에는 반사회성 묻지마식 범죄도 판을 치는 마당에.100범 (토론) 2008년 9월 27일 (토) 11:45 (KST)사용자:100범답변
앞서 말했듯이 당시에 두 낱말에 대해 다른 영어 단어를 썼음에도 굳이 이승만은 president를 고집했고,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반감을 갖게 했습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9월 27일 (토) 12:57 (KST)답변
어떤 영어 단어인가요? 그것에 대한 설명이 없으셨네요? -100범 (토론) 2008년 10월 2일 (목) 22:29 (KST)답변
위에 적혀 있습니다. 굳이 다시 적어야 하나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10월 3일 (금) 09:41 (KST)답변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밝히죠. 이승만은 탄핵 받아 물러난 뒤에도 스스로를 (탄핵 받지 않은 현직의) president로 교민 사회와 각국 정부에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9월 29일 (월) 09:04 (KST)답변

그런데 왜 신경질적인 투로 대답하시지요? 내가 이승만을 감싸는 뜻에서 하는 발언은 아닌데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시는군요. 조금만 더 나가면 인신공격적인 발언까지 하시겠군요. -100범 (토론) 2008년 10월 2일 (목) 22:29 (KST)답변
president 가 집정관 총재라는 직책 중 총재 부분에 우위를 두고 해석하다 보니 해석상에 생긴 오류라고 하는 것은 다른 백과사전에 실린 당시 발행한 공채표([1])를 증거로 대지요.(분명 이승만에게 최고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본 바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요, 이승만을 감싸는 어떤 특수 목적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 100범 (토론) 2008년 10월 2일 (목) 22:31 (KST)답변

그게 신경질적인 투로 보였나요? 할 말이 없군요. 그리고 공채표에 나온 사항은 집정관 총재라는 직위가 president 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100범 님이 반박한 내용은 이승만이 했던 반박과 동일합니다. 임시정부에서 president를 걸고 넘어지자 president가 반드시 대통령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consul로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Knight2000 (토론) 2008년 10월 3일 (금) 09:41 (KST)답변

이승만은 맨처음 하버드에 편지를 보내 자신은 조선의 왕족이며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 나를 2년 안에 졸업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후 먹히지 않자 프린스턴에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프린스턴은 이를 수용해 2년 반 정도의 기간 후 날림으로 졸업했죠. 조선 왕족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 것은 이승만의 명백한 권력욕과 과시욕을 드러내는 것이죠.

위임통치론?

출처도 없는 비판을 달고 그것에 대한 반비판을 다는 것은 조금 이상합니다. 애초에 미국의 위임통치니 뭐니 비판하는 입장을 근거를 들어 서술한 후 그것을 비판해야 합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13:08 (KST)답변

각정파의 입장은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100범 (토론)

미국과의 외교적인 문제로 독립을 해결하려 한 것이 어떻게 위임통치가 됩니까? 그런 주장을 하려는 사람들은 증거를 제시하여야 합니다. 이승만이 미국에 보냈다는 그 문서의 내용도 공개되지 않았고, 이승만이 미국에 나라를 팔았다는 말을 최초로 지어낸 자가 누군가도 확인되지 않은 마당에 이승만의 독립운동까지 폄하하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 아닙니다. -100범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13:24 (KST)답변

학자들의 견해라면 어떤 학자가 이렇게 주장했다 정도가 적합하지 않겠읍니까? 위임통치가 문제라면 같은 방법으로 잣대를 들이댔을때 소련의 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자는 모 독립운동가와 김구의 갈등 백범일지 310페이지, 311~313페이지에 나온 소련과 레닌의 후원과 그들에게 2백만 루블을 빌려썼다가 사단이 발생한 일 등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행동도 문제있는 행위 아닐까요?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이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면 그들은 소련에 의존하려 한 것이 아닌가. -100범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13:26 (KST)답변

임시정부는 소련 뿐 아니라 당시 중국 정부(국민당 정부)에도 자금을 지원 받아 사용했습니다. 김구의 백범일지내의 기술도 중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연구가 진행된 것을 찾아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케골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13:40 (KST)답변

이승만은 초기 임시정부에 참여했을 때, 위임통치 문제로 많은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의 직위에서 탄핵되었습니다. 이는 많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임통치론의 성격이나 배경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케골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13:37 (KST)답변

백범님, 각 정파의 입장을 '찾아보라'고 하지 마시고, 직접 제시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백과사전에 들어가는 내용임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나, 각 정파의 주장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아울러 김일성은 소련의 하수인으로 행동했다는 입장입니다.) adidas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14:49 (KST)답변

개인감정에 치우쳐서 편집하는 BongGon

BongGon! 위키백과는 자네 혼자만의 백과가 아니야. 왜 자꾸 자네의 입맛에 맞춰 위키백과를 함부로 편집하려는 것이냐? 여러 사람들의 의견, 그리고 실제로 존재한 사건 등이 자네의 입맛어 맞지 않는다고 삭제, 왜곡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럼 자네는 일제의 식민사관과 틀린것이 뭔데?

이승만이 훌륭한 인물인지 나쁜 인물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만 대체적으로 나쁜 인물쪽이 대세야. 그래서 4.19의거가 기념되고 있는 것 아니냐. 너의 다른 글에서의 조갑제를 운운하는데 조갑제같은 사람의 글을 보면 조갑제도 그리 평판이 좋지 않지만 BongGon 자네가 위키백과에 난도질하는 수준은 조갑제의 수준을 넘어서 거의 최근에 구속 수감된 지만원 수준이다. 조갑제가 골수우익이라고는 하지만 자네만큼 심하진 않아. 적어도 조갑제는 '귀'라는 것을 갖고 있지만 BongGon자네나 지만원은 아예 귀가 없어.

인체에 왜 입이 하나인 반면 귀가 두 개인 줄은 알고 있나? 두 번 남의 얘기를 경청하는 동안 한 번만 발언하라는 신의 섭리야. 근데 자네는 왜 그 신의 섭리를 무시해가며 남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고 자신만 옳다 떠드는 것이더냐?

위키백과가 BongGon 자네의 개인 일기장인 줄 알아?

자네같은 악플러들때문에 위키백과에서조차 명박산성의 부분은 편집을 차단해 버렸다. 다 위키백과를 개인일기장으로 활용하는 자네같은 악플러들 때문이다. 반성해라. 위키백과는 지식을 공유하는 자리이지 자신의 의견을 남에게 주입시키는 곳도 아니고 일기쓰러 오는 데도 아니야.

예의상 존칭을 써야 하지만 BongGon의 글을 올리는 패턴을 읽어본 결과 이런 인간에게는 존칭을 궂이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BongGon은 자신의 혼자만의 관점으로 위키백과를 훼손 및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징병제는 딴지일보의 2001년도 기사 '징병제를 폐하라'에 명백히 수록된 부분이며 이승만이 징병제를 고집한 것은 맥아더 장군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61.40.78.104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인신공격에 개인 독자연구에 특정 목적을 갖고 오신것입니까? 이러시는 의도가 궁금하군요. G3greag (토론) 2008년 12월 3일 (수) 20:04 (KST)답변

공정하고 정확한 지식 및 정보 제공과 공유가 위키백과 방문목적이다. 너는 우파찬양과 인신공격이 목적인 것이냐?

정확한 근거를 댔다. 딴지일보를 보시오. 거기가서 '징병제'를 검색해 보시오. 뭐가 독자연구란 말이오? 증거가 있는데도 독자연구라니... 어처구니 없어서 말이 다 안나온다. 또한 BongGon이 남김 토론글을 읽어는 봤소? 이승만, 이명박, 박정희, 조갑제 찬양으로 도배돼있고 이를 지적하는 것이 인신공격이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람일세..

야, BongGon! 너 여러개의 아이디로 사람 갖고 놀래? G3greag이 BongGon과 동일인물인거 모를 줄 알고?


꼬우면 이거 읽어봐라.

[[3]]

이것을 참고한게 무슨 독자연구란 말이더냐? 독자연구는 이승만을 찬양하길 강요하는 BongGon네놈이 하는 짓거리인 거다. 분명 앞에서 언급했잖아. 이승만에 대해서는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지만 나쁘게 보는 쪽이 대세라고 말이다. 그래서 4.19사건이 아니라 4.19의거인 것이라고 말이다.

단점을 지적하는 것과 인신공격을 구분해라. 쬐끔이라도 쓴 소리를 무조건적으로 인신공격이라 매도하지 말고!

참고로 모병제추진국민연대라는 단체 역시 실존한다. [[4]] 여기서도 비슷한 발언을 한다. 이 역시 참조사항인데 이 증거들이 전부 나의 독자연구란 말이지? 딴지일보는 실제 존재하는 언론이다.

어느 국가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는 법이다. 허나 BongGon 자네는 쬐끔이라도 좌성향을 보이면 중립적이라 해도 인신공격이니 독자연구니 뭐니 게거품을 물고 있다. 변명은 필요없는 것이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61.40.78.104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죄송하지만 유동닉은 좀 짜져있으세요 --Alpstiger0 2009년 11월 5일 (목) 15:51 (KST)

봉곤님이 우편향이라니... 신선한 의견이군요 adidas (토론) 2009년 11월 5일 (목) 20:13 (KST)답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몇 군데 보이는데;; 혹시 이 문서 번역본인가요?

단순히 문법이 틀린 것이라면 수정하면 되겠으나, 그것 때문에 내용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아서;;;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Lee Soon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이 편집에 대한 의견 필요

이 편집에 편집 요약이 없어 되돌리기 되었습니다. 충분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케골 (토론) 2009년 3월 6일 (금) 10:09 (KST)답변

딱 봐도 단순 장난인 듯 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3월 6일 (금) 11:40 (KST)답변
뭔가요, 뉴라이트의 짓인가요? 하여튼 중립성 위반이군요. -- 윤성현 기여F.A 2009년 3월 6일 (금) 11:47 (KST)답변
김구를 까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런 성향일 수도 있겠군요. 개인적으로는 왜 '라이트'라는 분들이 김구를 욕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3월 6일 (금) 11:59 (KST)답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임정을 왜 욕하는지... 하여튼 자기네들과 적대시하는 사람들과 손잡으면 연좌죄로 욕하는 저치들... -- 윤성현 기여F.A 2009년 3월 6일 (금) 12:01 (KST)답변

고종의 밀사

본문에 '1904년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는 서술과 '1904년 8월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7]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보냈다.[5]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5]'는 서술이 있는데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며 돌려보낸 밀지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는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케골 2009년 10월 25일 (일) 22:55 (KST)답변

징병제 부분

대통령직 수행시 부분에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라고 나와있는데, 미국도 1973년까지 징병제가 유지되었습니다. 사실관계상의 출처도 불명확합니다. --BH Leu (토론) 2009년 11월 8일 (일) 16:36 (KST)답변

족보

양녕대군--장평도정 흔--부림령 순--수주정 윤인--충당--전풍군 원약--경조--인후--경--유원--징하--오--최권--황--창록--경선--승만

버터플라이 (토론) 2010년 2월 10일 (수) 22:57 (KST)답변

사임

사임「명사」맡아보던 일자리를 스스로 그만두고 물러남. - 표준국어대사전 사임은 4.19 직후에 물러날 때 쓰는 용어이지, 탄핵 당했을 때 면직당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Mimacds (토론) 2010년 7월 16일 (금) 15:26 (KST)답변

행적 서술

위키지침으로 행적의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져있나요? 그리고 위키백과는 종이에 인쇄된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이에 따르면 완전히 벗어난 주제가 아닌 이상 가능하다고 나와있는데, 다른 위키지침이 정해진 게 있나요? 그리고 제가 서술한 부분의 바탕은 전부 국사 교과서나 한영우 교수 저로, 대체로 주어를 '이승만'으로 하여, 행적 서술로 되어 있습니다.--Mimacds (토론) 2010년 7월 18일 (일) 14:44 (KST)답변

종이백과사전이 아니니까 내맘대로 써도 된다 이거군요? 여긴 블로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한 행동을 주체로 편집했야지 이승만이 했는가 여부도 불확실한 내용을 이승만이 들어갔으니 무조건 여기 써도 된다 이런 식의 고집은 그다지 올바른 편집태도 같아보이지는 않는군요.-- Oweshiver (토론) 2010년 7월 18일 (일) 15:27 (KST)답변
저는 위키 본문을 인용하거나 아니면 교과서로 사용되는 서적만 근거해서 서술했는데요. 그리고 종이백과가 아니기 때문에 관련된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적의 기준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나와있지도 않은데서, 인용근거가 있는 것을 무작정 되돌리기하는 것은 당신의 고집인 것 같은데요. 여긴 블로그가 아닙니다.--Mimacds (토론) 2010년 7월 18일 (일) 15:36 (KST)답변

서재필과 이승만

서재필의 이승만 대통령 추대 및 옹호 사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대한인총대표대회' 기간에 서재필은 이승만을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새로 탄생할 신대한 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하는 언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4월 15일 회의 도중에 이승만이 4월초에 '만주 접경지역에 수립된 대한공화국'의 '국무경' (Secretary of State)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4월 16일 오전 회의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칭찬하는 발언을 하였다.


" … 이승만 박사는 놀랄만큼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인물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과거 29년간의 역사를 통해 그를 [여러분의] 지도자로 절대 신뢰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의 열화같은 고난을 극복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5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분의 신뢰를 받을 만합니다."

(Dr. Syngman Rhee os a man of wonderfully high attainments, and I know that you have absolute confidence in him as your leader, who han a history of covering the last twenty years. He is a man who has gone throught hellfire and brimstone; he was five years on prison because he belived in Christ, and he is worthy of your confidence ....) (The Frist Korean Congress, p. 71)


그리고 4월 16일 오후 대회 폐회 선언을 한 다음 서재필과 참가자 일동은 필라델피아의 스미스(Thomas Smith) 시장이 제공한 기마대와 군악대의 호위하에 회의장인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를 출발, 미국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적인 '독립[기념]관' 까지 태극기를 흔들면서 행진하였는데, 일행이 독립관에 도착하자 서재필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토록 하였다. 이승만은 영어로 번역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서 일행은 이승만의 선창에 따라 '대한공화국 만세' 와 '미국 만세' 를 3창하였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각자 독립관내에 보존된 '자유의 종'(Liberty Bell)을 오른손으로 만져보고 기념관내를 순람하였다. 이 때 서재필은 독립관 관장의 양해 하에 이승만으로 하여금 1787년 미국 헌법 선포 당시 미국 초대 대통령 G.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재필을 대회 참가자들의 마음속에 이승만이 한국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임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필리델피아 대회 이후 1949년까지 서재필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대통령' 내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 옹호하는 글들을 집필, 발표하였다. 그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 서재필은 1920년 9월 8일자 상해 임시정부 각료들에게 보낸 공한에서 아래와 같이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잘 받들어 모시라고 당부했다.


" … 대한인 중에는 특수한 지도자가 다수 있다. 또한 저들이 다 애국자인 줄 믿는다. 그러나 저들 중에 많은 사람은 조직적 사역의 경험이 부족하니, 이는 이 일에 생소한 연유이다. 본인이 열망하는 바는 대통령 이하 각 사람이 조직적 사역, 즉 미국에서는 팀웍[team work]이라 칭하는 것을 연구하기 바란다.


이박사께서는 많은 친구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반대자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를 복종하는 사람도 많으며, 그를 복종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본인도 안다. 아마 제공 중에도 동일한 사정이 있을 줄 안다. 그를 정부의 수석으로 모시게 한 일이 양책인지 아닌지 모르겟으나, 이 일을 이미 세계에 공포하였는지라, 제들은 그를 복종치 아니하며 혹은 대통령의 명칭을 쟁론하는 이도 있겠으나 이 문제로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때가 아니다.


이미 된 일은 사실이니 우리는 마땅히 그를 옹호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으로 생각함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자. 이 동일한 의의를 제공들에게도 마땅히 응용할 것을 바란다. 제공이 제공의 직무에 자격이 상당하든지 아니하든지 우리가 제공을 대한민국의 대표자로 세계에 공포하였으니, 우리가 제공을 가불가를 막론하고 마땅히 제공을 옹호할 것이다.


우리의 전투는 일본을 대적함이요 대한인을 대적함이 아니다. 만약 제공이 사소한 사정으로 제공의 동족을 대적함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진대 일본에게 큰 안위를 줄 것이오, 제공 중에 당파전투를 하는 것보다 일본을 더 기쁘게 사는 것이 없을 것이다 … "(『신한민보』1920. 11. 25,「서재필박사가 임시정부 각원에게 보낸 공문」)


(2) 서재필은 1922년 2월 6일 구미위원부의 임시위원장직을 사임하고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날 때 이승만 '임시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 … 이렇게 각하와의 공적 관계를 중단하면서 본인은 각하께서 그 동안 본인이 구미위원부의 [임시 위원장] 직을 맡았을 때 베풀어주신 갖가지 후의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본인은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cause)을 위하여 각하께서 본인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다시] 각하의 명령에 따를 것을 확실히 말씀드려 두는 바입니다." (연세대 현대한국학 연구소 소장 '이승만 문서' 에 포함된 서재필의 서한문)


이 사임서는 서재필이 '워싱턴군비축소회의' 후 이승만과 공적 유대를 단절할 때에도 이승만의 지도력에 대해 여전히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3) 서재필은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D.C. 의 라파이엣 호텔(Hotel Lafayette)에서 이승만이 주최했던 '한인 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참석한 다음 7월 23일『신한민보』를 통해 '한국인 친구들' 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서한을 공표했다.


" …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노련한 지도자 이승만 박사가 그동안 착실하게 운영해온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르 ㄹ밀어줄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박사가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실은 한국어를 말하고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단점을 꼬집어 트집잡는 [따위의] 비난은 [제발] 중지하고 한국의 자유라는 크고 고상한 목적을 위해 그분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지원을 베풀어 드리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분에게 아낌없는 정신적 · 물질적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그분은 무력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 독립운동은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저는 올바른 생각을 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재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의 전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께서 저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신한민보』1942년 7월 23일, 서재필,「나의 모든 한국인 친구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4) 서재필은 1949년 이승만 전기 집필가 올리버(Robert T. Oliver)박사에게 보낸「이박사에 대한 나의 인강」(My impressions of Dr. Rhee)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이승만이야말로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한국 역사장 가장 걸출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 … 조국[독립]을 위한 그의 집념과 불요불굴의 헌신적 노력은 그가 한국을 위해서 한 봉사 가운데 가장 돋보인다. 작년[1948]에 대한민국 국회는 오랫동안 최악의 조건하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그분을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나는 이박사 이외에 이 영예에 더 합당한 인물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을 바라며 또 그는 그렇게 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봅니다. 나는 그와 그의 보좌관들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직책을 현명하게 수행하는 한 그와 그의 정부를 밀어주려고 합니다. 그 앞에 놓이 과제는 험난하고 그 과업을 실천함에 필요한 [제도와] 설비는 미비합니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이 시점에서 그와 그의 보좌관들을 가혹하게 비난하거나 근거 없이 험담하지 말고 그들에게 동정과 격려를 베풀어주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나는 이박사와 그의 보좌관들 측에서 정치적 · 경제적 현안들에 관련하여 정직하게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들에 대해 좀더 관용적일 것을 바랍니다. 적어도 공적인 문제로 인한 그들과의 의견 차이가 그들과의 인간적 유대에 까지 악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훌륭하고 대범한 정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본 원칙은 타협하지 말고 끝가지 지켜야 하겠지만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소외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이박사가 한국 역사장 걸출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날 자기 나라를 위해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필생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만큼 여생을 행복하게 즐기기를 바랍니다."

(His perseverance and unswerving devotion to the cause of his country is one of his most notable services to Korea. the long years of his work for his people under thr most trying circumstance war recognized and last year The National Assepmbly elected him to the presidency ofn the first democratic government of Korea. I know of no one who deserves this honor more that Dr. Rhee. I wish him the success which he richly deserves and it is my purpose to support him and his governmentslong as he and his aides do their duties within the framework fo their constitution. His task before him is a difficult and thr facilities with which to carry it on are limited. It is hoped that all lovers of Korea extend to to him more symapthy and emcouragement rather than hurling at them harsh criticisms and unfounded accusations at this time.

Also, it is hopesd that Dr. Rhee and his lieutenats will be more tolerant toward those who have honest but different opinions on political and economic questions, at least, let not the difference of opinion on public problems in terfere with their personal relationship because it is not good politics and it is not broadminded. There should bo no compromise on fundamental principle, but we should not alienate unnecessarily those who hold views different from our own.

I think Dr. Rhee is one of the outstanding figures in Koream history. He has suffered much for his country in the past, but I hope he will enjoy the remainder of his years with some measure of happiness derived from successful achievement of his life's aim.)


이상의 예문들은 서재필이 독립운동가 내지 정치가로서의 이승만에 대해 시종일관 최고의 존경심과 신뢰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Ⅴ. 맺음말


서재필은 '근대 한국 최고의 사상가요 실천가' 였다. (전봉덕.「서재필의 법사상」,『한국근대법사사상사』<서울: 박영사, 1981>, 266쪽). 그는 또한 3.1운동 후 미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미국시민이었던 그는 1919년 4월부터 1922년 2월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 기간에 그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받들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해 홍보 및 외교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워싱턴 군비축소회의' 에서의 외교가 실패한 다음 1925년 3월에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상해의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 · 면직당함으로써 - 단기적으로 볼 때 -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승만이 서재필이 표방한 외교독립노선에 따라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그의 노력은 장기적으로 볼 때 주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발표에서는 이승만과 서재필이 3.1운동 후 3년간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부각시켰다. 서재필은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개회된 '대한인총대표회의' 에서 이승만을 한민족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한 다음 1940년대까지 꾸준히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 옹호하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와 평가는 해방후에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이승만에게는 여러 가지 약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승만을 한국인 지도자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이며 따라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자격을 가장 잘 갖춘 지도자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이승만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종래 이승만 비판자들이 주장한 이승만 '지도자 자격 미달론' 내지 '서재필의 이승만 불신론' 이 사실무근임을 보여준다.



  • <참고 자료>

Philip Jaisohn's Memo to John J. MUccio, the first U.S. ambassador to Korea, September 1948


" .... What I wish to tell you is something about a few key men in the present Korean Government. While I do not know many of them personally, I am familiar with some of them. I have known Dr. Syngman Rhee for many years. In fact, I know him better than any other persons in his Government. I also know some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have found them to be willing to do what id right for their country. But all of them, including Dr. Rhee, have had no practical experience in government ro business, and have little education except, perhaps, Dr. Rhee who has had an Americam college educations.

Dr. Rhee is a man of some ability and of patriotism for his country, but his views are narrow and some of his ideas are impractical; this is due to lack of experience. His Cbinet is composed of men and a woman who do not seem to enjoy the confidence of the majority of the Korean people. However, I rather think the present sentiment against the Rhee Cabinet is unjust because it has not had time to demonstrate whether it is or is not capable of servinf Korea as it should.

Before I left Seoul, I advised the Korean people to give the Rhee Government a chance to show what it can do. I think a year's trial will definitely tell whether it can or cannot do the job expected of it. I am in hopes that the people will give Rhee and his Cabinet that chance and I sincerely hope they will make good for their own as well as that of Korea. I think, with your advice and Washington's friendly direction, they will be kept in the right path. However, you will have to watch their actions closely and, if you find that they do anything to deviate from the right path, you will need to give them your friendly advice; at times you may even have to be firm. this is a confidential communication, and I hope you will treat it as such,"


(Channing Liem, Philip Jaisohn, pp. 316-7)

이승만 문서 나눕시다.

문서용량이 상당합니다..용량을 줄입시다.너무 길어요--정인우 (토론) 2010년 10월 2일 (토) 15:46 (KST)답변

문서양을 줄이자는 것에 찬성합니다. 다만, 제1공화국 과 같은 기존의 문서를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승만 씨에 대해서 대통령이라는 공인으로서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은 제1공화국 문서에 내용을 넘겨주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HappyMidnight (토론) 2010년 10월 8일 (금) 18:44 (KST)답변

이박사와 서재필의 관계

이승만과 서재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고처질수있도록 제가 위에 가져다논 서재필문서를 삽입하기 바랍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112.161.233.153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서재필이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건너갈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부의 친일화 또는 반정부화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시된 자료는 서재필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적어도 20년 이상 지난 뒤의 자료입니다. 다시 말해 서재필과 이승만의 관계가 "개선" 또는 "반전"된 뒤의 것입니다. 따라서 서재필과 이승만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123.111.182.1 (토론) 2013년 9월 26일 (목) 13:33 (KST)답변

문단이 너무 많은데...

어느 정도 줄여도 되지 않나요? --유민 (話す·奇与) 2011년 2월 2일 (수) 10:08 (KST)답변

방금 떠오른 것이 있는데, 이 문서도 다른 문서처럼 "시리즈"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먼저 이 문서는 간단한 형식으로 두고, "생애", "평가" 등으로요.. --SVN Ta.】【Con. 2011년 2월 2일 (수) 10:10 (KST)답변
분단 방식이라..괜찮군요 :-) --유민 (話す·奇与) 2011년 2월 2일 (수) 22:01 (KST)답변
제1공화국과 중복되어 서술된 내용부터 정리할 필요도 있습니다. (1)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의 행적에 대한 서술 (2) 이승만이 아닌, 제1공화국 정부가 주체인 행위에 대한 서술, (3) 단순히 - 이승만과 무관하게 -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서술 등은 제1공화국으로 옮기고, 이승만에는 제1공화국 시기에 있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들만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HappyMidnight (토론) 2011년 9월 3일 (토) 11:13 (KST)답변
다른 대통령 문서와 비교해서 예외문단은 기타로 정리하는것이 좋을것 같네요 특히 수상경력,학력,사상과신념 가족 등이 대통령되기 전,후 문단과 동급으로 최상위 목차를 차지하는것은 적당하지 않아 보이네요--라이딩(RidingW) (토론) 2013년 6월 1일 (토) 16:43 (KST)답변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가 출처가 될수 있나요?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가 백:신뢰를 만족하는 출처가 될수 있나요. 이승만을 기리기위한 사적인 단체로 보입니다. [5]

"제2조 (목적) 본회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위업을 기리고 숭고한 독립정신과 건국이념을 선양하여 새시대를 열어갈 국민정신 함양에 이바지 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라이딩(RidingW) (토론) 2013년 6월 1일 (토) 16:50 (KST)답변